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가 (3)
도서관 캠프 내에서의 최초의 자살.
생존자 중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사태에도 그리 많은 것이 변하진 않았다.
캠프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한 식량을 꼭꼭 씹어먹었고, 냄새나는 용변을 코를 막고 치웠으며, 불편한 잠자리에서 새우잠을 잤다.
도서관에 갇힌 후로 쳇바퀴 돌 듯이 반복되는 지옥 같은 기다림.
점점 멍하니 도서관 천장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끔씩 생존자들에게 말을 거는 차설희의 목소리와 아침마다 수색조로 떠나는 박우진과 김민준의 인기척만 들릴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구예리가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두 쩌리들의 보고가 있었지만―
그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고작 해봐야 휴지로 쓰면 안 되는 중요한 책을 골라내는 것?
그것 이상으로 그녀가 주도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도서관 캠프가 점점 절망에 잠식되어갈 때,
나는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꾸준히 두 쩌리와 안세준을 관리하면서 다소 소홀했던 2층 방비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돌다리도 두드린다는 심정으로 지하 1층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체크하는데 정확히 이틀.
이제 내가 확보한 구역은 좀비 사태 이전보다 더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신경을 썼다.
특히나 신문지와 종이들로 가려져 있던 2층 정문 앞을 철벽처럼 틀어막은 사물함들.
내가 지하 1층에서부터 들고 와 바리케이드용으로 설치한 방어 시설이었다.
이것으로도 만족이 안 돼서 사물함 뒤쪽에 책을 가득 채운 책장들로 2차 바리케이드까지 세워놓았고.
엘리베이터 문 앞과 내부 계단 문, 그리고 내부 계단 문 안의 3층으로 가는 내부 계단 앞까지 아주 꼼꼼히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니―
이제 진짜 죽고 싶어서 밖으로 나가는 것만 아니라면 2층에 있는 생존자들이 위협에 노출될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하루종일 바쁘게 방비를 하다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무언가가 구분된다.
부지런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쪽과 반쯤 죽어있는 쪽.
어떻게 보면 활기차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바닥을 밀대로 밀어대며 핏자국을 청소하는 박우진과 김민준.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부회장과 도서관 캠프 사람들.
점점 서로가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내외하기 시작했다.
덕분인지 두 쩌리들도 이젠 도서관 캠프에 있는 시간보다 내 임시 거처에 빌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조금 넓게 증축한 임시 거처에 모여드는 수색조.
아니―
이젠 또 다른 캠프라 칭해도 별 이상할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변화를 나만 느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생을 구차하더라도 더 필사적으로 쥐어 잡으려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빨리 들어와. 얼른―!”
안세준 같은.
슬슬 본격적으로 구역 확장을 시작하려 하는 아침.
그러니까 여자 생존자 중 한 명이 자살한 지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용변을 해결하러 간 줄 알았던 안세준이 다급한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반복하며 임시 거처에 들어왔다.
덕분에 간단히 무장을 점검하고 있던 수색조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에 모였다.
그곳에 안세준의 다급한 재촉에 쭈뼛거리며 임시 거처로 들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지금도 망설이는 듯 너무 느릿한 속도에 인상을 쓰며 그녀의 손을 잡아끄는 안세준.
안세준이 서둘러 그녀를 옆에 세우곤 나에게 굽신거리며 웃었다.
“조장님. 조장님이 항상 신경 써주시던 제 여자친구 정세리입니다.”
“…….”
툭―! 툭―!
얼어붙은 듯 조용히 침묵하던 정세리를 재촉하는 팔꿈치.
“……저, 정세리입니다.”
남자친구의 재촉에 정세리가 겨우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도서관 첫날, 내 손짓에 곧바로 비명을 지르던 평범한 얼굴이 또다시 시야에 들어선다.
아주 짧은 자기소개 이후, 꽉 다문 입과 바닥에 박힌 정세리의 고개.
설명을 요하는 내 눈빛에 안세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세리가 저쪽에 있기 너무 무섭다고 볼 때마다 울상입니다, 조장님. 게다가 조장님이 너무 감사하게 챙겨주는 음식들에 다른 여자들이 왕따 비슷한 짓을 한다고 해서 정말 너무 불안합니다, 조장님.”
입을 열자마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유들.
미리 연습한 티가 역력한 이야기 중간에 안세준이 꿀꺽― 침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때문에 혹시 정말로 폐가 안 된다면 세리랑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식량 가방도 더 열심히 지키고, 정말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의지를 표현하듯 정세리와 맞잡은 손의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꽉 쥐어 내보이는 안세준.
그 열정적인 표정에 시큰둥한 답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하면 되잖아. 우리가 없을 땐 여기서 여친이랑 뭔 짓을 하던 네 마음이지. 식량 가방만 철저하게 지켜.”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려는 안세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안세준을 제지했다.
“알아. 장난 좀 쳐본 거야. 세준이 네가 하는 말이 뭔지는 당연히 알지.”
우리가 없는 동안 자기 여자친구를 여기 데리고 오는 거라면 저 영악한 놈이 알아서 잘했겠지.
내게 이걸 물어보는 이유는 당연히 내 허락이 필요하다는 거고.
그건 내가 있을 때도― 그러니 지금부터 계속 정세리가 이곳에 있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캠프를 거기서 이쪽으로 옮기겠다라…….”
쇠 파이프를 살짝 들어 올리자, 옆에 있던 고장훈이 눈치 빠르게 쇠 파이프를 자신이 챙긴다.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오른손으로 차분히 긁적이는 턱.
일부러 말을 길게 끌며 고민하는 얼굴을 내보이자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안세준의 목젖이 세차게 꿀렁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안세준.
난 그 모습에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안 받을 이유는 없지.”
내 허락에 미소가 환하게 번지는 안세준의 얼굴.
“그런데―”
허나, 끝까지 들어야 하는 한국말에 안세준의 미소가 빠르게 멎는다.
난 쥐 죽은 듯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정세리를 차분히 응시했다.
내 시선을 눈치채고 서둘러 정세리를 다시 재촉하는 안세준의 팔꿈치.
덕분에 정세리가 어색하게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문제는 우리 세리가 세준이랑은 경우가 좀 다르다는 거지.”
우리 세리는 지금까지 저 캠프에서만 쭉 지냈던 거잖아?
임시 거처의 반대편을 곧게 지목하는 내 손가락.
난 불안에 떨고 있는 정세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감염된 놈이 지 친구를 물고, 사람이 자살하는 캠프. 여기랑 다르게 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이던데.”
혹시 알아?
“우리 세리도 물린 자국을 숨기고 있을지.”
내 추측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커플.
“그렇게 고개만 돌리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믿어?”
“아, 아니에요. 저 정말로 안 물렸어요.”
“마, 맞습니다, 조장님. 그 난리가 난 뒤로 시간도 엄청―”
내가.
표정을 굳히며 살짝 목소리를 높이자 자연히 정적에 물드는 임시 거처.
난 입을 합죽이처럼 다문 커플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어떻게 믿냐고.”
“…….”
내 물음에 눈을 파르르 떨기 시작한 정세리.
혹시나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을 그녀에게 넌지시 그 최악의 상황을 선고했다.
“벗어.”
“조, 조장님―!”
“세준아.”
기겁을 하던 안세준이 내 호명에 데인 것처럼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불안하게 몸을 꼼지락거리며 내게 눈빛으로 애원하는 안세준.
난 그 눈빛을 가볍게 무시하며 슬슬 겉으로 보일 만큼 몸을 떨기 시작한 정세리에게 말했다.
“하기 싫으면 그냥 다시 저 캠프로 돌아가. 아무도 너한테 강요하지 않으니까.”
네가 굶어 뒈지든, 좀비한테 물리든 아니면―
“목을 매달고 똥오줌 지리면서 뒤지든 나한테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
“…….”
발 없는 속삭임이 그녀를 찔러대듯 내가 문장을 이을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는 정세리.
도서관 첫날의 대면처럼 울먹거리던 정세리의 눈물이 차가운 내 눈을 만나자마자 주르륵― 흘러내린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물을 줄줄― 흘려대던 정세리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점점 상의 단추로 옮겨간다.
어느새 맞잡은 손을 놓고 한 발자국 옆에서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안세준.
“뭐 대단한 거 한다고 이렇게 뜸을 들이지?”
내 재촉에 몸을 크게 들썩인 정세리가 연파랑 색 셔츠를 푸는 손길을 조금 빠르게 서두르기 시작했다.
툭―! 툭―!
서서히 단추가 풀려가며 속살을 내보이는 때가 잔뜩 탄 연파랑 색 셔츠.
샤워를 오랫동안 못한 탓인지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피부와 셔츠와 비슷한 색깔의 브래지어가 모습을 드러낸다.
툭―!
단추를 다 풀어낸 손이 잠시 방황하다가 청바지 앞에 공손히 모인다.
덜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고 나를 곁눈질로 계속해서 살피는 정세리.
“…….”
난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무언의 재촉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모은 정세리가 다시 눈물을 질질― 흘려대며 청바지에 손을 올린다.
툭―! 지이이익―!
후크가 풀리며 지퍼가 내려가는 소음.
그렇게 다리에 딱 붙는 청바지가 피부를 스치는 소리가 임시 거처에 조용히 흐른다.
브래지어와 같은 색으로 짝지어진 팬티.
어느새 옷보단 그녀 본연의 살색이 더 잘 보이는 광경 속에서 살짝 든 단화를 통과한 청바지가 바닥에 널브러진다.
툭―!
바닥에 나뒹구는 단추가 다 풀린 셔츠와 청바지.
마치 본능처럼 두 팔을 감싸 가슴을 가리고 있는 정세리에게 이제 남은 가림막은 속옷과 검은 때가 탄 흰 양말, 그리고 단화뿐이었다.
“좀비 새끼들이 페어플레이 정신이 넘치나 봐? 여자 가슴이랑 보지는 안 물기로 약속이라도 했나 보지?”
내 비아냥에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숙이는 정세리.
그녀가 가슴을 가리던 손을 내려 브래지어의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툭―!
이젠 아무런 가림막 없이 온전히 내보이는 그녀의 살색.
웬만한 사람들에겐 보여주지 않았을 비밀의 구역이 너무나도 대놓고 수색조의 시선에 희롱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크게 보이진 않는 봉긋한 가슴과 연갈색의 유두.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팬티와 양말을 벗는 정세리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그녀의 가슴이 일그러진다.
그녀의 팔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일그러지던 가슴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완벽한 나체가 된 정세리가 서둘러 가장 중요한 부위를 두 손으로 가린다.
내 눈치가 보여서인지 대놓고 가리진 못하고 두 손을 공손히 쥐는 것으로 가리고 있는 부위.
“차렷.”
“……흑!”
단호한 음색에 그 가려진 부위가 서서히 수색조의 시선에 들어선다.
조개처럼 꽉 다물어진 보지와 그 주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검은 음모.
여자에게 가장 비밀스러운 구역을 모두에게 내보인 정세리에게 검지를 내밀며 빙빙 돌렸다.
“돌아.”
이제 더는 숨길 부위도 없어서 자포자기했는지, 버벅거리며 곧바로 내 명령을 수행하는 정세리.
제자리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뒤 몸을 한 바퀴 돌린 정세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없네.”
“……아.”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는 안세준과 무너질 듯이 울음을 터트리려는 정세리.
“그럼 확인이 끝났으니 이제 제대로 부탁해 봐.”
하지만 이번에도 새로운 난관이 커플을 가로막는다.
입을 떡― 벌리며 당황하는 안세준과 나체로 파르르― 떨기 시작하는 정세리.
그렇게 눈물을 질질 흘려대는 정세리가 의지할 곳을 찾듯이 남자친구를 응시했다.
정세리의 간절한 눈빛에 무언의 눈빛으로 무언갈 말하는 듯한 안세준.
뭐, 커플끼리 통하는 의미가 있는 듯 입술을 꾹 깨문 정세리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부,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언뜻 봐도 90도는 가볍게 넘길 허리 숙임 덕에 그녀의 엉덩이가 시야에 맺혔다.
아주 공손한 인사 후에 다시 허리를 일으키는 정세리.
“인사는 아까 받았고.”
허나, 시큰둥한 내 답변에 그녀의 얼굴 표정이 곧바로 출렁였다.
다시금 자기 남자친구를 찾는 눈빛에 아까보다 더 확실하게 무언의 지시를 하는 안세준.
“……흐흑―!”
결국 꾹 참던 울음소리를 살짝 토해낸 정세리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서서히 굽혀지는 다리와 땅바닥에 붙은 무릎.
“흐흑―!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지낼 수 있게 제발 허, 허락해주세요.”
난 내가 바라던 것을 찰떡같이 이행하는 정세리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안세준―
괜히 좀비가 발생하자마자 임시 거처로 튄 새끼가 아니랄까 봐.
몇 대 맞더니 생존 본능이 맥시멈으로 차올랐네.
자기 여친 코칭도 아주 수준급이야.
난 무릎을 꿇고 내 처분을 기다리는 정세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뚜벅― 뚜벅―
일부러 더 크게 내는 발소리에 겁에 질린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정세리.
“그래,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치는 내 시선을 피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는 티가 역력했다.
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엉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줬다.
내 손길에 세차게 진동하는 그녀의 떨림이 그대로 전달된다.
“내가 이득 보는 게 하나도 없는 장사잖아.”
밥도 제때 먹여야 하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재워줘야 하고―
“오롯이 내 선처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잖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그녀의 정수리에서 멈춘다.
턱―!
조금 억세게 그녀의 머리통을 잡는 손짓.
내 손을 따라 정세리의 더 격해진 떨림이 전해진다.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세리.
“그럼― 이런 거라도 잘해야지.”
나지막한 속삭임과 함께 내 손짓을 따라 그녀의 머리가 아래로 이동한다.
툭―!
그렇게 바닥과 이마를 맞닿게 된 정세리.
난 조금 세게 그녀의 머리통을 잘근잘근 짓눌렀다.
“그러니까 왜 멍청하게 저쪽 캠프에 있었어, 세리야.”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짓눌린 이마 덕에 바닥을 울린 뒤에 튀어 오르는 정세리의 사죄.
난 그 웅웅거리는 목소리에 더 짙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통을 짓눌렀다.
“덕분에 하기 싫은 짓도 해야 하잖아, 마음 아프게.”
“…….”
나체의 상태로 더없이 공손한 자세가 된 정세리.
두근― 두근―
이상하게 정세리의 나체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던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 내 앞에 엎드린 정세리를 보고 있으니 만족감과 고양감이 폭죽처럼 머릿속에서 스파크를 터트리고 있었다.
마치 본능처럼―
툭―!
매우 당연한 것처럼 정세리의 머리에 올린 오른발.
“어쩔 수 없네. 이렇게 공손하게 부탁하는데.”
이 순간을 만끽하며 그녀의 머리를 짓눌린 발을 잘근잘근― 흔들었다.
내 발짓을 따라 엉망으로 뒤엉키는 정세리의 머리.
내 발을 타고 올라오는 여전한 진동에 온몸이 짜릿했다.
띠링―!
[‘정세리’가 당신에게 ‘굴복’했습니다.]
[굴복 요인 : 배고픔에 대한 ‘아주 강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아주 강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아주 강한’ 두려움……]
그녀의 마음속에 시커멓게 들러붙은 부정적 요인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덕지덕지 붙은 그녀의 절망들을 잘근잘근 밟으며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폭력없이 이룬 성과였다.
오로지 그녀를 감싼 상황만으로 이루어진 굴복.
“가, 감사합니다, 조장님!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키시는 일이 무엇이든―”
대충 상황이 정리됐다고 생각했는지 넙죽 감사 인사를 시작하는 안세준.
난 갑작스레 고개를 내민 생각에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무엇이든지?”
불쑥 튀어나오는 물음과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하는 내 발에 짓밟힌 나체의 여자.
내 눈짓에 그대로 온몸이 멈춘 안세준이 몸을 달달― 떨어댔다.
삼류 악당과 같은 대사에 하늘이 노래지는 듯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드는 놈의 얼굴.
바짝 마른 입술로 내 발에 짓밟힌 여자 친구와 나를 번갈아 보던 안세준이 무언갈 결심했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됐어. 장난이야, 세준아. 장난.”
타이밍 좋게 그의 입을 막는 우스갯소리와 덕분에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보는 안세준.
뒤늦게 내 미소를 따라 하듯 어색하게 입가를 찢는 안세준에게 말을 이었다.
“우리 세준이, 로맨티스트네.”
이런 와중에도 자기 여자친구는 착실히 챙기고 말이야.
툭―!
장난처럼 그를 밀치는 손짓에 어색하게 웃어대는 안세준.
난 미동도 없이 엎드려있던 정세리의 머리에서 발을 떼며 턱짓했다.
“다시 입어.”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번개처럼 여자친구에게 다가가는 안세준.
난 내 뒤쪽에서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던 수색조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에 은근히 내 눈을 피하며 몸을 꿈틀거리는 수색조.
특히나 엉거주춤한 허리와 툭 튀어나온 고간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수색조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살짝 붉어진 얼굴과 꽤 거칠어진 숨결이 느껴지는 오감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내 표정에 어떻게든 몸의 이상을 숨기려는 두 쩌리와 고장훈.
난 그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앞을 응시했다.
서둘러 옷을 입는 정세리와 그녀를 돕는 안세준.
“이거 생각해보니까 막내가 새치기를 한 셈이네.”
내 중얼거림에 옷을 입다 말고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 커플.
난 그 중 정세리를 유심히 바라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 빌붙으러 오는 여자들 중에 한 명씩 골라.”
수색조를 바라보며 넌지시 던지는 지시에 그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이렇게 팀워크를 안 해치고 열심히 하는데 보상이 있어야지.”
난 서서히 그들의 입에 번져가는 미소를 바라보며 고장훈을 가리켰다.
“고자는 한 명 더 고르던지.”
그래도 엄연히 서열이라는 게 있는데.
내 지시에 웃음을 참으려 무진장 애를 쓰는 고장훈.
그 옆에 무언가를 상상하듯 침을 꼴깍이던 두 쩌리가 내 시선을 눈치채곤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가, 감사합니다, 조장니임―!”
거의 땅바닥에 이마를 찍으려 하는 폴더 인사와 우렁찬 목소리.
두 쩌리에게서 처음 보는 광적인 반응에 헛웃음이 흘렀다.
띠링―!
[‘박우진’, ‘김민준’이 당신에게 ‘강하게’ 복종합니다.]
[공통 요인 : 조장에 대한 ‘강한’ 감사와 신뢰, 폭력에 대한 두려움.]
띠링―!
[왕권 : 10]
[일정 수치에 도달한 왕권 스탯에 의해 전용 스킬이 잠금 해제됩니다.]
갑작스럽게 시야를 가득 메우는 상태 메시지.
난 그 메시지들을 천천히 읽어내리며 아까보다 더한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이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