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26화 (26/120)

젠가 (8)

“하아아―.”

난 기를 쓰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악을 쓰는 차설희 앞에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

내 손짓에 처음으로 찰떡같이 답하지 않는 고장훈.

고개를 돌려보니 바닥에 널브러진 쇠 파이프와 자신의 가방을 번갈아 보고 있는 놈이 보였다.

“붕대.”

“……아!”

내 대답에 그제서야 탄성을 내지르며 가방 안에 든 하얀 붕대를 건네왔다.

도서관의 응급구조함에 있었던 하얀 붕대로 그녀의 물린 부위를 대충 묶어 가렸다.

붕대를 찢어 짧게 매듭을 지은 후에 일어서며 고장훈에게 남은 붕대를 내밀었다.

그런 순간에도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차설희.

난 온몸에 가득한 좀비의 썩은 피와 살점들을 훑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청승 그만 떨고 일어나시죠, 차설희 공주님.”

비아냥 가득한 내 목소리에 그제서야 몸을 움찔거리는 차설희.

참나― 언제는 공주님 대접 싫다더니, 이건 뭐 공주님보다 더 대접해줘야 하네.

“빨리 일어나. 집에 가게, 이 짐 덩어리 년아.”

좀 더 직설적인 말에 그제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차설희.

쯧―!

화장실을 크게 울리는 혀 차는 소리에 움찔거리는 차설희를 보며 수색조에게 턱짓했다.

미친 새끼의 트롤링 덕에 3층 확보는 내일로 미뤄야 했다.

………

텅―!

2층 도서관 캠프 한 가운데를 울린 짧은 소음.

박태하는 그에게 던져진 몽키 스패너를 멍하니 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효은은 병신같이 행동하다 병신같이 뒤졌다.”

건조하게 무기를 빌렸던 이가 죽었다 말하는데도 꽤나 덤덤한 눈빛으로 몽키 스패너를 줍는 박태하.

놈도 천천히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유감을 표하지.”

심드렁하게 박효은 건을 마무리 지은 나는 툭―! 내 옆에 있던 인물을 재촉했다.

내 손짓에 엉거주춤 앞으로 나서지게 된 차설희.

“몽키 스패너랑 차설희. 둘 다 얌전히 캠프에 돌아온 거 확인했으니― 뭐 더 있나?”

내 물음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무심히 차설희를 보던 박태하의 시선이 한곳에 머문다.

차설희가 어색하게 가리고 있는 오른손의 하얀 붕대.

“……너, 차설희.”

그의 흐리멍텅하던 눈빛에 불똥이 튀었다.

“……물렸어?”

몽키 스패너를 쥐고 서서히 굽혔던 허리를 펴는 박태하.

“……물렸지.”

“…….”

확신을 담은 눈동자로 본래의 곰 같은 기세를 회복한 박태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얼른 다 멀리 도망가아아―! 물렸어―! 저, 저, 저년도 결국 밖에 나가더니―”

퍼어어억―!

우렁차게 캠프원들을 불러 짖던 박태하의 몸이 순식간에 기우뚱― 기울었다.

쿠웅―!

갑작스레 찾아온 발길질 한 번에 땅바닥에 구르게 된 박태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목에 기묘한 압박을 느꼈다.

끄드드득―!

그의 숨통을 갑작스레 옥죄는 누군가의 발.

신발 밑창에 있는 끈적한 촉감이 역겨운 발이 충실히 박태하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었다.

“케엑―! 켁―!”

난 급하게 숨을 고르는 박태하를 조용히 내려다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을 모든 캠프원들에게 말했다.

“차설희는 이미 내가 적절한 조치를 해놓은 이후다.”

“케엑―! 켁, 켁―!”

“그러니 차설희가 광일인가 뭔가 하는 그 새끼처럼 너희들을 물 일도 좀비가 될 일도 없다.”

내 선언에 캠프원들 모두의 시선이 차설희의 오른손에 향한다.

그 시선에 더 움츠러들며 오른손을 가리는 차설희.

“그러니 차설희에게 손끝이라도 대는 순간―”

“케에에엑―! 켁―!”

난 어느새 새빨개진 얼굴로 내 신발을 부여잡고 낑낑대던 박태하의 눈을 마주한다.

산소가 미치도록 급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내 눈을 피하려는 놈을 지그시 바라보며 한 글자씩 읊조렸다.

“이제 나도 더 이상 안 봐준다, 태하야.”

“케에에엑―! 케헤엑―! 헤엑―! 헤엑―! 하악―!”

목을 누르던 발을 떼자마자 상반신을 일으켜 급하게 숨을 들이쉬는 박태하.

난 그런 놈과 이 모습을 달달― 떨며 지켜보는 캠프원들―

그리고 여전히 오른팔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차설희를 보곤 임시 거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찌걱― 찌걱―

여전히 괴상한 소리로 바닥과 엉겨 붙는 신발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캠프 안으로 들어가려는 차설희와 그런 그녀에게 엉거주춤 뒷걸음질 치는 캠프원들.

난 그 모습에 작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좀비 새끼들과의 근접전으로 심각하게 더러워진 외관.

덕분에 꽤나 아끼고 있던 생수들로 가볍게 샤워 비슷한 걸 마친 나는 조용히 도서관 벽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이젠 빛날 것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도서관을 밝히는 달빛.

생각보다 꽤나 밝은 빛에 창문을 보니 보름달이 밤하늘 중앙에서 은은한 달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럴 때면 항상 간신 같은 목소리로 고장훈이 ‘보름달이라 그런지, 날이 참 밝습니다요, 헤헤―’라며 시답잖은 목소리를 내뱉어야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슬슬 캠프 인원이 많이 지는 것을 생각해, 지금 내가 있는 임시 거처와 비슷한 공간을 여러 개 만들었으니까.

고장훈을 비롯한 수색조와 안세준 커플은 각자의 임시 거처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사내새끼들이랑 한 공간에 부대끼며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난 한동안 조용히 보름달을 쳐다보며 오늘을 정리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변종의 출현과 차설희의 감염.

난 ‘털바퀴’를 처치했다는 상태창 메시지를 기억해내곤 천천히 헛웃음을 내뱉었다.

물론 전조는 분명히 있었다.

박효은이 하루종일 천장을 보며 징징댔으니까.

놈의 말이 사실이라서 뭔가가 있다면 기껏해야 책장 위에 숨어있는 좀비가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그 순간에는 정말 천장에 기어 다니는 좀비 새끼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며 기습을 할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이건 뭐랄까―

주의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상상력이 부족했다.

“……하.”

그래.

상상력이 부족했다.

내 능력으로 다른 경쟁자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좋았지만, 좀비들 쪽에도 인간들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놈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미 좀비라는 거 자체가 좆같고 특별한 일 아닌가.”

난 헛웃음으로 나지막이 속삭이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래, 지금부터 더 조심하면 될 일이다.

좀비들 중엔 변종이 있다는 걸 확실히 인지했으니 지금부터 수색을 더 신중하게 실시하면 될 일이다.

게다가―

우우웅―!

난 내 손에서 찬연히 빛나는 옅은 황금빛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늘 나는 무언갈 잃었다기보다는 무언갈 얻은 날이었다.

그냥 얻은 것도 아니고 아주 많이.

우우웅―!

그런 내 감정에 동감하듯 더 진하게 피어오르는 황금빛.

띠링―!

[부분무능(部分無能) Lv.2]

[당신은 무능의 군주입니다.]

차설희가 아니었으면 시도도 안 했을 무모한 시도로 얻은 내 스킬의 진짜 능력.

무언갈 무효화하는 능력은 좀비에게 통하지 않았지만, 감염 중인 인간에게는 분명히 통했다.

그러니―

지금 이 스킬은 감염 치료제를 엘릭서로 친다면, 적어도 ‘하프 엘릭서’ 정도는 되는 스킬이라는 뜻이었다.

“……미친.”

그저 생각만으로 기쁨의 욕지거리가 나오는 상황.

만약 이 ‘부분무능’ 스킬이 왕권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쓸 수 있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이득과 할 수 있는 행동들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진다.

우우웅―

난 오른손에서 황금빛을 거두며 더 진하게 웃었다.

얻은 것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드디어 알게 된 ‘부분무능’의 사용처와 비슷할 만큼 기쁜 수확.

뚜벅― 뚜벅―

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에 미소 지었다.

그날의 발걸음보단 망설임이 짙게 깔려있는 나약한 발소리.

뚜벅― 뚜벅―

그럼에도 결국 내게 다가오는 발걸음을 느끼며 조용히 임시 거처의 틈을 응시했다.

그곳에 이번엔 노크도 없이 기다리던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의 당당한 얼굴과는 몹시 다른―

마치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달빛에 자연스레 빛나는 얼굴이 그녀를 기다리던 나를 응시한다.

조심스레 틈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오른팔에 여전한 붕대.

그리고 그 붕대를 가리듯이 꼭 붙잡고 있는 왼손.

“…….”

그녀는 임시 거처로 들어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푹―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보는 그녀를 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달빛이 비추는 그녀의 몸이 내 눈에도 희미할 만큼 아주 옅게 떨리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지금 그녀가 숨기고 싶어 안달인 저 자국보다 더한 낙인은 없으니까.

마치 죽음을 가까이하듯 경기를 일으키는 캠프원들에게 배척당하고 있겠지.

단 하루 만에―

누구나 가까이하지 못해서 안달인 탑 아이돌이.

난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좋은 붕대를 보며 은근히 웃으며 그녀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급박한 순간엔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지금은 그녀의 행동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예비 강간마를 피해 여동생을 구해내야 하는 그야말로 헬 난이도의 퀘스트.

차설희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실패의 고배를 마실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그녀는 생각보다 의연했고, 당당하려 했고, 또 노력했다.

아마 차설희는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예비 강간마인 나와 차하얀의 구출을 두고 아주 아슬아슬한 젠가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젠가처럼 위태롭고 아슬아슬하지만 아주 조심히 블록을 하나씩 빼며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나의 맞은편에 서 있던 플레이어가 아니라,

젠가 그 자체였으니까.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래서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아주 조심히 빼내었다.

그녀에게 충분했던 돈과, 죽은 자는 일어서지 않는다는 상식―

그리고 누군가가 성희롱한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보복해야 한다는 이치까지도.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하나씩, 하나씩 빼어내던 블록이 아주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렇게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결국―

‘……하얀아, 미안해.’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그녀를 이루던 세상, 상식, 이치.

그 모든 게 전부 흔적도 없이 무너졌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살아 있다.

그러니―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게임은 계속되어야겠지.

“……얼만큼.”

잔뜩 메마른 미성이 나지막이 임시거처에 스며들었다.

아주 조용히 고개를 든 차설희가 처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판이 깔렸으니, 새로운 블록을 쌓아야 겠지.

새로운 세상을 쌓아야겠지.

새로운 법칙과 상식, 그리고 이치를 쌓아야겠지.

“……얼만큼 매력적인 제안이면 제 동생을 구해주실 건가요?”

드디어 바라던 답을 내놓은 차설희에게 난 조용히 미소 지어 보였다.

마치―

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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