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기원 (4)
공포를 마주하는 이의 반응은 다양하다.
“으, 으아아아아아―!”
한계까지 몰린 공포에 격발하듯 튀어나오는 박태하의 캠프원.
책상다리로 만든 몽둥이를 필사적으로 쥐어 잡은 모습이 사뭇 처절했다.
쿵―!
그런 한세계와 캠프원의 직선 주로를 차단하는 작은 벽.
박우진이 들이민 방패에 캠프원이 미끄러지듯 바닥을 나뒹굴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넘어진 캠프원을 향해 다가가려던 박우진을 막아 세우는 고함.
찢어질 듯이 뾰족하게 모두의 주의를 끈 구예리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소형 망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퉁―! 투두두두둥―!
작게 바닥을 튕기며 저 멀리 사라지는 망치.
그 앞으로 양손을 번쩍 들어 저항할 표시가 없음을 알린 구예리가 천천히 앞을 나섰다.
“이건― 이건― 일종의 시위였습니다, 한세계 씨!”
구예리는 한세계에게로 천천히 걸어가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너무 한계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의사를 표현한 겁니다, 갑작스런 통보에 저희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구예리는 한세계 앞에서 애원하듯 변명을 이어갔다.
“너무 일방적인 통보에 사람들이 화가 나서 그런 겁니다! 태하 선배나 다른 사람들 모두 화가 났다는 것만 알려줄 작정이었지, 끝까지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각자 손에 주렁주렁 무기를 달고 온 밤손님이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일종의 시위다?”
“예, 예! 못 믿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맹세할 수도 있어요! 그만큼 식량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잖아요, 잘 아시잖아요, 세계 씨.”
끝내는 간절한 눈으로 두 손을 모으며 속삭이는 구예리.
한세계는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다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인 건 아니야.”
“맞아요, 맞아요―! 이렇게 극단적인 시위를 할 만큼이나 저희는 너무 절박해요! 갑작스런 통보보다는 대화로 분명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잖아요!”
“안 그래도 이 꼴을 보아하니 대화가 필요하긴 하네.”
아―!
캠프원들을 휘둘러보며 쓰게 웃는 한세계의 얼굴에 안도의 탄성이 새어 나온다.
“……식량 배급에 관해선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하겠어.”
“맞아요, 지금 당장! 지금이라도 저희는 어떤 협조―”
한세계는 가벼운 손짓으로 서둘러 이야기를 쏟아내려는 구예리를 저지했다.
그는 박태하가 들어가기 직전이었던 거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듯하니 저 안에서 조금만 기다리는 게 어때?”
“……네?”
한세계의 제안에 쉬지 않고 입을 놀리던 구예리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한세계와 캠프원들을 번갈아 보는 불안에 가득 찬 눈동자.
한세계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으면 벌써 했겠지. 게다가 대화가 통할만한 위인도 너밖에 없는 것 같은데?”
“……믿겠습니다, 한세계 씨.”
“그래.”
그래도 그쪽 리더랑 얘기는 좀 나눠야지.
그녀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이어나오는 뒷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이 벽처럼 자신들을 가로막는 한세계의 사람들과 그 벽에 가로막힌 캠프원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태하를 여러 번 쓸어 담았다.
뚜벅― 뚜벅―
그저 정적뿐인 2층을 울리기 시작하는 발걸음.
한세계는 계속해서 자신과 박태하를 바라보다 임시 거처 안으로 들어가는 구예리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의 앞에 박힌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대한 덩치.
한세계는 박태하만 들을 수 있게 그의 귓가로 고개를 이동했다.
“넌 알고 있지?”
묘하게 웃음기가 섞인 소름 끼치는 속삭임.
박태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놈의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한 말 다 거짓말인 거.”
“…….”
마치 뱀을 앞에 둔 개구리마냥 서서히 몸이 굳어간다.
“정말 볼수록 신기한 새끼라니까.”
저 얕은 호선을 그린 눈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벼르고 있었는데 기가 막히게 안 깝치더니 이렇게 폭탄을 터트리네.”
이 여우가 되다만 곰 새끼.
“그래도― 네가 왜 그랬는지는 조금 알 것 같긴 해.”
한세계는 조금 더 박태하의 귓가에 다가서며 속삭였다.
“사실 너도 눈치챈 거지?”
뭐가 즐거운지 얕게 웃으며 박태하의 귓가로 스며드는 이름.
“있잖아, 네 친구.”
심유한.
박태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본능처럼 그의 최후를 떠올렸다.
박우진과 김민준이 낑낑대며 옮겨온 축 늘어진 몸.
머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가장 절친했던 친구.
평소의 호탕한 웃음이 아닌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멈춘 그 녀석의 시간.
“너도 심유한이 어쩌면 좀비에게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 아냐?”
스멀스멀 올라오던 의구심을 덮었던 두려움.
이번엔 그 두려움이 숨어있던 의구심을 강제로 끌어올린다.
“네 생각이 맞아.”
박태하는 한세계의 확답을 듣자마자 신물처럼 식도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꾹― 삼켰다.
잠시간 크게 몸을 움찔거리는 박태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한세계.
그는 귓가에서 고개를 떼고 정면으로 박태하를 응시했다.
“그래서 더 신기하단 말이야.”
“…….”
“너는 지금 네가 날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지?”
한세계는 박태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깨를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몇 번의 잔웃음이 지나간 후에 크게 헛웃음을 터트린 한세계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너는―
“넌 왜 뭔가 홀가분하다는 눈으로 날 보고 있냐?”
한세계의 물음에 박태하의 몸이 다시금 움찔거렸다.
왜?
“내가 널 이대로 죽여줬으면 좋겠어?”
더는 무언갈 책임지지 않게.
더는 누군가의 죽음을 보지 않게.
화살처럼 뾰족한 말이 그의 가슴을 쉴 새 없이 꿰뚫었다.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정해야 하지만.
그의 입은 그저 꾹 닫힌 채로 묘하게 그의 가슴을 관통하는 한세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네 모습이 심유한은 죽었는데, 넌 살아남은 이유야.”
사실 난 생각보다 아주 많이 네가 마음에 들거든.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밝은 미소.
“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건 조금 거슬리지만, 그건 네가 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병신이기 때문이고.”
한세계는 무언갈 품평하듯 박태하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딱 봐도 시키는 일은 오지게 잘하게 생겼잖아.”
무식한 곰 새끼같이 생긴 게 아주 딱이야.
안 그래?
툭―!
마치 동의를 구하듯 가볍게 박태하의 어깨에 올라오는 손.
박태하는 그 손길에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조각상마냥 눈동자만 계속해서 움직여 한세계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너는 내가 시키는 일만 하는 거야.”
그의 눈동자에 가득 찬 한세계의 얼굴.
나지막이 무언가를 속삭이는 거부할 수 없는 주문.
“그 병신같은 대가리로 더는 고뇌하고 고민할 필요 없어.”
“하루종일 네 입만 보고 있는 짜증 나는 새끼들 덕분에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고.”
“무언가 잘못되면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오는 죄책감에 몸부림치지 않아도 돼.”
듣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레 그의 깊은 곳에 와닿는 속삭임.
“너도 무언갈 책임지기 무섭잖아? 너 때문에 누군가 죽는 게 너무너무 무섭잖아?”
그깟 부회장이 뭐라고.
아니, 사실 듣지 않으려 한다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계속 듣고 싶은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너도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것 없는 대학생일 뿐인데.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너만 바라보고있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어지는 속삭임에 박태하가 처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저 옅게 고개를 숙이는 작은 몸짓.
그 몸짓을 바라보는 한세계가 박태하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다시금 토닥였다.
“넌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어. 어차피 상황도 이렇게 돼버린 거 넌 이제부터 내 말만 듣는 거야.”
좋잖아, 마음 편하고 몸도 편하고.
“알겠어?”
“…….”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하는 박태하.
한세계는 한 번 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읊조렸다.
“대답을 해야지, 태하야.”
“……예.”
지근거리에 있던 한세계에게만 미약하게 들리는 대답.
허나, 한세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태하가 우리 캠프에 들어왔으니 나도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으음―
길게 말꼬리를 늘리며 주변을 휘둘러보던 한세계의 얼굴이 한 곳에 멈춘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한세계가 밝게 웃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구예리는 어때?”
아주 은밀한 속삭임에 저절로 동그랗게 뜨이는 눈.
한세계는 처음으로 크게 반응하는 박태하에게 더 은근하게 목소리를 죽였다.
“왜? 구예리 정도면 따먹을만 하잖아? 난 항상 저렇게 도도하고 비싸게 구는 년들이 강간당할 때도 그러는지 궁금하더라.”
여상하게 이어지는 말에 박태하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에이~ 너희 같은 학생회였잖아. 게다가 도서관 2층에서 얼마나 오래 같이 있었냐? 너도 한 번쯤은 무조건 상상했을 거 아니야.”
구예리를 따먹는 상상.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너무나 노골적인 문장이었다.
그저 침묵밖에 할 수 없던 박태하에게 악마가 계속해서 속삭인다.
“들어보니까 태하 너는 다른 여자들 건드리지도 않았다며? 그럼 너도 슬슬 참기 힘들 거 아니야. 원래 생존 욕구가 치솟으면 자연스럽게 성욕도 치솟는 게 인간의 본능이야.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네 잘못이 아니야, 박태하.
한세계의 속삭임이 도화선이 된 듯 점점 박태하의 머릿속이 살색으로 번들거린다.
그리고 그 살색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구예리였다.
“분명 너도 몇 번이나 상상했을걸? 대놓고 빌붙는 애들보다 문제점을 해결해달라고 은근히 강요하는 그 당당한 얼굴이 좆같았잖아. 그런데 생긴 건 또 나쁘지 않고.”
그의 속삭임을 따라 머릿속 상상이 점점 구체화된다.
언제나처럼 어떻게 생각하냐고 당당히 묻는 구예리.
그런 그녀를 강제로 눕히는 억센 손길.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후폭풍이 두려운 거겠지. 그런데 날 봐, 태하야.”
한세계는 자신을 가리키며 은은하게 웃었다.
“차설희를 가지고 논 강간마가 앞에 있는데 누가 구예리를 강간한 놈에게 신경을 쓰겠어? 넌 어쩔 수 없는 거야. 지금 우리 모습을 봐. 넌 영락없이 내게 협박당하고 있는 모습이잖아.”
박태하는 그의 속삭임에 천천히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겁에 질린 얼굴로 조용히 자신과 한세계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는 캠프원들.
“넌 내게 죽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구예리를 강간하는 거야. 그것만 생각해.”
“더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말고 고민하지 마.”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도 깡그리 무시해.”
넌 그냥 편하게.
“넌 이제부터 내 말만 들으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