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시위 (2)
아직 해가 완전히 머리를 내밀지 못한 이른 새벽.
지나치게 밝은 색상이라기보단 연한 파란색으로 가득 찬 주변을 둘러보며 가볍게 몸을 털었다.
시원한 새벽 공기와 더불어 약하게 풍겨오는 섬유유연제 향.
땀 냄새로 범벅이 된 옷을 버리고 과방에서 노획한 트레이닝복이었다.
그나마 섬유 유연제향이 남아있는 트레이닝복은 내가 입고, 꿉꿉한 냄새가 나는 트레이닝복은 자연스럽게 고장훈의 차지였다.
난 팔과 다리를 천천히 털어대며 가방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고장훈을 응시했다.
질소를 최대한 뺀 과자들과 간단한 식품들로 가득 채운 검은색 가방.
생수도 넉넉히 챙길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까지 챙기기엔 고장훈이 챙길 수 있는 무게엔 한계가 있었다.
“그 정도면 메고 뛰어다닐 수 있겠어?”
“옙! 이 정도면 끄떡없습니다, 헤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도시락으로 든든하게 해결한 아침밥.
어제저녁엔 4층 화장실에서 간단하게나마 샤워도 마쳤다.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이보다 만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없을 만큼 만전의 상태.
“후우―!”
[인벤토리 Lv.1]
[1. 쇠 파이프]
[2. 몽키 스패너]
[3. 간이 식칼 창]
난 무장으로 가득 채운 인벤토리를 재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가자.”
“옙.”
우린 옥상 산책로에 덩그러니 놓인 정자 기둥에서부터 꼼꼼히 연결된 탈출용 밧줄을 따라 걸었다.
길게 이어진 밧줄이 옥상 난간을 넘어 인문대 1층 높이에서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좀비 하나 없이 깨끗한 인문대 뒤편.
도시락을 까먹을 때부터 인문대 잔디밭 주위에 있는 차량에 열심히 잡동사니를 던져댄 결과였다.
난 내려가기 전에 적당히 힘을 쥐고 밧줄을 여러 번 당겼다.
생각보다 단단하게 연결을 유지한 채 팽팽한 수평을 이루는 밧줄.
이 정도면 괜찮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곤 가벼운 뜀박질로 옥상 난간 위에 섰다.
휘이이잉―!
아주 조금 높아진 위치인데도 불구하고 날카롭게 불어오는 바람.
난 앞머리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밧줄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힘 : 15] [민첩 : 15]
통합 ‘30’에 도달한 육체계 스탯 덕분인지 아무런 긴장감 없이 균형을 유지하는 신체.
과연 어제 아침부터 개지랄을 하며 좀비 대가리를 부순 보람이 절로 생기는 피지컬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 스탯 찍는 맛이 있지.
굳이 시간을 더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부드럽게 난간에 올라선 오른발을 아래로 내리려는 찰나―
심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응시하는 고장훈이 보였다.
“왜.”
짧은 물음에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나를 바라보는 고장훈.
“그으― 24시간 이내에 단전이랑 단수된다고 빨리 물 받아놓으라는데요?”
……오늘이 그 지랄이 난 뒤로 3일 뒤였던가, 4일 뒤였던가?
영화에서는 하루 만에 단수되고 전기 끊기고 개난리가 나던데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해야 하는지, 생각보다 더 빠르다고 해야 하는지―
뭐 어쨌든 우리 입장에서는―
“타이밍 좋네.”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툭―!
오른발에 이어 순서를 맞춰 난간을 벗어나는 왼발.
매끄러운 건물 외벽에 두 다리를 지탱한 채 두 팔에 힘을 주고 밧줄을 천천히 내려선다.
휘이이이잉―!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게 바람이 몸을 흔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착실하고 튼튼하게 두 팔이 다음 공정을 이어간다.
툭―!
1분도 채 안 돼서 다시 지상에 발을 내디디는 양발.
그런 내 모습을 옥상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쳐다보던 고장훈이 무음으로 열렬히 박수를 치며 검은 가방을 내밀었다.
난 인벤토리에서 쇠 파이프를 꺼내 오른손에 무장하고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변에 가방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으로 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훈이 손을 놓자마자 빠르게 추락을 시작하는 검은 가방.
툭―!
얌전히 내 손에 안착한 검은 가방을 보며 ‘예스―!’라며 입 모양으로 외친 고장훈이 난간 위에 선다.
밧줄을 쥔 뒷모습이지만 자연스럽게 어떤 얼굴일지 예상되는 놈의 두 다리.
뭔 전기가 통하는지 달달달― 떨리는 다리가 가까스로 인문대 외벽을 디디다가 미끄러지고, 다시 디딘다.
겁을 아주 잔뜩 먹은 얼굴로 밑에 있는 나와 밧줄을 번갈아 응시하는 고장훈.
난 가볍게 한숨을 쉬며 혹시나 떨어질 놈을 대비해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뎠다.
그 모습에 들리지도 않았는데 ‘꿀꺽―’이라 들릴 만큼 역동적으로 목젖을 움직이더니 하강을 시작했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굼벵이처럼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내려오는 고장훈.
툭―! 쿵―!
결국 안 떨어지고 무사히 내려온 것을 대견하다고 해야 하는지―
달달 떨리는 두 다리가 긴장이 풀렸는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이 한심하다 해야 하는지―
이제 시작인데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든 고장훈의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에게 눈짓했다.
고장훈이 이미 얼굴을 한가득 적신 식은땀을 후두둑― 털어내며 갓 태어난 기린 새끼마냥 다리를 떨며 일어섰다.
난 그가 일어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인문대 뒤편에 주차 공간과 숲길을 나누는 사람 키만 한 벽을 뛰어넘었다.
팟―!
한 번의 뜀박질로 풀숲에 안착하곤, 들고 있던 검은 가방을 놓고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둘러 내 손을 잡고 낑낑대며 벽을 넘는 고장훈.
풀숲에 올라온 고장훈이 서둘러 검은 가방을 메고 준비가 완료됐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청각이 살아있는 좀비에게 어그로가 끌리지 않으려면 쓸데없는 대화도 지양해야겠지.
천천히 숲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는 나를 따라 조심스러운 고장훈의 발걸음도 뒤따른다.
지금부터 논스톱으로 도서관 흡연구역에 도착해야 한다.
웬만하면 좀비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면서.
사락― 사락―
민첩 스탯의 영향인지,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나와 달리 최대한 조심하는데도 풀 밟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고장훈의 발소리.
아주 살짝 신경을 거슬렀지만, 이 정도 소리에 좀비가 반응했으면 우리는 옥상에서 대화도 못 했을 거다.
“끼에에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좀비를 생각하자마자 눈에 뜨이는 좀비 한 마리.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는지 여전한 괴음을 내뱉으며 멍청하게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주변을 수색하던 발걸음이 단번에 가속을 얻으며 질주한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선명히 느끼며 어느새 꽤나 큼지막하게 다가오는 좀비 대가리에 그대로 쇠 파이프를 휘두른다.
퍼어억―!
갑작스런 소음에 대가리를 돌리는 동시에 놈의 옆통수에 작렬한 스윙.
툭―!
좀비 특유의 포효를 내지르지도 못하고 좀비 새끼는 천천히 나무에 몸을 기대어 쓰러졌다.
난 포인트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며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
아무런 이상 없이 아주 조용한 숲길.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묘한 침묵에 만족하며 그대로 발걸음을 이어갔다.
분명 좀비 아포칼립스 첫날은 좀비들에게 뷔페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딜가나 그들을 자극하는 비명과 도망치는 인간들이 가득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숲길을 걷는 지금은 첫날에 비해 시간이 조금 많이 흘렀다.
그동안 대학 사방을 헤집고 다니던 좀비들도 이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에 길을 잃었겠지.
그리고 그 나름의 방황 속에 간간히 들려오는 소음에 득달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일부러 낸 차량 경보음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날 수밖에 없는 소음 등등―
뭐, 결론은 그동안 약간 무규칙적으로 퍼져있던 좀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특정 구간에 모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이렇게 사람이 숨을 수가 없는 공간엔 자연스럽게 좀비들의 숫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뜻.
난 인문대에 비해 제법 여유로운 숲길을 가로지르며 숲길 중간에 세워진 표지판을 확인했다.
[☜ 사범대, 중앙도서관 (0.1km)]
그곳에 정면을 가리키며 강조하고 있는 우리의 목적지.
난 고개를 돌려 고장훈이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점점 때아니게 초록빛으로 만발한 숲길이 끊어지며 시야에 들어서는 의자들과 작은 정자들.
그보다 조금 더 정면에 인문대보다 훨씬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나를 반기는 사범대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좀비 무리들이 포착됐다.
난 부드럽게 몸을 숙이며 사범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어느덧 고개를 내민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목적지, 도서관이 보였다.
여전히 파리가 웽웽거리는 시쳇더미와 그 뒤에 버려진 사다리와 열린 2층 창문까지도.
바스락―
내 뒤에 몸을 바짝 숲길에 숨기는 고장훈의 인기척이 들렸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장훈과 눈을 맞췄다.
내 눈빛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주머니에서 서둘러 동전을 꺼내는 고장훈.
난 고장훈이 건넨 500원짜리 동전을 쥐고는 살짝 몸을 일으켜 사범대 앞 주차장에 방치된 하얀색 모닝을 조준했다.
쉭―!
빠르게 내 손을 떠나는 동전이 하얀색 모닝의 앞 유리를 정확하게 꿰뚫는다.
빠앙―! 빠앙―! 빠앙―!
그리곤 상처에 비해 아주 커다란 울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갑작스런 소음에 발광하며 달리기 시작하는 좀비들.
난 조용히 고개를 들어 주변에 산적한 좀비들이 하얀색 모닝으로 모여드는 것을 관찰했다.
우리의 진입 방향에 더는 걸리적거리는 좀비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뒤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마냥 서둘러 검은 가방을 건네는 고장훈.
지금부터 전력으로 뛰어야하기 때문에 나보단 고장훈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검은 가방을 받아 메고는 고장훈과 눈을 맞추며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내 지시에 급하게 숨을 고르더니 빠르게 일어서는 고장훈.
사라락―!
앞에 눌어붙어 있던 나뭇잎들이 그의 질주에 자연스럽게 허공을 나풀거렸다.
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고장훈의 뒤를 받치며 하얀색 모닝 쪽을 주시했다.
여전히 우리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모닝에 열심히 화풀이 중인 다수의 좀비들.
몇 중의 추돌사고인지도 모를 만큼 도로를 가득 채운 차량들로 잘 보이지도 않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도서관 정면을 아예 무시하고 비스듬히 흡연 구역을 향해 질주했다.
쐐애애액―!
숨 쉴 시간조차 없이 빠르게 내달리는 내 시야에 포착되는 좀비 한 마리.
2층에서 내버린 좀비 시체를 멍하니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더 빠르게 발을 놀려 고장훈을 추월하며 쇠 파이프를 까닥― 흔들었다.
옥상에서 미리 말을 맞춘 대로 고장훈은 그 뒤에 버려진 사다리를 끌고 올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변 정리.
지금껏 내가 제일 열심히 하고 숙달된 행위였다.
퍼어억―!
자비 없이 좀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쇠 파이프.
그대로 이미 죽어버린 자신들의 동료 위에 쓰러지는 좀비를 일별하며 서둘러 뒤를 응시했다.
얼굴에 가득 찬 땀을 줄줄 흘리면서 이를 악물고 뛰어오는 고장훈.
난 그가 들고 있는 사다리를 이어받아 열려있는 2층 창문 앞에 그대로 세웠다.
그리곤 메고 있던 가방을 다시 고장훈에게 건네곤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
어느덧 하얀색 모닝의 차량 경보음도 멎었는지 아주 조용한 주변.
그래도 지금까지는 옥상에서 계획했던 대로 아주 부드럽게 작전이 이행됐다.
이제 사다리를 타고 우리 둘만 올라가면 아무런 이상 없이 퍼펙트로 끝날 계획.
“끼에에에―”
허나, 꼭 마지막에 이렇게 초를 치려는 새끼들이 있기 마련이다.
도서관 정문에서 빠져나온 건지 어슬렁거리며 흡연 구역으로 걸어오는 좀비.
괴음을 나지막이 흘려대며 흡연구역에 도달한 녀석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고장훈을 보며 포효를 내질렀다.
“끼에에에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