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6화 (16/229)

〈 16화 〉 이, 이게 머선129...(5)

* * *

한 번의 정사를 끝낸 후, 난 호크나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단정하게 고쳐주고 팔다리를 붙잡고 있던 구속을 풀었다. 풀어주는 순간에 뺨싸다구를 맞거나 하다못해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호크나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묶여 있던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그녀는 그저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애가 왜 이럴까? 애가 이럴 성격이 아닌데.

"...진짜로, 풀어 줬네?"

...아, 그것 때문이었나? 하긴, 원래 나쁜 놈들은 자기가 유리한 상황에서 한 약속 따위 절대 지키지 않으니까.

나는 원래부터 한 번 내뱉은 말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지 않는 이상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습관은 악당을 연기하는 중인 지금도 버리지 못한 것이고.

그 이전에 그녀를 범한 후 나무에 묶은 상태 그대로 방치해 버이면, 용사 일행에게 발견되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질 게 뻔하잖아. 애초애 용사의 동료인 호크나랑 육체 관계를 맺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갑자기 오해를 사서 공격해오고, 딱 적절한 상황이 받쳐주니까 잠시 성욕에 지배되서 그런 짓을 벌였을 뿐, 처음부터 용사의 동료에게 손을 댈 생각 따위 없었다.

NTR을 극혐한다던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런 짓을 했다가 용사가 나를 쓰러트리는 것을 실패할까봐. 용사라는 게 워낙 마음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소중한 동료들이 적에게 이미 넘어간 상황이라면 멘탈이 흔들릴 수 밖에 없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나랑 관계를 맺었던 용사의 동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공격하는 것을 망설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어쨌든 오늘 일은 용사 일행에게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다. 호크나도 자기가 적이랑 놀아났다는 사실을 굳이 자기 입으로 밝히지는 않을 터. 차라리 약속을 지켜서 그녀 스스로 이 일을 함구하도록 하는 편이 몇 배는 이롭다.

애초에 그녀를 풀어준다고 해도, 그녀는 다시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을 테고. 그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여자가 아니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머리로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려도, 마음으로는 서운함이 느껴진다.

야, 아무리 그래도 한 번 떡친 상대인데 그걸 못 믿어주냐. 물론 약속은 떡치기 전에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못 믿었다는 말을 그렇게 앞에서 대놓고 하면 조금 상처 받는다고.

"뭐?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 줄 알았어? 이거 좀 서운한데..."

"솔직히, 네 쪽에서 그 약속을 진짜로 지킬 이유가 없긴 했으니까..."

아니. 지킬 이유 있는데. 너 그냥 부려두고 갔다가 용사한테 걸리면 좇된다고. 물론 내가 아니라 용사가.

동료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용사가 눈이 돌아가서 나한테 덤볐다가 지면 그대로 세상은 끝이다. 덤벼들지 않더라도 자기가 약해서 동료에게 험한 꼴을 당하게 했다며 마음이 무너져도 세상은 끝.

한 마디로 내가 그녀랑 떡쳤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엄청난 비밀이라고!

....너무 주책인가?

"그러니까 내 말이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한 거잖아? 실제로 내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여자와의 성관계에 한해서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약속은 지켜야지. 그것이 약속이니까, 음!

"어쨌든 팔과 다리는 멀쩡히 움직이지? 약속대로 난 네 동료들에게 손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네 동료 전사를 데려간 놈들에게 용건이 있어서 뒤를 쫓을 생각이야. 나를 쫓아오던, 아니면 네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던 마음대로 해."

"...그럼, 따라 갈거야. 고든을, 동료를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좋을 대로."

"저기, 혹시 나 좀 부축해 줄 수 있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일어날 수가..."

"....."

진짜 가지가지한다. 아니, 얼마나 섹스에 약하면 한 번 사정한 거 가지고 일어나지를 못 해?

나는 머릿속에서 호크나의 섹스 레벨을 마르스 다음 허접으로 측정한 후, 그녀의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그녀를 부축했다. 그런데 왠지 얼굴이 조금 붉고 자꾸 나랑 시선을 마주치지 못 하는 게...

하긴, 적에게 육체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당했는 데 그걸로 느꼈다고 하면 수치스럽긴 하겠다.

여자가 마구잡이로 강간당하면서 기분 좋아하는 건 어디까지나 섹스 판타지. 실제로 강간당하면 그냥 존나 아파서 우는 게 정상이다.

그래. 아픈 게 정상이다. 한 마디로 강간당했는데 아픔이 아니라 쾌락을 느끼는 건 비정상이라는 거지. 호크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어쩌면 지금 당장 자기 혀를 깨물고 자결하지 않은 게 기적일 수도...

나는 그녀를 부축한 채, 고든을 납치한 녀석들이 남긴 흔적을 쫓았다. 평범한 사람 눈에는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다르다.

내게는 놈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훤히 보인다.

어둠은 내 관할 영역이니까.

"...저기, 뭐 하나 불어봐도 돼?"

녀석들이 남긴 흔적을 뒤쫓다보니, 호크나는 내가 아무말 없이 자신을 숲 안쪽으로 데리고 가는 것에 불길함이라도 느낀 것인지 조금 겁먹은 얼굴로 날 올려다 보았다.

"뭔데?"

"그, 저기... 혹시 부족해?"

"엉?"

이건 또 뭔소린가 싶다가, 부끄러워하면서도 아직도 불끈거리는 내 하반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실소를 흘렀다.

"...솔직히 조금 부족한 감이 있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일은 아마 없을 거다."

"내,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 줄 알고?"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에 끌려가서 앞뒤로 존나게 따먹힐 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

경박하기 그지 없는 음담패설에 호크나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금붕어마냥 입만 뻐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홱 돌리며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렇게 까지는 생각 안 했거든."

솔직히 그녀의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해도 할 말이 없다. 한 번 싸운 적 있는 나쁜 놈이 육체 관계를 나눈 후에 약속한 대로 순순히 풀어줬다가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면, 거기에 그렇게 하고도 아직도 하반신이 살아있는 상태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당연하겠지.

솔직히 나쁘지 않은 의견이다. 그녀의 질은 다시 떠올려도 군침이 싹 도는 명기였으니까. 따뜻하고 쫄깃거리는 게, 한 번으로는 부족한 물건이지. 이대로 동료가 달려오지 못할 곳으로 데여가서 만족할 때까지 씨를 뿌리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내가 악역을 연기하는 중이 아니라 진짜 개쓰레기 색골 악당이었다면 말이지.

내가 색골에 나쁜 놈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연극의 흐름을 크게 무너트리지 않는 선에서 맡은 배역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더 나쁜 짓을 하라면 충분히 할 수는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적당히 할 뿐이지.

"음, 도착이다."

나는 호크나를 부축한 채, 오래 전에 주인에게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허름한 집에 도달했다. 버려진 지 족히 10년은 가볍게 넘어보이는 낡아빠진 폐가지만, 놀랍게도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었다. 아마 고든을 납치한 녀석들이겠지.

"이 안에 고든을 납치한 놈들이 있는 거지?"

"그래. 녀석들의 흔적은 여기까지 이어져 있고, 다른 곳에는 없다. 즉, 놈들은 이 안에 있다는 뜻이지."

"좋아. 그럼 바로..."

"미쳤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활과 화살을 꺼내며 안으로 들이닥치려는 그녀를 목 뒷덜미를 잡아 정지시켰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안에 상대가 몇 명이나 있고, 무장 상태가 어떠하며, 잡혀간 인질이 어디에 어떻게 되어 있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지성 돌격이라니,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여행을 해 온 거야?"

"...아, 그렇지. 참,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네."

"하여간에..."

일행 중에서 가장 뛰어난 색적 능력과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료 한 명 사라졌다고 이렇게 사고의 흐름에 떨어지다니.세상에 이렇게나 처리하기 쉬운 상대는 또 없을 것이다.

그냥 눈앞에서 동료 한 명만 사로잡고 인질을 살리고 싶다면 무기랑 옷을 다 버리라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해도 넘어갈 테니.

물론 난 그딴 에로 망가에서나 쓰일 법한 허접한 수를 쓸 생각은 없다. 그런 짓을 벌이면 인질까지 신경써야 하는 데다가 뒷처리가 귀찮다. 차라리 빌미를 잡아서 가끔 원할 때만 가볍게 즐기는 쪽이 들어가는 힘도 적고 편하다.

"이럴 땐 말이지, 이렇게 하면 그만이라고."

따악.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그림자 속에서 검은 덩어리가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그것은 이윽고 쥐의 형상을 이루었다. 물론 그건 쥐가 아니다. 도대체 세상에 어떤 쥐새끼가 온몸에 눈이 달렸겠어?

"그건..."

"방금 막 만든 유사 패밀리어다. 전투 능력은 없고 수명도 굉장히 짧지만, 정찰용으로는 제격이지."

나는 패밀리어를 집 안으러 들여 보내고, 그림자 속에서 다른 것을 꺼냈다. 일종의 거울의 형태를 한 그것에는, 패밀리어가 들어간 집안의 풍경이 비춰졌다.

그 쥐 형태의 패밀리어는 내 힘으로 만든 것이고, 따라서 이런 식으로 그것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 물론 평소에는 사하가 이것보다 몇 배는 더 잘 해내기에 이런 용도로 힘을 쓸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먼저 안쪽의 상황을 충분히 살핀 후에 진입하는 거다. 혹시나 녀석들이 외부인의 접근을 대비해서 함정을 설치해 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

"...흐음."

내가 손에 든 거울을 통해 집안의 풍경을 살피던 호크나는 문득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가슴팍과 하반신을 가리며 내게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음? 왜 그래?"

"너, 너... 그런 걸 쓸 수 있었다면... 혹시 나랑 동료들이 쳐들어 오기 전에 미리 볼 수 있었겠네...?"

"어, 그렇긴 한...데?"

물론 그런 적은 없지만.

"그, 그럼 나랑 애들이 씻는 모습도..."

....이 여자가 미쳤나? 갑자기 누굴 관음종자로 몰아가는 거야? 이게 무슨 엿보기 구멍인 줄 알아?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난 내 능력을 그런 용도로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초에 적의 능력을 탐색하는 데 적합한 이런 능력으로 여자의 알몸이나 엿본다니, 내가 그딴 짓을 할 것 같은가?"

"...변태 취급해서 미안...."

"여자의 몸을 몰래 엿보느니, 차라리 밤에 침실로 부르는 쪽이 훨씬 낫지."

"....역시 변태였잖아! 다가오지마, 이 변태야!"

나는 오해를 풀었을 뿐인데, 호크나는 더욱 경계 태세를 갖추며 내게서 물러났다.

"그래서, 아까부터 대체 왜 몸을 가리는거야? 어차피 이미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말이야."

"#~&@%!?!"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연상의 누님 특유의 포스가 다 깨졌다. 이런 모습을 보여 놓고서 동료를 되찾은 후에 태연스레 원래의 태도를 취하면 인지부조화가 올 것 같다.

이렇게 간정 변화가 한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한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여태까지 그런 침착함을 보여준 건지...

난 영양가 없는 말이나 내뱉는 호크나를 무시하며 손에 든 손거울을 통해 집안을 확인하다, 어떤 광경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빠르게 표정 관리를 했으나, 그녀는 아무리 멘탈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도 그 특유의 빠른 눈은 어디가지 않은 건지 내 표정이 찰나에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설마..."

나는 거울을 등 뒤로 가리며 변명했지만, 말하는 내가 생각해도 티나는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호크나는 대체 무슨 불길한 상상을 한 건지, 재빨리 내게 다가와 내가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내 손의 손거울을 빼앗았다.

그리고 손거울에 비춰진 광경을 본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아."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서 다시 손거울을 가져왔다. 그 행동에 그녀는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춰진 풍경, 즉 내 패밀리어가 본 집안의 상황은... 짐승의 귀와 꼬리가 달린 전라나 다름 없는 행색의 여자여러명이 저항하는 고든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따먹으려는 모습이었다.

...수인 집단 역강간 플레이라니, 거 취향 한 번...

*

"...난 너희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그러니까 어서 날 풀어 줘!"

"흐음..."

고든을 납치한 무리의 우두머리, 검은 털의 수인 여성은 고든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꼈다. 근처에 있던 수컷들 중에서 가장 작절한 녀석을 찾아 기껏 둥지까지 무사히 데려왔건만을, 그가 이런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할 줄은 예상치 못 했기 때문이다.

그녀와 다섯 명의 부하들은 엘헤임 왕국에서 도망친 수인들이었다.

도대체 어떤 씹어 먹어도 모자를 간신배 새끼가 그 상식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계집에게 '수인의 털가죽의 효용성'이라는 말 같지도 않는 이야기를 떠들어 댄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엘헤임 왕국 근처에서 마을을 이루고 조용히 살던 수인들만 큰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일개 부족원인 그녀가 엘헤임 왕국의 군대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보다 어린 부족원 몇 명을 데리고 그곳에서 달아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무리 수인들이 육체 능력이 뛰어난 종족이라고 한들, 소수인 그들이 무장한 대군을 상대로 맞서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자신들을 제외한 부족원은 모두 잡혀가, 그대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다. 그나마 희소식이라고 해봤자, 그 빌어처먹을 간신배 새끼의 말이 제대로 된 근거도 없는 뇌피셜이라는 것이 밝려지면서 엘헤임의 폭군이 그의 목을 뎅겅하고 쳐버린 것 정도 뿐.

이미 부족의 생존자는 자신을 포함한 여섯 명이 고작.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의미한 복수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생존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대에서 부족의 운명이 끝나지 않도록, 후손을 남겨야만 했다.

그들은 군대로부터 달아나다 발견한 버려진 폐가를 터전으로 삼아, 근방을 지나가는 인간들 중에 적절한 대상을 찾아 그에게서 씨앗을 받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하나의 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이 사는 폐가는 헤르몬 왕국에서 라그나 아마게돈의 영지와 바이올렌스가 지배하는 엘헤임 왕국 사이에 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사이에 무슨 일이 오고 갔는지는 당사자들 밖에 모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것에는 거의 방치하다시피했다. 그 탓에 두 사람 사이, 살아남은 수인 무리의 임시 리더 검둥이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길에서 적절한 수컷이 지나기를 계속 기다렸단 것이고.

그리고 오늘, 무려 두 달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그들이 기다리는 길을 이용했다. 그게 바로 용사 일행, 그리고 아마게돈 영지의 주인인 라그나 아마게돈이었다.

아마게돈 남작의 야영지는 너무 수가 많고 경비가 삼엄한 관계로, 수인 무리는 용사 일행의 텐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때 불침번을 서고 있던, 딱 보기에도 튼튼한 수컷을 발견하고선 곧바로 그들의 둥지로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 수컷은 자신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검둥이와 부족원들은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충분히 미인에 속하는 외모였기에, 그녀들은 그가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할 것이라곤 생각 못 했다.

뭐지? 인간 수컷들은 이 정도로 예쁜 암컷이 교미하자고 하면 보통은 기뻐하며 받아들여야 정상이 아닌가?

"나에겐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너희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관계를 거절한 이유가 가관이었다.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 고작 그것으로?

그녀들이 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씨앗이었다.

딱히 이 수컷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족의 대가 끊이지 않기 위해 수컷의 씨앗이 팔요한 것이다.

후손을 낳기 위해 강한 수컷의 씨앗이 필요할 뿐, 상대에게 이 일로 생긴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한 적도 없다. 수컷의 입장에선 그냥 에쁜 여자애들이랑 하루 신나게 즐기고 잊으면 그만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게다가 이건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교접이 아닌, 부족의 존망이 걸린 일. 그녀들에게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검둥이와 부족원들은 그에게 이러한 사정을 모두 설명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서 돌아온 것이라곤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미안하다'는 거절의 한 마디 뿐이였다.

"장래를 약속한 그녀를 두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 수컷을 말로 설득할 순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 수컷을 그냥 보내주면 언제 또 적절한 수컷을 찾을 지 알 수 없다.

결국 검둥이와 부족원들은 수컷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빨강이와 파랑이가 수컷의 두 팔을, 초록이와 노랑이가 두 다리를, 검둥이가 눈과 입을 막았다. 그리고 주황이가 수컷의 하의를 벗기고 생각했던 것보단 작은 그의 양물을 자신의 몸에 넣으려는 그 순간.

벌컥.

"거, 떡을 준대도 싫다는 놈은 내버려두고 나랑 대화 좀 할까? 그 고지식한 녀석이랑은 달리, 나랑은 말이 좀 통할 것 같지 않아?물론, 몸의 대화 말이야."

문이 열리며 그 망할 폭군 계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수컷과, 그 수컷을 어처구니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암컷 하나가 들이닥쳤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