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님들 저 도시 운영 이번이 처음인데 이거 좋은 건가요?(4)
* * *
"아..."
에슐렌 왕비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지나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주 좋은 분위기였다. 딸과 사위는 사이가 좋았고, 그 와중에 젊고 매력적이며 능력 있는 사위가 자신에게 계속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주책 맞게도 그것이 기뻐서 차마 거부하지 않고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거리를 걷던 도중 마주친... 그 정체 불명의 존재와 마주한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여성형 의복 매장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마네킹...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안면 부분이 함몰되어 있다는 것과 붉은 꽃과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한 넝쿨로 이루어진 드레스를 입은 채로 말하며 움직인다는 것. 입도 없는 데 도대체 어디로 말하는 것인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녀의 능력 좋은 사위는 순식간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황금의 왕국, 엘드랜드를 불사지른 라그나 아마게돈의 일곱 괴물 중 하나.
그녀와 남편이 조용히 질투심을 삭히며 부러워했던 그 찬란한 대도시를 하루 아침에 불지옥으로 만든, 라그나 아마게돈이라는 이방인이 불러낸 왕국을 집어 삼킨 괴물들.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와 갑자기 맞닥뜨렸다는 사실에 1차로 패닉이 왔고, 자신의 용감한 사위가 그런 괴물을 상대로 적의를 표출했다는 점에서 2차로 패닉에 빠졌다.
물론 라스 경도 홀몸으로 샴발론 왕국을 위협하던 그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무찌른 전적이 있기야 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묘한 괴리감과 동시에 '예쁘다'라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감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수상한 괴물을 상대로 거리에서 대놓고 검을 뽑는 것은 다소 무모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이 랜드필이라는 도시의 주인이 저 괴물을 사역하고 부린다던 선생이라는 사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물론 그런 걱정과는 별개로, 에슐렌 왕비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자신의 사위를 응원했다. 그래도 홀로 용을 죽인 사내가, 아무리 불길한 외형을 띄고 있다고 해도 드래곤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작고 왜소한 괴물을 상대로 패배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생각은 귀부인을 연상케 하는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나 그 불길한 외형의 괴물을 감쌀 때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위가 결국 검을 뽑아 휘두른 것과 동시에, 귀부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크고 무시무시한 야수로 변모하며 사위의 검을 단숨에 멀리 쳐 날려 보내고 거대한 앞발로 그를 바닥에 찍어 눌렀을 때, 엘리시아 공주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고, 에슐렌 왕비 또한 그보다 더 높은 옥타브의 비명을 마음 속으로 족히 세 번은 내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야수가 흉측한 주둥아리를 벌려, 사위의 머리통을 씹으려던 순간에는 갑자기 자신들에게 들이닥친 예측할 수 없던 불행에 당장이라도 기절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자, 거기까지."
그 순간 한 사내가 나타나며, 그 크고 사나운 늑대는 단숨에 얌전한 양 귀부인으로 돌아갔다. 사위를 구한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며, 에슐렌 왕비는 3차 패닉이 왔다. 그녀와 딸, 그리고 사위를 저 무시무시한 괴물의 습격에서 구한 것은 다름 아닌 그 괴물들을 사육하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던 랜드필의 선생, 라그나 아마게돈이었으니.
"양과 늑대. 얼굴 없는 미녀를 보호하고자 한 네 심정을 이해 못할 것은 없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 허가 없이 누군가를 해치지 않겠다고, 네가 네 입으로 내게 말했던 것을 벌써 잊은 거니?"
"아, 아닙니다. 선생님. 죄, 죄송합니다..."
"무작정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앞으로 행동할 때 한 번만 더 이후의 일을 생각하게 움직이라는 뜻이다."
잠깐의 설교 끝에 그 사내가 두 괴물을 돌려보낸 후에서야 에슐렌 왕비는 저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참고 있던 숨을 다시 쉬기 시작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에슐렌 님. 저희 쪽에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쫄았냐? 그러게 누가 말도 안 하고 겁도 없이 찾아 오래? 꼬우면 공식적으로 방문하시던가 ㅋㅋㅋ'
라는 뜻을 담은 말을 듣게 되었기에, 왕실 사람으로서 익힌 기본 소양 중 하나인 본심 감추기가 없었더라면 진즉에 흉흉할 정도로 얼굴을 찡그릴 만큼 무례한 언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다.
"그럼 에슐렌 왕비님, 그리고 엘리시아 공주님. 제 도시, 랜드필에 방문하신 것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현재 이 도시의 대표자이며, 이곳 주민들에게서 '선생'이라 불리는 라그나 아마게돈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전에 그 무시무시한 괴물을 손쉽게 물리는 모습도 그렇고, 그는 내색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귀족으로서의 기품이 어렴풋이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그녀의 사위인 라스 경처럼 귀족의 예절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의 것이 아닌, 꽤 오랫동안 귀족 세계에 몸을 담았을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이었기에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버려진 자들의 도시를 손에 넣었다는 사내가, 설마 귀족 출신이었을 줄이야.
"아... 자, 잘 부탁... 드려요."
귀족의 예절과 품격이 몸에 완전히 베여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랜드필의 선생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딸의 모습에 왕비는 뒷목이 땡겨 왔다.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인이 외간 남자에게 한 눈을 팔다니!
물론 사위와 떳떳하지 못한 관계인 그녀가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
지저 도시 샴발론의 공주 엘리시아. 자식 사랑이 남다른 두 사람의 아이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자신이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음, 입고 싶은 옷, 그리고 갖고 싶은 물건. 그녀가 원하는 것의 대부분은 그녀의 부모들이 줄 수 있는 것이었고, '가난'과 '굶주림'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다이아몬드 수저였다.
자식을 교육할 때 너무 자식이 바라는 것만 들어주면 세상 일이 전부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막되먹은 성격으로 자라는 경우가 많지만, 샴발론 왕과 에슐렌 왕비에겐 천만 다행히 공주는 선량하고 올바른 여인으로서 훌륭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부족한 것은 있었다.
우선 그녀는 타인과의 경험이 매우 적었다. 과보호하는 부모의 밑에서 자란 그녀의 말 상대는 전속 시녀와 유모 두 사람이 전부였고, 수많은 것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세상은 매우 좁았다. 그랬기에 용을 죽인 용사라는 라스 경은, 그녀가 접할 수 있는 남성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그에게 금방 빠져들었다. 에슐렌 왕비와 샴발론 왕 또한 자국을 위협하는 용을 죽인 영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들의 약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랜드필의 선생은...
'완전 내 스타일...!'
이미 혼인을 약속한 상대보다, 훨씬 더 자신의 취향에 가까운 사내였다.
랜드필의 선생과 용살자 라스 경 중에 누가 더 잘생겼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라스 경을 선택할 것이다.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건강미 넘치는 미남자의 표본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시아는 되려 랜드필의 선생이 풍기는, 짙은 피로가 쌓여 조금 어두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분위기에 묘한 이끌림을 느낀 것이다. 게다가 아직 귀족의 예절을 온전히 익히지 못한 라스 경과 달리, 랜드필의 선생은 당장 사교회에 던져 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예법을 구사했다.
손짓 하나 시선 하나에서 묻어 나오는 그 기품에,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더해지며 여성의 묘한 마음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엘리시아 공주는 전형적인 건강한 기사 타입인 라스 경보단 자신이 즐겨 읽은 소설에서 흑막으로 나올 법한 인상의 라그나 아마게돈에게 흥미가 갔다.
게다가 그는 용을 죽인 것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라스 경과 달리, 랜드필의 선생은 이미 엘드랜드를 속국으로 삼는 것으로서 제 무력을 증명한 데다가 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인 샴발론의 국왕과 같이 일곱 대도시의 대표자 중 하나였다.
완벽한 예법, 강한 힘과 높은 위치까지.
라스 경이 용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에만 해도 그의 약혼을 기쁘게 받아들였던 엘리시아 공주였지만, 그 용살자를 단숨에 때려 눕힌 괴물을 마치 제 수족처럼 부리는 그 모습에서부터 엘리시아 공주의 마음은 그 쪽을 향해 기운 지 오래였다.
"랜드필의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정확히는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 건가요?"
"제가 선생이라 불리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제가 무엇인가를 직접 가르친다는 것보단 저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담은 것에 가깝습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을 사는 것은 쉽지만, 경외심을 받는 것은 그렇지 않다. 하물며 라그나 아마게돈의 호칭은 랜드필이 아직 추방자들과 도망자들이 살던 버려진 도시일 시절에 붙은 호칭이었다. 미래와 희망이 없기에 누군가를 두려워 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내몰린 자들에게서 존중을 받는 자라니, 파면 팔 수록 더욱 신기한 모습이 계속 나오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특히 엘리시아는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엘리시아와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녀가 아닌 그 뒤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녀의 부모인 왕과 왕비가 어떤 사람인지 집중할 뿐이었고, 그녀를 진정한 의미로 제대로 마주 보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공주라는 이유로 상대하기 어려워하고, 거리를 두려하는 그 모습에 순수한 공주는 알게 모르게 작은 섭섭함을 느껴왔다. 허나 랜드필의 선생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녀가 왕족이라며 어려워하지 않았고, 예쁜 여인이라며 헤벌레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잘 모른다며 무시하지 않았다.
랜드필의 사람들을 상대하며 저절로 몸에 밴 습관.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그 모습 그대로만을 받아 들여 주는 태도. 엘리시아가 그토록 바라던 상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제대로 자신을 마주 보며 대화 할 수 있는 사람. 랜드필의 선생은, 그녀가 찾던 사람이었다.
"라그나 씨는 참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그다지 잘 모르겠지만, 엘리시아 양께서 그렇게 느끼신다면 그러신 것이겠죠."
혼절한 라스 경이 의무 시설의 침대에 잠시 누워 있는 사이, 엘리시아 공주는 랜드필의 선생 라그나 아마게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 활기차면서도 다소 소란스러운 태도는 상대하는 입장에서 꽤 귀찮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간단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차분히 해주며, 이따금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며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라스 경은 훌륭한 전사일 지언정 괜찮은 대화 상대라고 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꽤 많았기에, 엘리시아 공주는 랜드필의 선생과 나누는 이 대화가 굉장히 즐겁게 느껴졌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편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만인 것인지.
부모의 사람을 듬뿍 받고 자란 엘리시아 공주였지만, 왕과 왕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녀는 머리가 커가며 점차 자연스레 왕궁의 분위기를 이해했다. 사람들이 공주인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제 속마음을 숨기거나, 혹은 자신에게 실수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알게 모르게 거리를 벌린다는 것.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의 미묘한 신체 변화를 체크함으로서 공주는 마침내 상대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었다.
부모님이나 라스 경조차도 자신을 상대할 때 숨기는 것이 꽤 많았으나, 이 사내는 그러지 않는다. 속에 무언가를 추가로 숨기거나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솔직하고 진실된 태도는, 비록 그의 몸이 라스 경의 육체보다 왜소할지언정 결코 사내로서 부족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자신의 말과 행동의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모습에서 용을 죽인 라스 경에게서조차 보일 수 없는 당당함이 절로 느껴졌다.
그렇게 라그나 아마게돈을 향한 엘리시아 공주의 호감도는 어지간한 주식 그래프 이상으로 급격한 상승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흠, 흠... 공주. 흥미로운 것이 많은 낯선 도시에 와서 들뜬 마음은 이해하나, 그래도 약혼자가 의식이 없는 상태인데 미래를 약조한 사람으로서 그 곁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라스 경은 지룡조차 홀로 죽일 수 있는 강자세요. 그런 분이 잠깐 의식을 잃었다고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제가 아는 한... 라스 경은 제가 그 곁을 지키지 않기를 바랄 거에요. 그는 언제나 남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기에,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결코 주변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그것이 미래를 약조한 사이라면 특히 더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일국의 왕비로서, 샴발론 왕가를 이어 받을 사위의 안위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네요. 용을 쓰러트릴 정도로 훌륭한 사내가 의식을 잃을 정도라면, 그것은 어지간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테니까요."
도중부터 날선 목소리로 누군가를 추궁하듯 말하며 선생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보내는 어머님의 평소 답지 않은 모습에, 엘레시아 공주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도 사위를 유독 아끼는 어머님이시지만, 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독 심하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래를 약조한 상대가 누구인지 오해할 정도로.
게다가 엘리시아 공주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치 못한 자신의 이해자와 만나 대화를 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기에, 타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기 보단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지 증명해야만 한다는 아집에 사로 잡힌 남자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계속 옆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
"라그나 씨는 참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뭐지?
"그렇습니까? 저는 그다지 잘 모르겠지만, 엘리시아 양께서 그렇게 느끼신다면 그러신 것이겠죠."
"경은 참 겸손하시네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있고, 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확고한 확신을 갖고 있어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 것을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있을 거에요."
왜 이 공주님은 자기 약혼자는 병원 침대에 방치한 채, 나한테 진득한 호감을 표출하고 있는 걸까? 만일 이게 미연시 게임이었다면, 화면 인터페이스에 달린 호감도 표시 부분이 분홍색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공주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런 공주의 태도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어머니인 에슐렌 왕비 또한 제 딸이 보이는 뜻 밖의 행보에 꽤 복잡한 심정인 듯 했다.
어머니 쪽은 사위랑 눈이 맞더니, 딸은 약혼자랑 결혼식 치르기도 전에 다른 남자한테 호감을 진득하게 드러내다니. 피는 못 속인다는 뜻인가? 샴발론 왕가의 미래가 참으로 어둡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공주, 잠시 랜드필의 선생과 따로 할 말이 있으니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니면 약혼자인 라스 경이 지금 어떤 상태인이 확인하고 와도 좋고요."
"네, 어머니."
"자, 이쪽으로."
딸의 그 도전 정신이 아주 가득 담긴 과감한 행보를 도저히 더는 못 봐주겠다는 뜻인지, 에슐렌 왕비는 내 팔목을 잡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뒷골목으로 나를 끌고 왔다. 그리고 조금 전의 평온을 가장하던 가면을 완전히 벗고,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라그나 아마게돈. 당신도 알다시피, 제 딸은 미래를 약속한 상대가 있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는 공주님에게 불순한 의도를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런 의도를 품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 없어요. 물론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더 곤란했겠죠. 어찌되었건, 당신이 있음으로서 제 딸은 행복한 미래를 포기하고 한 순간의 불장난에 제 몸을 태우려고 하고 있어요. 당신이 제 딸 아이를 안을 생각이 없다고 한들, 당신이 있음으로서 제 딸과 사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그러니..."
"왜 왕비님께서 그 부분을 걱정하시는 지 전 잘 모르겠군요. 그도 그럴게, 애초에 당신의 사위가 마음에 품고 있는 상대는 엘리시아 공주님이 아니라 에슐렌 왕비님 본인이 아닌가요?"
가만히 듣고 있자니 너무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고 하길래, 심술 궂게 한 마디를 가볍게 찔러 주었다. 다만 나는 그냥 살짝 따끔하게 만들 목적으로 찔렀을 뿐인 그 한 마디에, 에슐렌 왕비가 급소를 제대로 관통 당했을 뿐. 그녀는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더니, 이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한 층 낮추었다.
"...! 당신,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건가요?"
"에슐렌 왕비님. 이 도시엔 제 눈이 아주 많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왕비님과 사위 사이의 추문이 공론화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기껏 도시를 새롭게 바꾸었는데, 타국의 왕족 스캔들이 그 한복판에서 터지면 그 뒷감당이 매우 힘들 테니까요. 그러니 저는 최대한 조용히 이 일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
나는 에슐렌 왕비가 내 말을 잘 이해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럼, 이해 했다는 것으로 알고..."
"제 약점을 잡고, 무엇을 요구할 지 뻔하죠...."
"예?"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 미친. 뭐하는 거야? 갑자기 옷은 왜 벗어?
"제 몸은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하지만 적어도 제 딸은, 그리고 제 사위만큼은 손대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아니, 그게 무슨..."
나는 그녀와 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무언가 오류가 생겼음을 실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이 커지면 나도 곤란하지 최대한 조용히 이 문제를 덮고 싶다는 내 말에 왕비라는 사람이 느닷 없이 제 옷을 벗으며 성적으로 협박 당한 사람들이나 할 법한 간절한 부탁을 할 리가 없으니까.
내 이성은 어서 오해를 풀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이성을 상대로 연전 연승 중이었던 내 본능은 닥치고 저 개쩌는 빨통으로 한 발 뽑으라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오해가 좀..."
하지만 이전에도 먹음직스러운 엘프를 탐냈다가 하마터면 중요한 일을 그르칠 뻔한 전적이 있었기에 나는 오해를 풀려 했고, 우선 제 속살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는 왕비에게 다시 옷을 입히려고 했다.
그러나 왕비는 내 손이 다가오는 것이 자신의 몸을 탐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한 것인지 곧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고.
"힉...!"
겁에 질린 신음과 함께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떤 순간, 그리하여 한 손으로 다 쥐기도 힘들 그 거대한 젖가슴이 자기 나이의 절반에 가까운 아이를 가진 여자의 것이라 믿기지 않을 탄력으로 보잉보잉하고 출렁이는 것을 본 순간, 나는 하반신에 피가 급격하게 쏠리는 것을 체감하며 이번에도 본능의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