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67화 (67/120)

강탈 준비 (1)

뚝― 뚝―

학생회관 1층 복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검붉은 핏방울.

난 어느새 작은 웅덩이가 된 핏물에 눈살을 찌푸리며 쇠 파이프를 크게 흔들었다.

촤아악―!

화장실 맞은편 벽에 물감처럼 퍼지는 핏물과 작은 살점들.

난 다시 학생회관에 도달하는 동안 징하게 죽였던 좀비들을 생각하며 한 번 더 쇠 파이프를 크게 흔들었다.

촤악―!

조금 더 작게 벽을 물들이는 핏물이 스르륵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어― 조금 주제넘은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관장님.”

핏물이 현대 미술처럼 캔버스 벽을 흘러내리고 있는 걸 보고 있던 와중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물음.

난 내 옆에서 함께 대기 중이던 고장훈에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저대로 그냥 두어도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관장님.”

고장훈의 시선을 따라가니 정문 앞에 엔진음을 덜덜― 흘리고 있는 편의점 배송 차량이 들어선다.

난 편의점 배송 차량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유서준을 바라보며 고장훈의 염려에 답했다.

“냅둬. 팽현재 밑에서도 툴툴거리는 거 빼고는 아무것도 못 하던 놈이야.”

그러니까, 카푸어 씹선비였던 거겠지.

사람들에게 불리는 별명은 그 사람의 꽤 많은 면을 미리 보여주는 법이다.

“게다가 도서관이 학생회관에 비하면 상대적 천국인 게 거짓말도 아니잖아.”

난 도서관을 둘러보던 유서준의 눈빛과 ‘굴복’ 상태를 알리는 메시지를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어차피 유서준에겐 내 도서관 외엔 남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

그 멀리서도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운전대를 잡고 대기 중이던 유서준이 1층 복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연히 화장실 앞에 있던 나와 마주치는 눈빛.

놈이 잠깐 사이 연결된 시선을 피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에 너무나도 어색해진 자세로 운전석에 굳어있는 유서준.

난 놈의 어정쩡한 자세에 작게 웃으며 절대로 내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굳어있는 놈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이름 유서준.

속칭 ‘카푸어’.

놈은 아주 대놓고 무언가에 특화되었다고 알리는 속칭처럼 ‘차량’에 특화된 이능력자였다.

그 특화에 아주 알맞게 놈의 첫 번째 스킬 이름 또한 ‘차량 등록’.

그렇게 등록된 차량은 별도의 열쇠가 존재하지 않아도 언제든 시동을 켜고 차량을 운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등록된 차량에 무기를 부착하거나 엔진을 강화시키는 등, 다양한 ‘개조’ 또한 가능하다는 걸 놈에게 전해 들었지만―

이걸 ‘이능력’이라고 분류하기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결국 어떻게 개조되든 ‘차량’일 뿐이라는 한계는 너무나도 명확하니까.

탁―! 탁―!

난 혹시나 아직도 묻어있을 흙먼지를 가볍게 손뼉을 치며 털어낸 뒤, 저 편의점 차량이 학생회관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다시금 되짚었다.

끼에에에엑―!

덜덜거리는 엔진음에 환장하며 달려들던 좀비 새끼들과 내가 강제로 가로수를 뽑아 들며 억지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샛길들.

도서관에서 조원들을 이끌고 학생회관에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소요된 시간을 되뇌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도 저 편의점 차량을 지키기 위해 방대화가 광장에서 대기 중이었으니 손이 아주 많이 가는 능력인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끄응― 후우― 후우―”

난 혹시나 내가 바라볼까 잔뜩 긴장하며 나를 지나치는 캠프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캠프원이 쉼호흡을 하며 옮기고 있는 무언가 잔뜩 든 택배 상자.

학생회관의 물자를 줄지어 옮기는 캠프원들의 상자가 차곡차곡 배송 차량에 적재되고 있었다.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까웠던 사범대가 아니라면 이제 캠프원들이 직접 물자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본다면 차량에 특화된 유서준의 능력은 ‘이능력’이 맞았다.

스스로를 강철과 같이 딱딱하게 만들던 육체계 능력이나 한순간에 인간의 오감을 차단하는 팽현재의 능력도 무척이나 특출났지만―

유서준의 능력은 뭐랄까,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물론 그런 면에서 생각한다면 오히려 팽현재가 언터처블한 능력자였지만, 놈은 혹시 모를 변수 때문이라도 무조건 죽여야 했으니 유서준이라도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언제 다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이동 수단 특화 능력자였으니 더더욱.

난 아직 굴복에 멈춰있는 놈의 상태를 되뇌이며 조용히 뇌까렸다.

“조만간 좋은 때가 오겠지.”

끼이이익―!

그 순간,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 환복.

난 여자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나오는 차설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킁― 킁―!

작게 찌푸린 얼굴로 상의에 코를 킁킁대고 있는 차설희.

본래 그녀가 입고 있던 흰색 셔츠와 청바지는 고이 접혀 그녀의 팔목에 들려있었다.

“……이거 냄새가 조금 이상한데요?”

내 앞에 다가와 여전히 살짝 찌푸린 얼굴로 상의를 가리키는 그녀.

난 흰색 반팔 티와 검은색 테니스 스커트로 옷을 갈아입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빼어난 비율 덕에 안 그래도 길게 쭉 뻗은 각선미를 더 부각시키는 테니스 스커트와 품이 조금 남은 편한 디자인의 반팔 티.

여대생들이 꽤 힘을 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데이트룩에 규격 외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합작품에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예쁘네.”

“그건 당연하구요.”

‘누가 입었는데.’라 뒷말을 흘리며 아주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는 차설희.

그녀가 마치 프로 아이돌이 뭔지 보여주듯 작게 바람을 일으키며 다리를 살짝 교차했다.

덕분에 나풀거리며 작게 흔들리는 테니스 스커트와 그 아래로 유난히 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새하얀 다리.

“그리고 이거 테니스치마. 유행이 지나도 너무 지난 아이템인 건 아세요?”

“……그러니까 그걸 택배에 부쳤던 거겠지.”

지금 차설희가 입고 있는 저 옷들은 학생회관에 위치했던 우체취급국에서 노획한 물품들이었다.

갑작스런 좀비 아포칼립스에 배송지로 떠나지 못하고 우체국에 여전히 남아있던 택배 상자들.

난 지금도 여전히 그 택배들을 전부 열어보고 있을 캠프원들을 떠올리며 앞쪽 계단을 눈짓했다.

“…….”

내 지시가 떨어지고 나서야 유령처럼 어느새 차설희 앞에 다가오는 고장훈.

놈이 아주 당연하게 차설희가 들고 있던 옷가지들을 건네받고 다시 내게 다가왔다.

“…….”

그러고 보니 평소의 그 장황한 아부 없이 그저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고장훈.

난 내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는 고장훈을 바라보며 결국 헛웃음을 밖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는 진짜 귀신같이 빠른 새끼.

……그래서 더 미친 새끼.

“그래서 지하 식당에는 별로 건질 게 없다고?”

난 계단을 올라가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내 보폭에 맞춰 함께 계단을 올라가던 고장훈이 서둘러 답했다.

“예, 아무래도 놈들이 전기도 아낄 겸 지하 1층은 완전히 방치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남아있는 식량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지하 1층을 방치했으면 매점은 말할 것도 없겠네.”

“네, 주로 매점 식량들로 끼니를 때운 것 같습니다. 때문에 매점 식량도 충분히 남아있다고 말씀드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늘었는데, 식량은 늘지 못했다라.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나마 상태가 좋은 식량이라도 일단 최대한 긁어. 냉장고 전원들도 늦게나마 돌아왔을 거 아니야.”

“예, 관장님.”

“식당의 냉동고, 냉장고들하고 매점에 전자레인지나 음료 냉장고도 무조건 챙기고.”

“예, 관장님.”

“너무 무거워서 캠프원들이 옮기기 불가능한 건 그대로 놔둬. 내가 옮길 테니까.”

난 뒤늦게나마 전원이 돌아온 지하 1층을 뒤지고 있을 캠프원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편하게 노획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문명의 혜택까지도.

띠링―!

[폭정의 은혜]

[사막 위의 오아시스 Lv.2]

[근대화의 첫걸음 Lv.1]

학생회관이라는 영토 확보와 많은 생존자들의 합류로 폭발적으로 상승한 왕권.

[왕권 : 220]

어느새 200을 훌쩍 넘긴 왕권은 운명의 다음 페이지를 해금시켰다.

그로 인하여 다시 내게 출력된 폭군의 두 번째 은혜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은 두말할 것 없이 ‘근대화의 첫걸음’이었다.

띠링―!

[근대화의 첫걸음 Lv.1]

[폭군이 확보한 영토에 한하여 하루마다 500kW의 전력을 생성 및 저장합니다.]

덕분에 팽현재와 똑같이 전기를 다시 쓸 수 있게 된 내 영토와―

[사막 위의 오아시스 Lv.2]

[폭군이 확보한 영토에 한하여 하루마다 식음이 가능한 지하수 600L를 생성 및 저장합니다.]

다음 페이지로 이동한 운명과 함께 더 강화된 첫 번째 은혜.

난 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진 지하수 상황과 정말 많은 걸 되찾을 수 있게 해줄 전기의 확보에 이보다 더 진할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왕권이 왜 내 전용 스탯이고 이걸 왜 필사적으로 올려야 하는지 그 어떤 이유보다 더 명확히 알려주는 ‘폭정의 은혜’들.

물과 전기 다음은 어떤 은혜를 선택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다음 은혜가 너무나도 기대됐다.

그렇게 더 많은 운명을 해금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왕권이 필요하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캠프원들과 영토, 그리고 이능력자들을 보유해야 했다.

뚜벅― 뚜벅―

다음 은혜를 생각하던 와중에 어느새 계단을 다 올라와 복도를 내디디는 발걸음.

난 곧바로 4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어제는 그리 자세히 살피지 않았던 2층을 쭉― 휘둘러보았다.

책장이 가득한 서점과 익숙한 로고의 간판을 단 은행.

그리고 이미 우체취급국에서 획득한 택배 상자로 약을 쓸어 담고 있는 약국의 캠프원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보건진료소는 한 번 더 확인해봤어?”

“예, 보건진료소 전체를 다시 한번 꼼꼼히 뒤져도 생존자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쯧―!

고장훈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혀를 크게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학생회관 보건진료소에 항상 상주하고 있던 간호사.

지금 이런 상황엔 너무나도 귀한 의료 종사자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아마 팽현재도 병신이 아니면 간호사를 확보하려 했을 테니, 이미 좀비가 되거나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일단 보건진료소랑 여기 여학생 휴게실에 있는 침대부터 전부 빼버려.”

“예, 관장님.”

난 꿩 대신 닭으로 학생 회관에 넘치는 침대들을 노획하며 원래의 목적지로 발걸음을 이었다.

타다다닥―!

거의 지근거리에 다가온 목적지에 서둘러 앞으로 달려가는 고장훈.

놈이 목적지에서 허리를 굽신거리며 양손으로 열린 문을 가리켰다.

“헤헤― 어서 드시지요, 관장님. 저는 나오실 때까지 문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요, 헤헤.”

……역시 고장훈.

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따뜻한 조명이 밝히고 있는 내부에서 내가 찾던 물품을 찾기 시작했다.

진열대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부채와 텀블러들.

반석대학교의 이니셜인 ‘B’가 수 놓인 티셔츠와―

“……오, 저깄네.”

난 기념품점에서 내가 찾던 물품을 발견하곤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서둘러 티셔츠가 진열된 구석으로 이동하는 나를 따르는 차설희.

난 티셔츠 옆에 길게 이어진 야구 점퍼 중 적당한 사이즈를 골라 그녀에게 건넸다.

“…….”

조용히 내가 건넨 야구 점퍼를 입는 차설희.

“……오.”

다소 밋밋했던 상의 위에 얹어지는 야구 점퍼.

난 과잠만이 줄 수 있는 묘한 청순함에 다시 한번 감탄이 흘렀다.

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를 완벽히 표현한 그녀에게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밥이랑 과제 걱정은 절대로 안 해도 될 것 같은 여대생이네.”

“……뭔가 비유가 상당히 이상한 쪽으로 노골적이네요.”

“왜? 예쁘다는 건 당연하다해서 조금 다채롭게 표현한 건데.”

내 농담에도 여전히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차설희.

그녀의 샐쭉이는 입가가 뭔가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걸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웬일로 같이 가자고 하더니 그 이유가 제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서였네요.”

그녀가 양팔을 벌려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양팔에 힘을 쭉― 빼버렸다.

툭―!

“뭔가 예쁜 옷 입히는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이네요.”

“아이돌이 프로 의식이 너무 없는데?”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그리고 그땐 돈이라도 왕창 벌었지.”

입을 대놓고 앞으로 쭉― 내밀고 투덜거리는 차설희.

난 힘을 쭉 빼고 뭔가 의욕을 잃은 듯한 그녀를 보며 잔웃음을 흘리며 양팔을 벌렸다.

“일로 와.”

힘이 쭉 빠진 눈으로 나를 보면서도 내 지시에 천천히 따르는 차설희.

난 입은 옷이 달라졌다는 사소한 이유로도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으으으으―”

전혀 가볍지 않은 억센 포옹에도 앓는 소리를 내며 얌전히 포옹을 받아들이는 차설희.

난 천천히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남은 손으로 그녀의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계속 이어지는 부드러운 접촉에 어느새 힘을 완전히 뺀 채로 내게 기대고 있는 그녀가 온전히 느껴졌다.

난 그런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엔 스타킹도 입힐 거야.”

“……역시 프로 의식 뭐라고 하신 분답게 목적의식이 너무 뚜렷한 말이네요.”

그녀와 너무 가까운 탓에 몸 전체에 진동이 전해지는 듯한 차설희의 볼멘소리.

난 그녀의 대답에 옅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포옹을 풀지 않았다.

이불처럼 포근하고 몽실몽실한 감각을 전해주는 너무나도 포근한 차설희의 체온.

계속되는 내 웃음에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함께 떨리는 차설희의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툭―!

“웃지 마요. 하나도 안 웃기니까.”

내 허리를 툭― 치는 손길과 함께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미처 떼어내지 못한 웃음기가 너무나도 선명히 느껴져 다시 한번 잔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더 꽉― 안았다.

툭―!

“…웃지 말라고.”

그런 나를 계속해서 툭― 툭― 치는 차설희.

우린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념품점 안에서 서로를 껴안는 자세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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