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13화 (13/120)

무력시위 (4)

…….

말 한마디에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추락한 분위기.

얼굴을 있는 대로 사정없이 찌푸린 부회장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뭐?”

“싫다고 이 병신 새끼야.”

“이 씨발년이 지금 뭐라고 했냐?”

위압적인 덩치로 쿵쾅대며 다가오는 부회장.

난 쇠 파이프를 까닥― 까닥― 흔들며 놈이 다가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정상적인 격투 스포츠였다면 적어도 2체급 이상은 차이 날 압도적인 피지컬.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다가오는 모습에 오금이 저렸겠지만, 지금은 나조차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좀비가 내게 달려올 때보다 훨씬 더 침착하고 조용한 심장.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내가 패 죽인 좀비들에 비하면 성인 남자 하나는 너무나도 쉬운 난이도였다.

물린다고 그대로 게임 오버가 되는 것도 아니고―

팔이 부러지든, 다리가 날아가든, 그저 먹잇감을 베어 물 생각만 가득한 괴물도 아니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해도 예상치 못한 데미지에 그대로 기절해버리는 저 책장 밑의 남자와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선배―! 잠시만―! 태하 선배―!”

콧김을 쉭― 쉭― 내뱉으며 내게 다가오던 부회장을 필사적으로 당기는 손짓.

부회장에게 2번이나 말을 끊겼던 여대생이었다.

분명 부회장이 ‘예리’라고 불렀던 여대생이 질질 짜던 여자에게서 다급하게 일어나 부회장을 잡아당겼다.

“선배, 잠깐만요―! 이건 좀 아니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 새끼가 지금 사람이 좋게 얘기―”

“저 사람이 갑자기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끼리 서로 싸워서 뭐가 좋다고 그렇게 못 싸워서 안달이세요?!”

여대생의 만류에 발걸음을 멈추고 짜증 가득한 한숨을 내뱉는 부회장.

“지금 좀비랑 싸워도 모자랄 판에 왜 생존자들끼리 싸워야 해요? 잠시만 화 좀 가라앉혀보세요!”

“……하아― 씨이발―!”

“그쪽도 그 기분 나쁜 쇠 파이프 좀 치우고 뒤로 물러나 보세요! 싸우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당사자들은 그리 원하지 않은 듯한 제지에 부회장 뒤에 있던 사람들도 뒤늦게 부회장을 붙잡았다.

마치 학창 시절에 다 같이 달라붙어 싸움을 말리듯이 갑작스레 부회장과 나 사이에 세워진 사람의 벽.

은근슬쩍 내 앞을 가로 막은 고장훈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속삭였다.

“저쪽에 비해 우리 쪽은 그림이 안 살잖아요. 혹시라도 뻘쭘하실까 봐, 헤헤―”

미친놈.

툭― 하고 튀어나오는 헛웃음을 본 부회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동그래진다.

“저 새끼가 갑자기 왜 웃고 지랄―”

“선배!”

부회장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가 다시금 자신을 제지한 여대생에게 향했다.

“그럼 우리보고 어떡하란 거야―! 어떻게 온 지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새끼들을 넙죽 받아서 보호해주라는 거야?! 저 새끼들 없어도 이미 배고프고 불안한 사람들 천지라고!”

“저 두 사람 더해진다고 더 부족해질 식량도 없잖아요―! 게다가 저 두 사람을 본 지도 벌써 몇 분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이상 없이 그대로 사람이잖아요―! 어디서 물리고 온 사람들도 아니에요!”

예리라고 했던 여대생이 창문 앞에서 대치 중인 우리를 가리키며 부회장을 향해 속삭였다.

“게다가 도서관 밖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언제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정보가 무슨 소용―”

“필요해요, 선배.”

갑작스레 목소리를 죽이고 열심히 속닥거리는 두 사람.

제 딴에는 우리가 듣지 못하게 할 심산인 듯했지만, 한층 예민해진 내 귀에는 여과 없이 그대로 저 둘의 속삭임이 들려오고 있었다.

“설희 씨가 부탁한 것도 있잖아요.”

“그건 일단 식량 문제부터 해결해야―”

“도윤 선배랑 합류해야 하기도 하구요.”

“……하.”

“뭐가 됐든 우리에겐 경험자가 필요해요. 조금이라도 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쯧―!

마치 들으라는 듯 도서관에 크게 울리는 혀 차는 소리.

한껏 세모난 눈으로 나를 째려보던 부회장이 고장훈으로 레이저를 옮겼다.

“어이, 너!”

“……예?”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거나 사람들한테 이상한 소리 하나라도 들려오면 바로 내보낸다. 알겠어?!”

부회장의 으름장에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하는 고장훈.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내 모습에 다시 부회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해했습니다.”

“……씨발! 안 그래도 단수 때문에 바빠죽겠는데―”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일방적으로 고장훈에게 말을 전달하고 등을 돌리는 부회장.

그를 따라 도서관 2층 생존자들이 우르르 사라진다.

여자 무리에 둘러싸여 등을 돌린 설희와 한동안 나를 보다가 부회장을 따라가는 예리라는 여대생.

마치 대놓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표현하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건 뭐 하자는 거지?

단호하게 우릴 내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대하게 우릴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어중간한 대처였다.

저 부회장이라는 놈도 이런 경우는 처음일거라 생각해줘도 이건 너무나도 병신같은 대처가 아닐 수 없다.

뭐, 딱 봐도 리더로 보이는 놈이 저 정도면 나한테 이득이면 이득이었지, 손해는 절대 아니니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

일촉즉발의 분위기는 허상이었다는 듯 다시 침묵에 젖은 창문 앞.

난 ‘휴우―’ 가볍게 한숨을 내뱉는 고장훈에게 턱짓하며 2층 구석으로 이동했다.

아마도 2층 인문 자료실의 오른쪽 하단 꼭짓점으로 보이는 구석.

아주 길게 이어진 창문들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열람석들이 눈에 들어선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정반대 쪽으로 보이는 곳을 차단하고 있는 여러 개의 책장.

딱 봐도 저곳이 2층 생존자들이 주로 머물고 있는 구역인 듯했다.

이렇게 눈대중으로 구역을 살피고 있는 와중에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인문대 옥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이 넓었다.

백 명은 물론 이 백 명도 구역을 잘 나누면 전혀 불편함 없이 수용할만한 넉넉한 넓이.

하긴, 재학생들의 공부 공간을 위해 벽을 따라 쭉 세워진 4인용 테이블만 해도 50인분은 거뜬히 넘길 테니, 그 정도는 당연하겠지.

난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한 번 바라보곤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진 책장에 손을 올렸다.

끼이이익―!

책장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책장의 위치가 재조정된다.

마치 작은 방의 벽처럼 다시 세워진 책장.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곤 얌전히 있던 고장훈이 식량이 들어있는 검은 가방을 벽에 세웠다.

어쨌든 책장으로 만든 벽이라 문이 없으니 사람 하나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고 나서 벽에 기대어 앉으니 고장훈이 나를 따라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잔뜩 상기된 고장훈의 얼굴.

난 주위에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이거 진짜 재밌네요! 무슨 공작원이라도 된 것 같네―”

봉인을 풀자마자 순식간에 나불거리기 시작하는 주둥이.

난 한결같은 놈을 보며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옥상에서 생각했던 대로 된 것 같네요. 물론 중간에 대화하다 보니 진짜로 화가 나서 조금 메소드 연기를 하긴 했는데―”

고장훈의 말대로 지금 이 상태가 제일 이상적인 상황이기는 했다.

덤벼드는 부회장을 제압하고 단번에 캠프를 먹어버리는 방법도 나쁘진 않지만, 지금 이 상황보다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지금 내가 믿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 해 봐야 고장훈 딱 한 명뿐.

캠프를 접수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유지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그 유지를 내가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캠프에만 박혀있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스탯’과 ‘상태창’.

멧돼지처럼 내게 덤벼들던 부회장을 같잖게 만들어버리는 이 특별한 ‘이능’.

이 특별함은 내가 좀비를 처치할수록 더 빛을 발한다.

한 번 ‘성장’이라는 마약을 들이킨 이상, 가만히 멈춰있는 것을 이제는 내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 성장에 필요한 왕권을 올리기 위해선 인문대보단 다수의 생존자가 버티고있는 캠프에 속해야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캠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시간 낭비와 책임은 지기 싫다.

2층 생존자 캠프에 속해있지만, 속하지 않은 이방인 포지션.

이른바, ‘책임 없는 쾌락’이 내게는 베스트였다.

“영화로 치면 저희가 지금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을 찍고 있는 거잖아요.”

“……‘기생충’이겠지.”

“에이~ 그건 너무 워딩이 부정적이잖아요. 저희가 그런 뜻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그냥―

“으음― 뭔가 정의로운 선상 반란? 어쩔 수 없는 정권교체? 탄핵?”

난 또다시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하는 고장훈을 보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그 동아리 후배한텐 잘 말해놨겠지? 혹시라도 아는 척하거나 티 내면 아주 많이 난감한데.”

“당연하죠. 제가 이미 카톡으로 잘 얘기 끝내놨습니다.”

자기만 믿으라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턱을 쭉― 들이미는 간사한 얼굴.

그래, 알아서 어련히 잘했겠지.

이미 아무런 저항 없이 도서관 2층에 도착한 이상, 이 캠프를 장악하는 건 시간문제다.

굳이 급하게 처먹어 탈이 나는 것보단, 잘게 잘게 쪼개서 먹는 게 오히려 더 효율적이겠지.

“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곤 함께 일어서던 고장훈이 짧은 탄식을 내질렀다.

불안한 얼굴로 검은 가방을 가리키는 고장훈.

“그나저나 저 가방은 어디에 숨겨둘까요? 어디 몰래 숨겨둘 공간이라도 있나?”

“그대로 놔둬.”

이리저리 고개를 휘두르던 고장훈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이대로 두면 누가 훔쳐 갈 수도 있는데요?”

“그냥 둬.”

“……예.”

단호한 대답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고장훈이 서둘러 나를 뒤따랐다.

난 누군가 흘린 보물처럼 벽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검은 가방을 눈에 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2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ㄷ’자가 대칭으로 맞붙어있는 듯한 구조의 반석대 중앙도서관 2층.

임시로 만든 거처에서 우리가 진입한 창문까지 걸어가 슬쩍― 블라인드를 젖혔다.

“끼에에에―”

아직도 먹잇감을 놓친 좀비들이 괴음을 내뱉으며 시쳇더미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 좋지 않은 풍경에 살짝 눈을 찌푸리곤 다시 블라인드를 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2층 생존자들이 똥을 피하듯 떠나간 그 길.

‘ㄷ’ 구조를 서로 연결하는 인문 자료실의 중앙이라 할 수 있는 길이었다.

벽에 붙어있는 이런저런 안내문들과 도서 검색대.

생존자들이 단단히 막아놓은 듯한 내부 계단 문과 엘리베이터를 찬찬히 살피며 걸어갔다.

책을 꽉꽉 채운 책장들이 방벽처럼 철문과 엘리베이터를 틀어막고 있었다.

뚜벅― 뚜벅―

그렇게 이미 속살까지 다 벗겨 먹은 듯한 활짝 열린 2층 사무실과 첫날의 지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핏빛의 대출, 반납 데스크를 지난다.

“……오.”

그렇게 마주하게 된 2층 인문 자료실의 정문.

신문지와 찢어진 책으로 꼼꼼히 가려진 유리문들을 바라본 고장훈이 나지막한 감탄을 흘렸다.

저 가림막 덕분에 시각에 영향을 받는 좀비들에게 완벽히 가려진 2층 내부.

쏴아아아아―

그리고 2층 화장실에선 물 쏟아지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낑낑거리며 물이 한가득 든 양동이를 옮기는 2층 생존자들.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잡동사니에 단수를 대비해 물을 담고 있었다.

2층 정문을 기준으로, 이젠 2층 생존자들의 구역인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는 흔적들.

책장을 쉽게 옮기기 위해선지 바닥에 잔뜩 버려둔 책들과 이리저리 옮겨져 있는 책장들이 단번에 눈에 띈다.

난 이리저리 급하게 움직이는 생존자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우리가 없는 사람인 듯이 완벽히 무시하고 제 할 일을 하는 생존자들.

하지만 그 눈에 담긴 명백한 경계심과 불안함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낑낑거리며 물이 잔뜩 든 양동이를 들고 어떻게든 빨리 우리에게 멀어지려는 저 애처로운 발걸음.

아닌척하며 계속해서 자신과 우리와의 거리를 가늠하는 고개에 잔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으― 여기선 잘 안 보일 겁니다.”

갑작스레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는 고장훈.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으로 무장한 고장훈이 다시금 내게 속삭였다.

“그때 말했다시피 무슨 학생회 소속인 것 마냥 싸고돈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구석에서 공주님 대접받으면서 숨어있을걸요?”

“짐 정리를 빨리 끝내셨네요.”

다 알고 있다는 듯 요란하게 움직이는 고장훈의 눈썹을 보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니 부회장과 나를 막았던 그 여대생이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워요. 행정학과 20학번 구예리입니다. 학생회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데 이건 어떤 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별로 쓸데없는 감투라서.”

고장훈을 저격하며 내게 선선히 손을 내미는 구예리.

난 그 손을 잡으며 찬찬히 구예리를 훑어보았다.

특출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어디가 모나진 않은 외모.

특유의 음색에서 바로 알 수 있는 발랄한 분위기와 지금도 우리에게 짓고 있는 부드러운 미소.

그냥 보자마자 딱 감이 오는 인간상이었다.

‘7의 여자’.

외모에 비해 의외로 대학 생활 최상위 서열을 누리는 만인의 여자를 통칭하는 단어였다.

생각했던 대로의 동글동글한 성격을 보여주듯 가볍게 손을 흔들어 악수를 끝낸 구예리가 다시 한번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인문대에서 오셨다구요?”

“…….”

난 아무런 대답 없이 구예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한 달전만했어도 이런 살가운 반응에 어버버 거리는 내가 있었을 것이다.

구예리 정도만 해도 충분히 나에겐 오르지 못할 나무였으니까.

물론 외모는 아까 워낙 어나더 중의 어나더 레벨을 본 뒤라 그렇게 실감은 안 나지만, 저 정도만 해도 남자들 꽤나 울릴 외모겠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 평범한 인사, 평범한 안부였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한 첫마디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건 뭐랄까―

그래.

“……저기요?”

건방졌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의 선명한 감정.

지금 내 앞에서 당찬 척하는 저 구예리가 정말로 너무 건방졌다.

아무런 대답 없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구예리 앞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나와 구예리 사이를 보디가드처럼 가로막은 고장훈.

“저한테 말씀하시죠, 구예리 씨.”

“……아, 네. 인문대에서 오셨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인문대에서 도서관까지 거리가 좀 될 텐데 오시는 동안 좀비도 마주치셨겠죠?”

내 앞을 가로막은 고장훈과 대화 중이지만, 눈은 나를 주시 중인 구예리.

“예, 그렇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좀비들을 피해서 왔는지, 아니면 물리치시면서 왔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반반이죠.”

“아, 다행이네요.”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구예리가 다시 말을 잇는다.

“대충 아실 것 같지만, 저희가 인원에 비해 식량이 아주 많이 부족합니다. 아니, 사실 식량이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죠.”

구예리가 그녀의 뒤편,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도서관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게다가 오늘 새벽엔 전기가 곧 끊긴다는 재난 문자까지 받았구요. 전기가 끊기면, 당연히 물도 끊기겠죠.”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저희와 운명을 함께하실 그쪽 분들도 아주 난감한 상황에 이르시겠죠?”

하.

작은 헛웃음이 가슴을 맴돈다.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듣지 않아도 다음 말이 들리는 듯 선명했다.

“안 그래도 전기가 끊기기 전에 지하 1층 매점을 확보하려 했는데 너무 다행스러운 일이죠.”

여러분들에게나, 우리들에게나.

지금 나에게 방긋― 미소 짓고 있는 구예리는 알까?

“좀비밭을 뚫고 인문대에서 도서관까지 올 수 있을 정도의 경험자 두 분이 오늘 저희가 지하 매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고 있다는걸.

무력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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