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인터넷 박제소(3)
* * *
딩동!
밤 11시.
윈터킹덤 길드의 핵심 멤버들 중 한 명인 남자는 무척 불편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윈터킹덤의 무수한 길드원들 중에서도, 본사에 머물 수 있는 멤버들은 극소수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밤 11시에 방문을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희미하게 웃고있는 예리엘을 발견하곤 곧바로 안색을 바꿨다.
"아니 밤 10시가 넘었는데 도대체 누가... 우와앗! 예리엘 선배님?"
"안녕하세요. 잠시 괜찮으신가요?"
"아, 예에. 말씀 주셨으면 제가 직접 찾아뵙는 건데...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상대를 인지한 그는 고객센터의 상담원보다도 공손한 자세로 대꾸했다.
예리엘이 굳이 직접 문을 두드린 것은 그가 거절하는 흉내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내일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냐는 물음에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매니저에게 말할게요. 여보세요, 내일 일정 모두 취소해줘요. 뭐? 사유? 예리엘 프로스트. 오케이."
"우와. 진작 좀 이렇게 할 걸 그랬어요!"
"조용히 있어 제발..."
예리엘과 함께 인사를 다니던 나는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대던 티아를 곧바로 꾸중했다.
"이미지라는 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소모되는 거야. 매번 모습을 드러내면 신선도가 덜해지지. 예리엘이 매번 이렇게 했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선뜻 도와줄 것 같아?"
평소에 이런 부탁을 하지 않을법한 사람이 부탁을 하니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티아도 이번에는 생각이 아예 없진 않았다.
"그래도 예리엘 님이라면 매번 선뜻 도와주지 않을까요?"
"아니, 사실 그렇긴 한데 저 사람들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테니까..."
"아하. 그럼 그냥 그런 걸로 할게요."
사실 이번 건은 나로서도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지난번의 은행강도 사건 때처럼 각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수준이 아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헌터들의 능력을 총동원해서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번 사건은 사회적인 파급력이 너무 강해.'
이걸 가만히 놔두면 금방 유사한 사례가 양산될 수 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르게 진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내 판단이다.
예리엘도 그러한 판단에 기꺼이 동의해줬다.
덕분에, 나는 다음 날 아침 즈음에 윈터킹덤 헌터 드림팀을 빌릴 수 있게 됐다.
비전투계 위주로 뽑긴 했지만... 지금 당장 레이드 한 번 뛸 수 있을 정도.
서지유와 이서우는 그들의 얼굴만 보고 기가 질려버렸다.
"이, 이거 갑자기 예리엘 언니랑 같은 편이라는 게 체감이 되네요."
"지유 씨, 커피."
"네!"
평소와 달리 주저없이 커피심부름을 다녀오는 서지유.
나는 예리엘에게서 자리를 양보받아 모두의 앞에 섰다.
원래 남들 앞에서도 딱히 긴장해본 적은 없는데...
이놈들은 확실히 눈빛이 다르다.
게다가 예리엘의 남편이란 것도 있어서 묘하게 평가를 당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것을 애써 개의치 않으며 주저없이 본론으로 들어났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인터넷 박제소에 대한 이야기, 들어보신 분 계십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높게 치솟는 손들.
덕분에 설명할 수고는 덜었다.
"많군요. 저희는 해당 사이트에서 자칭 처형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짜 그린 더스트를 잡기 위해서 모인 겁니다."
"가짜 그린 더스트라..."
"진짜도 엄청 살벌했는데, 가짜는 더하다니까."
내가 '가짜'라는 단어를 강조하자 묘한 감상을 드러내는 헌터들.
나는 서둘러 유사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짜 그린 더스트는 추정 S랭크에 달하는 그림자 능력자입니다. 그림자를 이용해서 이동과 공격, 방어를 모두 수행할 수 있고 능력 자체도 상당히 강합니다."
"그거 확실한 겁니까? 비전문가가 보기엔 어떤 헌터든 S랭크가 될 수 있으니까요."
"CCTV 판독 결과 부산에서 서울까지 2시간 안에 끊습니다. 오직 능력만 써서요."
"... S랭크 맞네."
그렇다. 가짜 그린 더스트는 이동속도가 시속 160km이상이다.
그것도 2시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 가능!
원래는 지속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았지만 일본 원정을 전후로 노하우를 확립한 모양이다.
아니면 단순히 마력량을 늘렸거나...
어쨌든 이 정도면 S랭크 중에서도 상위권 수준이다.
그림자의 특성상 지형지물을 무시할 수 있으니, 실제로는 그보다 더할 수도 있다.
"밤에는 절대로 못 잡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소견입니다. 그러니 체포 작전은 반드시 낮에 실행합니다."
나는 예리엘과 앨리스의 명함을 빌려서 말했다.
이어서 가장 최근에 업로드된 영상이 공개됐다.
인터넷 박제소 일당은 대담하게도 희생자의 처형 영상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놈은 경찰에게서 그를 납치한 뒤, 외딴 곳으로 이동시켜서 처형했다.
해당 영상은 현역 헌터들도 혀를 내두를만큼 잔혹한 편이었다.
강도살인 혐의에 대한 처형은 양손을 절단한 뒤, 과다출혈로 사망하도록 놔두는 식으로 이뤄졌다.
너무 잔인해서 오히려 인식이 나빠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나...
SNS 등의 반응은 여전히 대체로 호평이었다.
놈의 만행을 지켜보던 헌터들은 저절로 얼굴을 굳혔다.
범죄자 헌터가 이런 식으로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면 다른 헌터들의 평가 또한 도매가로 떨어진다.
윈터킹덤 길드는 단순 사냥 외의 방식으로도 수익을 얻고 있어서 대외적인 이미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저긴... 서울 교외인가?"
"장소만 특정할 수 있으면 제 사이코메트리 능력으로 추적해볼게요."
"음? 잠깐. 저기 창문, 명도 좀 높여주세요.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맞네! 저 지난번에 공략다녀왔을 때 봤던 건물이다!"
"지도에 좀 찍어줘봐. 여긴가?"
우리는 즉시 잠행용 차량을 타고 문제의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거나 할 확률도 있어서 직접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탐색계 헌터가 있어서 손쉽게 조사가 가능했다.
위험천만한 던전에서도 앞장서서 정찰을 하는 헌터들에게 이 정도는 굉장히 쉬웠다.
"피해자 사체 확인 완료. 아주 조각조각 내놓았군요. 바퀴 자국이 밖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저기 CCTV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
"내가 해볼게."
"오오... 뭔가 엄청나게 빠르네요."
티아의 감탄에 어깨를 으쓱하는 헌터들.
내가 괜히 그들의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다.
전자계 헌터는 곧바로 가짜 그린 더스트의 동선을 파악했다.
"북쪽입니다."
"공장은 건드리지 말죠. 안쪽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부비트랩? 설마 살상용인가요?"
"아뇨. 문이 열리면 스마트폰에 전화를 거는 간단한 장치입니다. 그냥 경보용이죠."
나는 정말로 가짜 그린 더스트를 체포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에 가슴이 뛰었다.
놈은 어제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서 한바탕 했다.
아무리 S랭크 헌터라도 마력과 체력을 거의 다 소모했겠지.
분명 멀지않은 곳에서 죽은 듯 휴식을 취하고 있으리라.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는 너무 급했어.'
놈을 조금이라도 빨리 잡기 위해서 자존심과 원칙마저 꺾었다.
못된 장난을 받아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추적을 진행하자...
머지않아 놈의 거처가 드러났다.
녀석은 대담하게도 교외 지역의 버려진 상가에 머물고 있었다.
원래는 수도집중화 현상으로 인해서 나름대로 수요가 있는 지역이었으나...
지난번의 용 군단 침공 때문에 완전히 망했다.
당시에 티아마트의 검은색 머리가 휩쓸고간 자리는 그야말로 폐허나 다름없게 변했다.
그나마 멀쩡한 건물들도 엉망으로 깨지고 그슬려서, 이곳은 여차하면 최전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줬다.
머지않아 놈의 바이크를 발견한 나는 팀원들에게 그것을 지키도록 시켰다.
"일단 교통수단 압수했고..."
"잠깐.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저희들에게 맡겨주시죠."
"아니, 걔 진짜 센데..."
나는 헌터들을 차마 말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데려오느라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게 됐지만...
어차피 앨리스와 예리엘이 대기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게다가 해가 질 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금방 잡아오겠습니다."
헌터들은 대선배님께서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며 의기양양하게 건물로 진입했다.
탐색 능력 위주로 뽑았다곤 하지만, 그들도 현역 헌터들인만큼 나름대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윈터킹덤 길드는 어딘가 모자란 헌터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능숙하게 진입로를 확인하고 돌입하는 인원들은 제법 믿음직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기대감은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치자마자 와장장 깨져버렸다.
"나와라! 그린 더스트!"
"아니, 걔는 가짜라니까요? 그리고 무슨 혐의로 체포하는지, 어떤 권리에 의거해서 체포하는지도..."
"주인님. 쟤들 듣는 체도 안 하네요."
"..."
내가 애꿎은 티아의 꼬리를 마구 잡아당기며 혼내주던 중.
낯선 비명이 건물 안쪽에서 터져나왔다.
제법 격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듯, 이것저것 박살나는 소리도 쉴새없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불과 5분 뒤.
모든 소음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예리엘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그새 길드의 수준이 많이 떨어졌네요. 나중에 대표님께 한 마디 해야겠는 걸요?"
"그러지 마... 언니가 한 소리 하면 길마 언니는 진짜로 운다고."
회중시계를 꺼내던 앨리스가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도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