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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129화 (129/131)

〈 129화 〉 무고

* * *

점심의 휴식시간.

특수대의 대원들이 이 요긴한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마침내 예리엘과 화해한 내 경우에는 티아의 간식을 빼앗아먹으며 적당히 노닥거렸다.

혼자만의 집을 되찾게 된 서지유도 은근히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티아픽은 뭐니?"

"오늘은 카페의 클럽 샌드위치랑 아이스티를 마실 거에요."

"컹!"

샌드위치라는 말을 알아듣곤 잔뜩 흥분한 케르.

우리는 협회의 카페로 내려가서 잽싸게 메뉴를 준비했다.

그런데, 평소엔 사무실에서 잘 내려오지 않는 앨리스가 웬 여자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녀의 매니저 내지는 에이전트인가 싶었지만...

그런 것치곤 분위기가 살짝 딱딱하다.

나는 티아를 내버려두곤 앨리스의 테이블로 향했다.

"네가 웬일이래?"

"아, 안녕하세요 특별 수사관님."

앨리스의 동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머리를 짧게 친 여성 헌터.

가슴팍에 윈터킹덤 배지를 달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길드 동료인 모양이다.

원래 헌터들은 배지가 거추장스럽다며 잘 안 달고 다니지만, 윈터킹덤은 1위 길드라서 달고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침 잘 왔네. 법률 상담 중이었는데."

"법률 상담?"

"얘는 내 길드 후배인데, 무고 당했대."

"무고? 없는 죄로 고소를 당했다고?"

앨리스는 아주 정확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의자를 빼줬다.

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그녀의 길드 후배가 아주 신기하다는 눈으로 앨리스를 쳐다봤다.

"... 왜 그래?"

"아뇨, 예리엘 대선배님 상대할 때 말고 이렇게 하시는 거 처음 봐서요."

"엑... 아, 아니거든?"

괜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던 앨리스를 진정시키고, 상황을 좀 들어보기로 했다.

"무고라면... 무슨 혐의로 기소됐던 겁니까? 특수대 설립 전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성 관련 사건 무고였는데, 특수대가 아니라 일반 검찰에서 기소됐어요."

"일반 검찰에서요?"

살짝 의아하지만... 뭐,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특수대가 세워지기 전에도 감옥에 갇힌 헌터 범죄자들이 있지 않던가.

그놈들이 모두 협회를 통해서 기소당했던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검찰은 헌터 관련 사건을 담당할 권한이 없지만, 세상이 어디 원칙적으로 흘러가던가?

특히 성 관련 사건이라면 정치권에서 상당히 좋아하기 때문에 어거지로 맡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앨리스의 후배는 완전한 전투계 헌터라서, 증거물을 조작하거나 할 수 있는 역량도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용히 설명했다.

"제가 예전에 잠깐 사귀었던 남자가 있는데, 이별을 통보하자마자 바로 성폭행으로 고소를 넣더라구요. 그놈과는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그것 참... 대단하군요. 그래서,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설마 경찰에서 무고 혐의 사건으로 전환 안 해줬습니까?"

"아뇨. 그놈 진술도 뒤죽박죽이고, 메신저 앱 내역도 있어서 무고가 인정되긴 했어요."

연예인들 못지 않게, 헌터들도 여론에 상당히 취약한 편이다.

실제로 그녀는 성범죄로 기소를 당한 탓에 상당한 기간 동안 업무에서 배제됐다.

나는 질문거리가 잔뜩 있어보이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윈터킹덤의 유능한 변호사들을 놔두고 제게 질문해주시다니, 영광이군요."

"아, 아니. 그건..."

"야. 우린 가만히 있는데 네가 다가왔잖아."

"아... 그런가? 미안."

나는 앨리스의 딴지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변호사보다 검사에게 물어보는 게 더 확실하긴 하다.

그리고 검사에게 묻는 것보다 판사에게 묻는 게 더 좋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검사가 아니라 특별 수사관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앨리스의 후배라는데 강의 한 번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상대를 재촉하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냈다.

"만약 그놈을 무고죄로 기소해서, 유죄가 인정된다고 치면 형량이 얼마나 나올까요? 성범죄 무고는 제대로 처벌이 안 된다고 들었는데..."

"아. 예전에는 그 말이 맞았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시대가 좀 바뀌었어요."

내 설명에 화색을 띠는 피해자.

하지만 이어진 말에 곧바로 다시 찡그린다.

"성범죄 무고만 제대로 처벌이 안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무고죄 자체가 제대로 처벌이 안 되는 겁니다."

"에엑..."

한 번 무고를 당하게 되면, 피해자의 인생은 끝장나기 직전까지 내몰린다.

반면 그에 대한 처벌은 너무도 가볍다.

앨리스의 후배는 무척 어이없다는 듯 내게 항의했다.

그녀도 아예 예습을 안 하고 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무고죄의 최대 형량은 10년이라고 들었는데요?"

"최대 형량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적용 되는 형량이 중요하죠."

그녀가 말하는 것은 형법상의 이론일 뿐.

실전에서 무고죄의 형량은 최대 4년 정도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보통은 징역 2년 근처에 집유를 곁들여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왜, 왜 그렇게 가벼운 거죠?"

"무고죄를 너무 무겁게 때리면 범죄 신고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럼... 이 사건은 뭔가요? 여기, 무고죄로 징역 8년이 나온 사건도 있잖아요."

오, 이런 사례까지 찾아온 건가?

오늘의 학생은 학습태도가 무척 훌륭하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보여준 인터넷 기사를 살펴봤다.

이건 제법 유명해서 나도 들어본 사건이다.

한 종교인이 피해자의 부인을 꼬드겨서, 가장을 성 범죄자로 만들어버렸던 사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일종의 기적이었죠."

"기적이요?"

"네. 이걸로 징역 8년을 받기가 얼마나 어렵냐면..."

나는 잠시 앨리스의 음료수를 빼앗아마시며 목을 축였다.

피해자는 앨리스가 별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곤 다시 한 번 놀랐다.

"좀 빨리 설명할테니까 잘 들으세요."

"네, 네엣."

"해당 사건은 가해자가 인터넷에 고발문과 동영상을 올리고, 피해자의 미성년자 아들을 세뇌해서 동원하고, 기자회견도 열고, 피해자의 재산을 편취하고, 그게 공중파 방송을 타고 공론화까지 됐던 사례입니다."

앞서 길게 설명했지만, 간단히 말해서 개지랄의 끝판왕 정도 되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피해자가 한 명도 아니고, 가해자의 친정 식구들과 마을 주민들까지 엮여있었던 대형 사건.

그런 짓거리를 하고도 고작 징역 8년... 이라고 볼 수도 있을 지경이다.

"거기에 더해서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기미가 아예 없고,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며 변명만 해대면 징역 8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 오죽했으면 검찰이 구형했던 것보다 판결이 더 세게 나왔다.

피고인은 그 정도로 답이 없었다.

"그리고 해당 사건은 무고죄만 적용된 것도 아녜요. 수십억대 재산 편취가 들어있었으니까요. 정작 무고를 했던 피해자의 부인은 꼴랑 징역 2년 나왔습니다."

"그럼 징역 8년은..."

"피해자의 부인을 부추겼던 종교인이 받은 형량이죠."

징역 8년이라는 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게 된 헌터는 잠시 침묵했다.

무고죄가 이렇게까지 까다로웠을 줄이야.

그런 얼굴의 그녀 앞에서 잽싸게 덧붙였다.

"그래도 일단 기소는 하시죠."

"여, 역시 그럴까요?"

"네. 먼저 기소를 하면 손쉽게 2차 가해가 가능하니까요. 앞서 후배님께서 당하셨던 것처럼요."

"엣..."

현직 특별 수사관이 2차 가해를 운운하자 무슨 함정인가 싶어서 얼어붙는 그녀.

앨리스도 내 실전적인 충고에 감격한 나머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피고소인의 직장에 해당 사실을 은근슬쩍 흘리기만 해도 매우 효과적인..."

"그, 그만! 뭐... 덕분에 대충 감은 잡았지?"

"네. 상담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나머지는 사내 변호사들과 이야기해볼게요."

앨리스의 후배는 고개를 깊게 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배웅해준 나는 뒤늦게 접근한 티아의 샌드위치를 빼앗아먹었다.

"점심 먹은 직후인데 잘도 먹네."

"아앗..."

"그, 그런데... 무고죄 형량, 정말 너무 약한 거 아니야?"

나는 뒤늦게 딴지를 거는 앨리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선 몇 년이 나오든 약하지. 그리고 형이 세다고 딱히 좋은 건 아냐."

"그래?"

실제로 그렇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강대국 중, 무고죄에 대해서 '반좌율'을 적용하는 국가가 있다.

반좌율이 뭐나면... 어떤 사람이 무고를 당한 경우, 무고를 당한 사람이 받아야 했을 형벌을 무고자에게 덮어씌우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보자.

만약 도둑질 무고를 당해서 손을 잘라야 했다면, 허위 신고를 했던 사람의 손을 대신 잘라버리는 것이다.

반좌율은 언뜻 보면 매우 통쾌하고 공평한 방식같다.

그럼, 해당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법률을 존중하고, 또한 신뢰하고 있을까?

글쎄...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법정 형량이 강해도, 수사와 판결이 공평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원래 좀 뒤가 구린 나라들이 형을 대책없이 강하게 때리는 걸 아주 좋아하지. 형이 강하면 그만큼 악용하기 쉽거든."

"그런..."

"결국 해답은 오직 하나야."

빈틈없는 수사와 공정한 처벌.

그 이상의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리스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지난번에도 그런 소리를 했지? 일관성 있는 의견이네."

"그야 진심이니까. 그럼 슬슬 올라갈까?"

"여기 클럽 샌드위치 하나 더 포장해주세요! 빨리요!"

내 말을 들은 티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녀석의 꼬리를 붙잡곤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질질 끌고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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