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70화 (70/120)

강탈 준비 (4)

저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난 잔웃음으로 잘게 떨리는 차설희의 어깨를 응시하며 천천히 기억을 뒤적였다.

“……당신은 제 어머니랑 너어어무 닮았거든요.”

난 그녀의 이어지는 대답에서 그 기시감이 일어난 장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차설희와 3층 사무실을 탐색할 때 나눴던 대화였다.

그때 분명 차설희는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거라는 확신과 그 이유로 얼토당토않은 ‘느낌’을 들였었다.

“그냥 인상부터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아요, 그냥 완전 첫인상부터어어―”

말끝을 길게 늘이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는 차설희.

“계산적일 것 같고, 그냥 보기만 해도 이상하게 꺼림칙하고오―”

난 쉬지도 않고 악담을 쏟아붓는 차설희와 조용히 눈을 맞췄다.

그날 차설희가 아무렇지 않게 얼버무리며 닫아버렸던 빗장.

그 빗장이 활짝 열린 상태로 아주 비밀스런 무언가를 서서히 토해내고 있었다.

“……나한테는 몰라도 어머니한테 쓰기엔 단어들이 너무 센 것 같은데.”

“…….”

난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빗장의 문을 조용히 부여잡았다.

차설희에게 대답할 여지를 주는 은근한 부추김.

난 내 대답에 옅은 쓴웃음을 머금은 차설희를 조용히 응시했다.

“……이런 집이 있으면, 저런 집도 있는 거죠.”

“…….”

“어쨌든 어머니도 분명 안 죽으셨을 테니, 당신도 안 죽을 거예요.”

……분명히.

낮게 읊조리는 중얼거림과 함께 맥주를 들이키는 차설희.

난 꽤 오랫동안 꿀렁이는 그녀의 목울대와 그 후 한참을 캔맥주에 맺힌 물방울을 이리저리 어루만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취기가 아닌 다른 의미로 흐릿한 동공과 은은한 불빛으로도 진하게 나타나는 볼의 홍조.

“…….”

그렇게 한참을 캔맥주만 어루만지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아주 자연스럽게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그다음을 물어봐 주길―

어떤 계기로든 활짝 열린 빗장에 조심스레 들어와 주기를.

비밀이란 건 언제나 그랬다.

나눔이나 공유 등의 단어와 가장 먼 대척점에 있는 단어.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그 비밀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대상을 간절히 원한다.

자신의 가장 어둡고 깊은 비밀까지 이해해주는 동반자를 평생에 걸쳐 갈망한다.

그런 ‘감정의 교류’라는 걸 중시하는 여자들이라면 더더욱.

“어머니를 조금 싫어하는 눈치인 걸 보니 평소에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했구나?”

그러니 나로서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이다.

온전한 차설희를 가지기 위해, 또 옭아매기 위해 너무나 필요했던 단서와 대화들.

하긴―

서로의 말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침실에 퍼지는 맑은 웃음소리.

덕분에 캔맥주만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너희 자매들 얼굴만 봐도 하고 싶다는 일은 뭐든지 해주셨을 것 같기는 해.”

……아빠.

내 너스레를 바라보던 그녀가 옅은 미소와 함께 올리는 이름.

“참 좋은 분들이셨죠.”

“……?”

부드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던 말문이 잠시간 턱― 막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말을 더듬었다.

……뭐? 좋은 분들?

풋―.

그리고 예상했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다 짧게 미소 짓는 차설희.

그녀가 아직 추스르지 못한 내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복 자매예요, 하얀이랑 저. 정확히는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이부자매.”

“……잠깐만, 아버지가 다른데 어떻게―”

“성이 같냐고요? 아버지랑 아빠가 같은 차 씨니까요.”

“…….”

봐요. 소름끼친다고 했죠?

깜짝 놀랐냐는 듯 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좁히는 차설희.

왠지 모르게 그녀가 되물은 대상이 지금 이 대화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다 이해하셨던 아빠도 이름만큼은 양보하실 수 없었나 봐요.”

“…….”

“원래라면 하얀이 이름은 설하로 할 계획이었대요, 어머니가.”

차설하.

“그런데 아빠가 무지무지 화내고 반대하셔서 설하가 아닌 하얀이로 결정된 거예요. 하얀이 이름이.”

아마 성까지 똑같은데 이름까지 비슷한 건 도저히 참으실 수가 없으셨나 봐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짝살짝 흔드는 다리와 규칙적으로 맥주캔을 위아래로 쓸어내리는 양쪽 엄지.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덤덤한 목소리.

“……아빠가 혹시 널 많이 미워하셨어?”

“푸흐― 아니여. 너무너무 좋은 분이셨다니까요? 그냥―”

실없는 웃음을 천장 위로 흘리며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차설희.

“아빠랑 아버지. 둘 다 너무너무 좋은 분들이셨어요.”

호칭.

저 다른 두 개의 호칭이 그녀가 아버지를 구분하는 방법인 듯했다.

“……몇 살 때부터였더라? 무튼 어릴 때부터 규칙적으로 저를 만나러 오셨어요. 그리고 그날들을 꽤 열심히 기다렸던 제가 조금 생생하게 기억나요. 정말 그날은 제가 원하는 건 모두 할 수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나 생일도 아닌데 갖고 싶은 건 모두 갖고, 가고 싶은 곳은 모두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작은 미소와 함께 과거를 되뇌이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만나는 날이 늘어날수록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게 되더라구요. 아버지와 놀이동산에서 정말 신나게 놀았었던 날이었나? 그래서인지 놀이동산을 나온 하늘은 이미 깜깜한 밤이었고, 아버지는 제게 햄버거를 사주시겠다고 했어요.”

“매미처럼 꽉 붙어있던 저를 의자에 앉히시고 아버지는 주문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나셨죠. 그날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다시 돌아올 아버지를 놀래키기 위해서인지 저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죠. 그냥 눈을 감고만 있었어요. 그냥―”

……눈만.

덤덤하기에 오히려 더 선명히 들리는 옅은 떨림.

“그리고 어머니가 오셨어요. 이렇게 밤늦게까지 아버지와 있을 줄은 모르셨던 거겠죠. 서둘러 벽에 기댄 제 얼굴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과 뒤늦게 돌아오신 아버지의 발걸음이 아직도 생생해요.”

난 그녀의 말을 따라 그날의 광경을 천천히 그려갔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어릴 적의 차설희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와 가까이 다가온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눈을 부릅뜨며 다가가는 차설희의 어머니.

그렇게 서로 주고받는 꽤 격한 대화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셨고.”

“또 아버지는 아직도 사랑한다고 제발 돌아와달라고 비셨어요. 어머니는―”

파르르 떨리는 말끝과 함께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

그녀는 옅은 물기와 함께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끝이라고, 도대체 몇 번을 다시 말하냐고 무척이나 나쁜 말들을 쏟아부으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걸 참으실 수가 없으셨나 봐요.”

“갑자기 끊긴 어머니의 말에 살짝 눈을 뜨니, 어머니를 꽉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어요.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밑으로 푹― 숙이는 고개와 여전히 서로를 교차하며 살랑이는 다리.

그녀가 이미 빈 캔이 된 맥주캔을 살짝 찌그러트리며 의미 없이 웃었다.

“그다음부터 아버지가 저를 찾아오시는 일은 없었어요. 아마― 아버지에게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잇기 위한 끈이었나 봐요.”

“…….”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엄청 좋은 분이세요. 딸이 이렇게나 성공했는데 지금까지 연락 한번 없으셨거든요. 그동안 언제 기사가 터질까 조금 무서웠었는데.”

혹시나 또 저를 통해 어머니에게 복수하지는 않을까 해서…….

후우우―

길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꾹 다무는 입술.

난 살랑살랑 흔드는 자신의 다리만 바라보고 있는 차설희를 바라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기저 심리.

어쩌면 사람의 초창기인 유년기부터 형성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무거운 감정.

그렇기에 끝없이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바닥에 박혀가는 절대 떼어낼 수 없는 기억.

“알겠어.”

“……응? 뭐가요?”

“네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다고.”

“……?”

이어지는 말에 저절로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는 차설희.

그녀가 이내 잔웃음을 토하며 나를 향해 크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그냥 술에 취해서 할 말 못 할 말 다 내뱉는 중인데요?”

“아니.”

흔한 일이다.

부모의 허물을 깨닫고 절대 그렇게 되지 않으려 발악하는 자식의 이야기는.

“너랑 어머니는 이미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야.”

“……갑자기요?”

“어. 얘기를 들어보니 어머니랑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안 보이는데?”

“……예?”

자신을 탄생시킨 사랑이 너무나도 쉽게 땅바닥에 구르는 광경을 직접 봤기에 도리어 진짜 사랑에 집착하게 되는 일.

“애초에 그런 외모로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자체가―”

“잠깐, 잠깐만요. 갑자기 그건 왜― 그건 지금 이 대화와 전혀 연관이 없는 말인데요. 저는 그냥 뭐랄까 최대한 효율적인―”

“아니.”

단호한 대답에 자연스럽게 끊긴 그녀의 말.

난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다시금 되뇌었다.

“아니잖아.”

“…….”

“넌 지금 나한테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게 계속해서 티를 내면서 제발 알아봐달라고 말하고 있잖아.”

“…….”

“아니야?”

내 물음에도 그저 파르르 떠는 동공으로 나를 가득 담기만하는 차설희.

난 이제야 전부 이해되는 그녀의 기저 심리에 작게 미소 지었다.

애정결핍.

만인의 사랑을 받던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결핍.

자신도 모르는 정말 깊고 어두운 결핍을 단 채로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을 조용히 반추했다.

지금껏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선명히 되감기며 그 고운 미성을 토해냈다.

현실의 헌신짝같이 버려지는 사랑을 목격했기에,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특별한 사랑을 동경하던―

환상을 파는 직업임과 동시에 누구보다 환상을 바라던 여자.

그리고 그 깊고 어두운 결핍을 마침내 모두 이해한 남자.

난 그녀의 동공에 온전히 비쳐오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바라던 환상처럼 백마를 타진 못했으나―

그것과 비슷한 이능을 가진, 특별한―

“괜찮아.”

난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의 손등을 쓸어내리다 더 깊게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그리고 나한테 전부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

“이제부터 이런 비밀은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언제든지 나한테 말하는 거다? 알겠지?”

“……네.”

너무나도 특별한 상황에 너무나도 그녀가 바라던 말들.

난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계속해서 그녀가 바래왔던 말들을 조용히 속삭였다.

툭―!

그러던 어느 순간, 조용히 내 어깨 위에 얹어지는 작은 무게.

살짝 고개를 돌리는 내 얼굴로 향긋한 샴푸 냄새가 조용히 흘러들었다.

툭―!

그리고 잠깐 고개를 돌린다고 속삭임을 멈춘 내 어깨를 톡― 두드리는 그녀의 머리.

덕분에 다시 확― 풍겨오는 샴푸 냄새를 맡으며 마치 재촉하듯이 내 어깨를 두드린 그녀의 요청에 응해주었다.

“이미 네 어머니와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잖아.”

“게다가 함께하는 사람도 다르고.”

“그리고 넌 어차피 이제 그런 짓은 하고 싶어도 영원히 못해.”

“……왜요?”

계속 이어지는 내 속삭임을 조용히 듣다가 처음으로 되묻는 차설희.

난 그녀의 물음에 작게 웃으며 이번에 내가 어깨를 살짝 튕겨주었다.

“왜겠어?”

“……꼭 이런 분위기에 그런 말을 하셔야 겠어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툭― 다시 머리로 어깨를 조금 강하게 내리찍는 그녀.

난 작게 웃으며 깍지를 낀 손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

그 이후로 길게 이어지는 침묵.

오직 은은한 무드등만이 고요한 침실을 홀로 밝히고 있었다.

내게 머리를 기댄 채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다리.

그 다리가 천천히 멈추는 순간 지근거리에서 그녀의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안 졸려요?”

어깨에 기댄 머리를 땐 후에 나를 올려다보는 게슴츠레한 눈.

이미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졸음을 훑어보며 그녀의 반대편 손에 있는 캔맥주를 이어받았다.

서랍 위에 또다시 쌓인 찌그러진 캔맥주와 무드등의 전원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는 소리.

순식간에 어둠에 물든 침실 사이로 조용히 눈을 비비적거리는 차설희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선다.

툭―!

간이침대의 삐걱거림보다 훨씬 더 짧은 충격음으로 나를 반기는 매트리스.

간이침대 두 개를 이은 원래의 침대보다는 훨씬 좁아졌지만, 우리에겐 별로 큰 상관이 없었다.

스으윽―!

내가 침대에 눕자마자 습관처럼 내게 푹― 안겨 오는 차설희.

난 아까보다 더 진하게 올라오는 샴푸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툭― 툭― 툭―

규칙적인 토닥임에 차설희가 계속해서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내게 파고들었다.

절대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딱 붙은 두 명의 남녀.

난 계속해서 내게 파고드는 차설희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그녀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위해 발장구치지 않았다.

조금 더 깊게 들어오기 위해 고개를 파고들 뿐이었다.

강탈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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