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69화 (69/120)

강탈 준비 (3)

손전등 불빛과 흐릿한 촛불이 아닌, 환한 전등이 내리쬐는 6층.

뚜벅― 뚜벅―

태양이 사라진 밤에도 여전히 주변을 구분케 하는 불빛에 저절로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밤마다 어두컴컴하게 가라앉은 복도를 보며 쌓여가던 체증이 싹 사라진 후련한 느낌.

‘삶의 질’이라는 항목에 전력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난 방금까지 있는 왕권이란 왕권은 모두 쏟아붓고 나온 무기 보관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굳게 닫힌 문 안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을 수십 병의 소주병들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난 후련한 기분과는 별개로 속이 텅 빈듯한 공허함을 함께 느끼며 손에 든 물품 다시 내려다보았다.

학생회관에서 어쩌면 가장 많이 노획해왔을지도 모를 식량.

……이걸 식량이라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아리방에 생수는 없어도 이 식량을 담은 상자들은 넘치도록 쌓여있었다.

학생회관의 남성 생존자들이 그렇게 퍼부어도 여전히 쌓여있던 소주와 맥주.

난 그 중 캔맥주 종이 박스 하나를 침실로 가져가고 있었다.

끼이이익―!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제1열람실을 여는 익숙한 소음.

활짝 열리는 철문 너머로 다시 어두컴컴한 침실이 나를 반겨왔다.

복도의 환한 전등 불빛이 스며들지 못하는 넓은 침실.

난 서랍 위에서 은은하게 침실을 밝히고 있는 무드등을 바라보며 문을 닫았다.

쿵―!

여학생 휴게실에서 노획한 조명기구와 똑같이 여학생 휴게실에서 노획한 진짜 침대.

난 간이침대가 아닌 푹신한 매트릭스가 깔린 진짜 침대 위에 앉은 차설희와 눈을 맞췄다.

“…….”

철문이 쾅― 닫히는 요란한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차설희.

은은한 무드등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그리 밝게 드러나진 않았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내가 살짝 들어 올린 캔맥주로 옮겨진다.

“……맥주?”

살짝 커진 눈으로 캔맥주를 바라보는 그녀 옆에 앉아 가볍게 종이 박스를 찢었다.

찌이익―!

난 얼떨결에 캔맥주를 받는 차설희를 바라보며 남은 캔맥주를 서랍 위에 올렸다.

그런 내 손에도 들려있는 캔맥주 한 캔.

냉장고에 담겨있다 나와서인지 서늘한 촉감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무드등으로도 확연히 보이는 캔맥주 겉면에 방울지는 동그란 물방울들.

“당분간 꽤 오랫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

“…….”

“그러니까 일종의 작은 송별회?”

치이익―!

캔맥주의 따개를 따자마자 시원하게 흘러나오는 낯익은 소리가 지금은 몹시도 어색했다.

보글보글― 탄산이 캔맥주 안에 거품치는 경쾌한 소리.

“…….”

그저 조용히 내가 캔맥주를 따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가 내 눈빛에 캔맥주에 손을 올렸다.

치이익―!

그녀의 캔맥주에서도 흘러나오는 탄산 빠지는 소리.

난 캔맥주를 딴 후에 그대로 다시 양손으로 캔맥주를 쥐는 차설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굴은 또 왜 그래?”

“……제 얼굴이 왜요.”

“아니― 생각했던 표정이 아니라서 조금 당황스러운데.”

살짝 비스듬히 비튼 고개와 가늘어진 눈.

난 조금 더 그녀의 얼굴에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그렇게나 바라던 차하얀을 데리고 오겠다는데 표정이 왜 이렇게 애매하지?”

“……하나도 안 애매해요. 지금도 엄청 기쁜데요?”

“…….”

굳이 말로 내뱉지 않아도 눈으로 충분히 가능한 대답.

그녀가 더 가늘어지는 내 눈을 보며 항변하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정말로요―. 드디어 제 노력이 보상받는 날인데 안 기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그녀가 작게 어깨를 들썩인 뒤 손에 든 캔맥주를 잠깐 들어 올렸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서…….”

“그럼 소주로 바꿔 올까?”

“그냥 술 자체를 싫어한다니깐요?”

“아, 그러면 소맥?”

“아니― 소맥이든 소주든 와인이든, 그냥 술 자체가―”

계속해서 말을 잇던 그녀가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 그녀의 동공에 비춰오는 실실 웃고 있는 나의 얼굴.

“그럼 술 자체는 싫어하는데 술자리는 좋아하는 편?”

“……그만 하세요, 슬슬 주먹이 부르르 떨리네요.”

“이건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데―, 여자들 중에 술은 싫어해도 술자리는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잖아.”

“……그럴 시간에 집에서 드라마 정주행하는 게 훨씬 더 이득이겠네요.”

오…….

그녀의 답변에 저절로 둥글게 모이는 입.

난 그녀가 내뱉은 의외의 답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읊조렸다.

“이게 하이퀸즈가 탑이었던 이유인가?”

“…….”

“그러고보니 하이퀸즈에 관한 열애설은 들어본 기억이 없네. 분명 파파라치나 기자들이 징하게 달라붙었을 텐데.”

“숙소, 일, 밴, 숙소, 일, 밴만 주구장창 반복하는데 기자들이 찍을 사진이 있겠어요?”

“그러면서 숙소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만 계속 봤다고? 모든 멤버들이 다?”

“아니요. 저랑 하얀이만 그랬고 다른 언니들은―”

“와― 대단하네.”

굳이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을 빠르게 자르며 다시 주제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틀었다.

“이거 완전 아이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수준인데? 뭐 운명이나 천직, 그런 거 아니야?”

“뭐 별거 가지고 운명이랑 천직이래…….”

내 말에 기겁하듯 작게 눈을 찌푸리지만 옅게 새어 나오는 미소.

“그거 때문에 피곤한 일들도 많았어요. 다른 그룹이 열애설만 터졌다 하면 그쪽 팬들이 저희 그룹 끌고 와서 하이퀸즈처럼 프로 의식 없다고 욕하고― 또 그럼, 그 욕에 기분 나쁜 팬이 또 하얀이랑 남돌들 억지로 엮은 찌라시 들고 와서 욕하고…….”

“그쪽도 나름 이리저리 복잡하네. 근데 차하얀 그 찌라시들은 진짜야?”

“……진짜겠어요? 그냥 하얀이가 거절을 잘 못해서 작은 오해들이 쌓인 거지. 게다가 제가 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누가―”

탁―!

어느새 흥분해서 제 두 눈을 양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속사포처럼 말하고 있는 차설희.

난 대화 도중에 부딪힌 캔맥주와 아주 자연스럽게 맥주를 넘기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꿀꺽― 꿀꺽―

꽤 오랜만에 다시 맛보는 캔맥주를 목으로 넘기던 와중에 맥주를 마시는 자신을 자각했는지 움찔― 몸을 떠는 차설희가 시야에 담겨온다.

“술 자체를 싫어한다더니 생각보다 훨씬 잘 마시는데?”

“……이건 조금 특수한 경우죠.”

차설희가 내 놀림에 반발하듯 오히려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송별회라면서요. 거기다 같이 마셔줄 사람도 저밖에 없고.”

“그건 그렇지.”

“그렇죠? 그리고 어차피 안 마신다고 했어도 당신이 마시라 하면 마셔야 했는데요, 뭘.”

오히려 순식간에 맥주 한 캔을 다 비운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손에 서랍 위에 남아있던 맥주 캔을 들려주었다.

치이익―!

다시 캔맥주를 따고 맥주를 들이키는 차설희.

난 점점 올라가는 캔맥주와 함께 쉴 새 없이 꿀렁이는 그녀의 목울대를 바라보다 다시 서랍을 응시했다.

그곳에 아직도 한가득 남아있는 캔맥주들.

난 거의 반도 들이키지 않은 내 캔맥주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떨 땐 놀림 기가 가득한 내 잡담에 눈을 가늘게 뜨고, 또 어떨 땐 과거를 추억하듯 꽤 먼 곳을 보는 눈동자로 미소 짓는 그녀.

탁―! 탁―!

그렇게 이야기 중간중간마다 당연하다는 듯 서로 맞부딪히는 캔맥주와 서랍에 쌓여가는 살짝 찌그러진 캔맥주들.

그리고 그 모든 캔맥주들의 주인은 차설희였다.

“그리고 그땐 저희가 아무것도 모르던 신인이었어서―”

난 지금도 내게 하이퀸즈 시절의 이야기를 하며 작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양 볼을 바라보았다.

이미 붉게 달아오른 볼과 귓불.

나를 보면서도 살짝 엇나가있는 흐릿한 동공과 아까보다 확연히 커진 제스쳐들.

술과 취기가 이래서 무서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온몸에 퍼지니까, 그리고 그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으니까.

“이거 내가 차하얀을 찾기 위해 잠시 떠나는 송별회인데 너무 네 얘기만 하는 거 아니야?”

꿀꺽꿀꺽― 맥주를 들이키는 차설희에게 조용히 스미는 속삭임.

“……아.”

내 읊조림에 맥주캔을 입에서 뗀 그녀가 작게 탄식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평소의 차설희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푼수 같은 표정.

“헤헤― 너무 제 얘기만 했어여어?”

살짝 올라가는 끝 음에 제어할 수 없는 웃음이 튀어나온다.

난 완전히 풀어져 방긋방긋 웃어대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하얀을 찾으러 가면 조금 오랫동안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데.”

“…….”

그런 그녀에게 다시금 꺼내는 아주 민감한 주제.

난 차하얀을 찾으러 떠나겠다는 내 말이 끝난 뒤부터 계속해서 복잡해 보였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진심으로 바랬고, 그렇기에 모든 수모를 견디면서도 유지하려 했던 계약의 보상.

그 보상을 주겠다는 말에도 완전히 기뻐하는 티를 내지 못했던 그녀.

난 차설희에게 차하얀이 어떤 의미의 존재일지 조용히 생각했다.

차설희의 기저 심리인 ‘애정 결핍’.

그리고 그녀의 가족인 ‘차하얀’은 분명 그녀에게 애정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겠지.

하지만, 이제 그녀에겐 내가 있었다.

그것이 자의였든, 아니면 타의였든― 어쨌든 너무나도 선명하고 분명한 애정을 주는 새로운 존재.

그 존재가 차하얀을 찾기 위해 조금 먼 곳으로 떠난다는 건 그녀에게 아주 복잡한 심경을 야기하겠지.

“솔직히 지금도 이게 맞는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네. 거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이동하는 건데, 내가 정문에서 조금 충격적인 장면을 봐버렸거든.”

아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조잘거리던 입이 어느새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저 흐릿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녀에게 이제는 내가 입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양팔을 조금 크게 벌렸다.

“정말 이것보다 훨씬 큰 뭔 헐크 같은 새끼가 정문을 지키고 있더라니까. 정문에 그런 새끼가 있는데 북쪽 끝에는 뭐가 있을지 누가 알아? 그게 아니더라도 도서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엔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조금 많이 위험할지도 모르지.

작게 흘러드는 끝말에 확실히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

난 계속해서 이야기를 계약의 이행보다는 그 이행의 위험성으로 몰아갔다.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부채 의식을 돋우며 그녀의 흐릿한 정신을 계속해서 툭― 툭― 건드렸다.

실제로도 ‘차하얀’을 찾기 위해 농과대로 이동하는 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불안 요인은 무엇보다 아직까지 차하얀이 속해있는 캠프가 무사한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하얀은 이미 옛날 옛적에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번에 학생회관을 처리하며 그 점을 더더욱 분명하게 느꼈다.

참칭자라는 존재와 놈이 만들어내는 제법 쓸만한 인프라에서 마음껏 날뛰는 수하들.

농과대가 이미 대학 내에 남아있는 참칭자의 손에 떨어졌어도 그리 크게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학생회관에 준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면, 차하얀을 되찾는데 그리 큰 의미를 둘 수 없게 되겠지.

차하얀은 이미 죽거나, 아주 처참히 망가졌을 테니.

“……아니요.”

그리고 이행의 위험성을 살살 강조하던 내게 치닫는 속삭임.

차설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당신은 절대로 안 죽어요.”

취기에 몸을 맡겼으면서도 여전히 듣기 좋은 미성.

“……왜?”

난 그 기묘한 확신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 물음에 차설희가 잔웃음으로 잘게 떨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느낌?”

자신도 자신의 대답이 어이없는지 계속해서 잔웃음을 흘리는 차설희.

난 그녀의 대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대화, 분명 어디선가 나눈 적이 있는듯한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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