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의 시대 (6)
원색적인 욕설에 숨소리 하나 없이 가라앉은 강의실.
난 그대로 몸을 돌려 강의실 문 앞에 널브러진 좀비 시체를 잡아끌었다.
툭―!
문 앞에 멍청하게 서 있던 김아름의 몸을 밀어내는 내 어깨에 김아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
작은 비명도 없이 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가 끌기 시작한 시체를 피해 바닥을 미는 애처로운 몸짓.
그런 순간에도 고통만은 선명했는지 넘어지며 접질린 팔목을 부들부들 떨며 붙잡고 있었다.
난 질질― 끌리는 소리가 선명한 좀비 시체를 그대로 여자들 무리 한 가운데에 던졌다.
“꺄아아아악―!”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튀어나오는 고주파의 비명.
좀비 시체를 기준으로 여자들의 대형이 홍해 갈리듯 갈라졌다.
우웨에에엑―!
그 후 연이어 들려오는 여자들의 헛구역질.
고어 영화에서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처참한 시체의 상태에 걸쭉한 위액이 바닥으로 질질 흘러내렸다.
“지금부터 눈 감는 년은 나한테 뒤진다.”
내 경고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년들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주 좁게 눈을 떠댄다.
우웨에에엑―!
그리곤 다시 고개를 숙이곤 연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정말 개같이 웃긴 일이지. 지금 내가 던진 좀비에 네년들은 태평하게 위액이나 되새김질하고 있지만―”
난 강의실 문밖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
“밖에 있는 새끼들은 기겁을 하면서 도망치거나 조잡한 무기를 들거든.”
“시체가 다시 일어난다는 건 그런 의미야. 사람이 죽는다는 의미가 모호해지지.”
난 바닥에 축― 늘어진 좀비 시체의 팔다리를 찬찬히 훑었다.
이미 멀쩡한 부위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외형.
하지만 저 상태로도 ‘좀비’라는 괴물은 죽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다.
머리가 깨부숴질 때까지 먹잇감을 향한 질주를 그치지 않는다.
“밖에는 저런 외형의 좀비들이 수십, 수백 마리가 돌아다닌다.”
난 밖이라는 단어에 함께 연상되는 정문의 광경을 떠올리곤, 헛웃음을 내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문에는 좀비 같지도 않은 괴물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고.”
난 파르르 떨리는 그녀들의 동공을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툭― 툭― 두드렸다.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이 씨발련들아?”
난 쇠 파이프로 좀비 시체를 가리켰다.
“뒤진 좀비 시체에 경기를 일으키는 년들이 이 좆같은 세상에서 뭘 할 수 있는데?”
“십 년 내내 아주 열심히 공부하셔서 대학에 입학한 우리 여대생님들이 뭘 할 수 있냐고―!”
“어디 씨발 뭐, 과외 선생님이라도 할 거야?!”
겁박하듯 천장을 울리는 고함에 고개를 푹― 숙이는 여학생 무리.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이건 너희와 내가 무언갈 주고받는 거래가 아니다, 이 씨발년들아.”
목을 긁으며 튀어나오는 거친 목소리에 그녀들의 몸이 다시 떨려왔다.
“지금 너희는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를 받아들일지 말지, 오직 그것만 결정하면 되는 거다.”
“…….”
물기에 젖은 눈으로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여대생 무리.
난 이상하리만큼 순한 양처럼 덜덜 떠는 그녀들을 유심히 응시했다.
아마도 전문화 ‘백마 탄 폭군’과 ‘천박한 품위’의 공포 보정 조합으로 형성된 듯한 이 분위기.
허나, 난 내가 사라지고 나서 나가게 해달라 빌었다던 타격조원의 말을 상기하며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렇다는 건 또 내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저 여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걸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역시―
본보기가 필요했다.
정말― 본보기 없이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뚜벅― 뚜벅―
조용히 강의실을 울리는 발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내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야.”
난 아직도 나가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김아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안 나가고 여기서 뭐 하냐?”
툭―!
가볍게 그녀의 다리를 건드리는 발길질에 다시 바닥을 밀며 뒤로 이동하는 김아름.
이 강의실을 나가기 위해 필요한 행동과는 정반대의 행동에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년 이거 아주 웃긴 년이네.”
살짝 고개를 숙이는 허리에 더 가까워지는 김아름의 얼굴.
이미 핏기란 핏기는 모두 빠진 새하얀 얼굴에 요란하게 좌우로 떨리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나간다 하고, 그럼 나가라 하니까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툭―!
다시금 그녀의 다리를 치대는 발길질에 토끼처럼 놀라는 김아름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다.
야.
“너는 내가 뭐로 보이냐?”
내 물음에도 그저 바들바들 떨리기만 하는 그녀의 입술.
“지금 내가 너 따먹고 싶어서 발정 난 학과 오빠들로 보여?”
“막 힘든 티를 내면 뭔 말이든 다 들어주고 밤에 술도 사줄 것 같아?”
굳이 기저 심리를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김아름의 심리.
아니,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의 심리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으레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결정장애와 ‘누군가 자신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인 의존성 성격장애의 좆같은 콜라보레이션.
그사이에 튀어나오는 아주 치기 어린 투정.
“왜? 너무 무섭고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가 갑자기 좀비 시체를 보니까 아주 정신이 확 들어?”
“…….”
“지금부터 내 말에 대답 안 하면 그 아가리 그대로 찢어버린다.”
“……네, 네.”
내 경고에 드디어 뚫린 김아름의 입.
“그래서 나갈 거야, 말 거야?”
“……죄, 죄, 죄송합니다.”
어버버 거리는 입술이 겨우 내뱉는 단어에 다시금 헛웃음이 맺혔다.
뜬금없는 사과였지만, 대충 무슨 의미의 사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하루 만에 좀비가 되거나 길바닥에서 아사할 년들 책임져주겠다니까 이런 좆같은 상황을 겪네.”
“…….”
“그렇게 쉽게 바뀔 네 투정 때문에 지금 몇 분이나 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거냐?”
“…….”
툭―!
난 그녀의 다리를 거칠게 차며 다시 물었다.
“몇 분이냐고, 이 썅년아.”
“……5, 5분? 10분? 자, 잘 모르겠어요, 죄, 죄송합니다―.”
내 재촉에 물기가 가득 찬 염소 소리로 답하는 김아름.
“죄송하다고 말하는 거 보니, 잘못한 건 아나 보네?”
“네― 죄, 죄송―”
“그럼 벌을 받아야지.”
뒤이은 내 대답에 다시 벙어리가 되는 김아름.
난 그녀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녀의 동공에 말했다.
“나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넌 내 캠프원이고. 내 캠프원은 잘못을 했을 때 합당한 벌을 받는다, 불만 있어?”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는 뜻에서 튀어나오는 어깨의 으쓱거림.
“…….”
그녀는 불안의 표현으로 얕게 입술을 쥐어뜯으면서도 이견을 토해내지 않았다.
난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곤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치대던 다리를 쭉 뻗어 그녀의 얼굴을 즈려밟았다.
쿵―!
순식간에 김아름의 상체가 바닥과 일직선으로 닿으며 뒤통수에 얕은 충격음이 새어 나왔다.
좌우로 사뿐히 즈려밟는 내 발길질에 따라 추하게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
“으븝― 으읍―”
깜짝 놀란 그녀의 비명이 신발 밑창에 막혀 제자리를 맴돌았다.
난 바닥에 짓눌린 그녀의 포니테일이 여러 갈래로 난잡하게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내 식량을 돼지처럼 쪽쪽 빨아먹는 일밖에 못 할 년들이 대가리를 빳빳이 들고 말이야.”
“으읍― 으브븝―”
난 발길질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녀의 머리를 즈려밟았다.
점점 더 압력을 높이는 발길질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발을 잡기 위해 허둥지둥 움직이는 그녀의 양손.
“벌 받는 중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네 대가리는 그대로 으깨진다.”
그 양손이 내 경고에 바들바들 떨며 천천히 내려간다.
난 조금 더 허리를 숙여 내 발에 가려져 반만 내보이는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내 물음에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
이어지는 속삭임에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다시금 꾹 참으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김아름.
“으븝― 브읍―”
난 그녀의 얼굴을 원을 그리듯 즈려밟으며 강의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타격조원들 앞에서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퉁퉁 부은 얼굴.
“야, 방대화.”
이름을 호명하며 까딱거리는 손가락에 놈이 헐레벌떡 내 앞에 도착했다.
놈의 시퍼렇게 부어 있는 볼을 향해 다시금 당겨지는 손바닥.
짜악―!
“내가 없으면 네가 알아서 강의실 관리를 했어야지.”
한 번의 손짓에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진 놈이 서둘러 일어섰다.
짜악―!
“강의실 꼴이 이게 뭐야, 너도 계집년들처럼 투정 부리는 거야?”
“……아, 아뉩니다―!”
짜악―!
계속해서 내려치는 손바닥에 땅바닥을 뒹굴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방대화.
놈이 바닥을 나뒹굴 때마다 특유의 공감 능력이 발휘된 건지 여학생 무리의 눈이 질끈질끈 감겨왔다.
툭―!
다시 볼살이 터진 건지 놈의 입술 사이에 한 줄로 흐르는 핏줄기.
난 놈의 볼을 툭― 치며 가까이 끌고 왔다.
“왜 이제 슬슬 아끼는 동생들 불에 튀겨져도 괜찮을 것 같아?”
“……죄송합니다.”
난 내 발에 깔려 얼굴이 일그러지는 김아름과 내게 멱살이 잡혀있는 방대화를 번갈아 응시하다 다시 여학생 무리를 눈에 담았다.
“진짜 마지막으로 5초 준다.”
나갈 새끼는 나가고, 남을 새끼는 남아.
“내가 주는 최소한의 선의가 필요 없는 년들은 그냥 나가면 된다. 혹시나 막는 새끼가 있다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5초를 다 셀 때까지 알아서 나가.”
5.
방대화의 멱살을 풀며 그녀들에게 내보이는 다섯 손가락.
4.
난 손가락을 접으며 강의실 전체를 휘둘러보았다.
3.
그저 다리가 얼어붙은 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학생들과 그 앞에 처참히 부서진 좀비 시체 하나.
2.
그리고 조금 더 앞에 여학생 하나와 남학생 하나를 본보기로 보이고 있는 나.
1.
그 누구도 앞으로 발을 내딛지 않은 광경에 저절로 잔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초에 그녀들에게 선택을 하라했지, 거부를 하라 한 적은 없었다.
“…….”
난 제자리에 못이라도 박은 듯 멈춰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다 접은 손가락을 거뒀다.
툭―!
“너도 이제 일어나.”
가볍게 머리를 차는 발길질에 김아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과 내 신발 밑창에 있던 이물질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들.
난 조금 더 가까이 붙어 그녀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검은 무언가와 눈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 손길에도 그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그녀.
“앞으로 벌 받을 만한 짓은 안 할 거지?”
“…….”
“대답해야지, 아름아.”
나지막한 물음에 김아름이 겨우 어버버 거리는 입술을 벌려 ‘네―’라고 답하는 것이 들렸다.
난 그녀의 얼굴을 마저 닦아준 뒤에 몸을 돌려 등을 툭― 밀었다.
내 손길에 크게 휘청거리며 천천히 여학생 무리로 걸어가는 그녀의 포니테일이 계속해서 비틀비틀 흔들리고 있었다.
“뭐해― 대충 2줄로 줄 좀 세워봐.”
여학생들을 향해 손을 휘적거리며 내리는 명령에 방대화가 꼬리에 불이 붙은 것 마냥 곧바로 움직였다.
타격조의 통솔에 맞춰 엉성하게나마 2줄로 도열한 여학생들, 아니 이젠 내 캠프원들.
“좋아.”
난 출발할 준비가 끝난 캠프원들을 가볍게 훑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너희들의 새로운 집이 될 곳으로 이동한다.”
끼이이익―!
건조한 정보 전달과 함께 가볍게 여는 강의실 문.
난 뒤따라 서둘러 발을 움직이는 캠프원들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강의실을 휘둘러보았다.
아직도 옅은 불씨를 담고 일렁이는 향기 초들과 쇠 파이프에 균열이 일은 강의실 벽면.
그리고 강의실 옆 통로에 널브러진 탓인지 이젠 잘 보이지도 않는 성종현의 시체를 눈짓하며 2층 교양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터벅― 터벅―
쇠 파이프를 까딱― 까딱― 흔들며 계단을 내려서는 동안 뒤이어 울리는 발소리가 아주 요란했다.
벽면에 한가득 번져있는 좀비들의 흔적에 기함을 하는 캠프원들의 숨소리와 앓는 소리.
아주 여기까지 여실히 느껴지는 저 파르르 떨고 있는 가녀린 다리들의 진동에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오며 고개가 천장으로 들렸다.
그런 내 모습에 기겁을 하며 여학생들을 재촉하는 타격조.
그런데도 1층 복도를 흥건히 장식한 핏물들에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물을 쏟는 여학생들이 아주 많았다.
이제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대학의 풍경이 그녀들에게는 무엇보다 충격적인 재앙의 증거인 듯했다.
1층 복도에 널브러진 좀비들의 시체.
그 시체를 보고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캠프원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다시 익숙한 계단을 내려섰다.
정문을 탐색하기 위해 달렸던 방향의 정확히 반대쪽.
인문대 뒤쪽으로 이동해 고장훈이 낑낑거리며 내 손을 잡았던 주차장 벽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한 명씩 차례대로.”
내 지시에 달달― 떨리는 양손으로 내 손을 꽉 잡기 시작하는 캠프원들.
난 고장훈과 비슷하게 그들을 한 명 한 명 벽 위로 끌어당기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직은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좀비 새끼들.
덕분에 꽤나 평화로운 운반이 이어졌지만, 그녀들에겐 아닌 듯했다.
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깊고 끈적한 적막.
여학생들이 을씨년스럽게 바뀐 대학을 불안에 가득 젖은 눈으로 연신 살피기 바빴다.
난 가장 후미에 있던 방대화를 벽 위로 끌어올리며 다시 캠프원들의 선두에 섰다.
저벅― 저벅―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인문대와 사범대 사이의 숲길.
아주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걷던 와중―
‘웨애애앵―’ 여러 번 들어도 몸이 저절로 가려워지는 소음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우웨에에엑―!”
그리고 뒤에서 속출하기 시작하는 구역질 소리.
부패가 아주 상당히 진행된 좀비 시체를 본 캠프원들이 다시 식도가 따가워지는 신물을 한가득 쏟아내기 시작했다.
“토하든 말든 발은 계속 움직여라.”
뒤가 난리가 났든 안 났든 그녀들을 조용히 재촉하는 무심한 목소리.
난 찬찬히 주변을 살피며 일정한 속도로 산책로를 주파했다.
그렇게 사범대와 중앙도서관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지나 다시 맞이하게 된 사범대 신관.
난 마치 우리를 레드카펫처럼 반겨주는 차량 바리케이드 줄을 향해 캠프원들에게 턱짓했다.
길게 이어진 차량 바리케이드를 발견하곤 잠시간 발을 멈추는 캠프원들.
저도 모르게 살짝 벌린 입과 그 바리케이드 길을 천천히 올라가던 그들의 동공에 새로운 집이 맺혀왔다.
두 줄의 차량 바리케이드와 암막 커튼으로 보호받고 있는 도서관의 전경.
그중 유일하게 차량 바리케이드가 둘러쳐지지 않은 도서관 정문을 향해 걷던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살짝 젖혀진 암막 커튼 사이로 밖을 살피던 간사한 얼굴.
그 쭉 찢어진 눈이 나를 발견하고 커다랗게 띄여지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헐레벌떡 놀라 암막 커튼 뒤로 사라지는 고장훈.
“아이고오오― 관장니이이이임―!”
곧이어 활짝 열린 정문으로 고장훈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아이고오오― 정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여 밤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관장님!”
내 앞에서 서둘러 허리를 굽신거리며 울먹이는 놈의 얼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에 빠르게 눈을 돌렸다.
“걱정은 무슨. 해놓으라 했던 일은?”
“헤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범대 신관에서 쓸만해 보이는 건 그냥 싹 다 긁어왔습니다, 헤헤―”
내 물음에 다시 원래의 간사한 얼굴을 회복해 양손을 비비적거리는 고장훈.
“그것보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관장님의 부재로 밤잠을 설친 캠프원들이 관장님만을 목이 빠져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헤―!”
뒤에 서 있는 20여 명의 새로운 캠프원은 안중에도 없이 고장훈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양손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그런 그를 눈을 아주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새로운 캠프원들의 눈빛에도 단 한 순간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표정.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미친 새끼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하며 고개를 가볍게 휘저었다.
“관장님!”
정문을 넘어 도서관 로비에 들어서자 반겨오는 사뭇 낯선 풍경.
아직 위로 운반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듯한 가구들과 식량들.
로비를 채우고 있는 상자들과 나를 기다리고 있던 캠프원들이 시야에 한가득 맺혔다.
여성 캠프원들의 중앙에서 무릎 다리를 안고 나를 바라보던 차설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띠링―
한순간에 겹쳐 울리는 알림음과 동시에 캠프원들의 ‘굴복’ 상태가 ‘복종’으로 갱신되었다는 메시지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고개를 돌리자 멍한 눈으로 로비를 휘둘러보고 있는 새로운 캠프원들.
그들이 실재하는 증거를 보고 나서야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뜻이었다.
[특별한 힘을 지닌 이가 당신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속칭 ‘폭군’이 반응합니다.]
[병권(兵權)을 획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폭군’이 통솔하는 모든 병권은 왕권에 통합됩니다.]
[왕권 : 130 -> 160]
퉁퉁 부은 얼굴로 로비를 바라보던 방대화를 응시하는 순간 튀어나오는 메시지.
난 왕권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요소의 발견에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보니 도서관을 완전히 손에 얻은 뒤에 메시지 목록에 미해금 요소라는 부분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며, 더 많은 병력을 통솔하세요.]
이제 미해금 요소가 아닌 ‘병권’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뒤바꿔있는 상태창 메시지.
난 입가에서 사라지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앞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김우정!”
내 호명에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얼굴 그대로 내게 달려오는 김우정.
턱―!
가볍게 놈에게 어깨동무를 걸자 김우정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니까 이제 나 없이도 좀비 한두 마리는 거뜬한가 봐?”
“어어― 그 관장님이 너무 감사하게도 신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가셔서 그때 이후로 좀비는 아직 못 만났습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습관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며 굽신거리는 몸짓.
“뭐야, 그럼 짐은 열심히 옮겼냐?”
“아! 그건 당연합니다! 진짜 허리가 부서질 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새끼가 칭찬 조금 해줬다고 허리까지 부셔 먹으려 하네―”
툭―!
가볍게 치대는 어깨에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굽신거리는 김우정.
난 놈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마주 웃어주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이제 내가 약속을 지킬 시간이네.”
은근한 목소리에 저절로 벌려지는 놈의 입술.
난 어깨동무를 한 손으로 놈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그렇게 김우정과 함께 마주하게 된 새로운 캠프원들.
그 캠프원들을 바라보는 김우정의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였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맞이하는 어린이처럼.
그에 반해 그런 김우정의 눈빛을 마주하는 새로운 캠프원들의 낯빛은 어두웠다.
도서관 로비를 바라보며 안도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해하는 얼굴.
무언가를 직감했지만,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캠프원들.
그녀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유일하게 데리고 오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떨팔이 교수, 성종현.
그가 나를 보며 자신을 죽일 이유가 없다며 불합리를 외치던 얼굴이 갑작스레 머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또한 그 얼굴에 빗대어 한 가지 의문이 스친다.
그땐 별 시답잖은 개소리가 생각하며 놈을 단번에 죽였지만―
지금에서야 약간 궁금하기는 했다.
그에게 애초에 합리가 무엇인지 물었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하지만 반대로, 과학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기본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아진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는 역사들이 있습니다. 대양을 탐험하기 전, 지구가 평평…….’
쿵―! 쿵―! 쿵―! 쿵―!
갑작스런 좀비의 난입으로 끊어졌던 성종현의 강의.
난 그 강의를 마저 이으며 그의 말을 대신 끝내주었다.
대양을 탐험하기 전, 지구가 평평하다 여긴 이들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지구가 둥글고, 아주 아득하고 머나먼 우주의 먼지 한 톨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논리와 이치는 매번 그 시대에 맞춰 스스로 탈을 바꿔 써왔다.
새로운 사실에 매번 새로운 탈을 쓰는 합리.
끼에에에에엑―!
이번에도 다를 건 없었다.
성종현 교수의 수업을 강제로 끝내버렸던 좀비.
그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이 출현했고―
인류는 여태껏 해보지 못했던 종으로서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뭐해?”
내 물음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하는 김우정의 눈망울.
난 그 눈을 응시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사실에 합리가 새로운 탈을 쓴다.
그리 거창하지도, 그리 정의롭지도 않을―
하지만 이 안에 있는 오십여 명의 생존자들에게는 목숨보다 무거울.
오직 나만이 내세울 수 있는 새로운.
“아무나 골라.”
합리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