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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109화 (109/131)

〈 109화 〉 스토킹(2)

* * *

[인간이 밉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직후.

블랑쉬는 난데없이 기겁할만한 소리를 해댔다.

덕분에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아봤구나... 세상엔 모르는 게 더 나은 것도 있다니까?"

[인간들은 왜 그런 걸 만드는 걸까요.]

블랑쉬는 내가 범인을 낚기 위해서 사용했던 혐짤을 굳이 찾아본 것 같았다.

녀석에게 열심히 변명하며 현관에 들어서자 티아가 헛소리를 해댔다.

"조심해! 그런 소리 하다간 너도 살처분 당할지도 몰라."

"어허! 이 녀석이 어디서 인류의 미래 킹갓제네럴블랑쉬님께..."

"에... 에엑? 주인님. 블랑쉬는 뭔가 저랑 취급이 많이 다른 것 같네요?"

"매일 콜라나 낭비하는 너랑 취급이 같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우우..."

쓸데없이 억울해하는 티아를 데리고 저녁 식사를 한 뒤에, 가택수사를 나갔던 팀원들의 보고서를 다시 한 번 확인.

예리엘은 나를 나무라면서도 그것을 훔쳐봤다.

"서방님, 집에서는 푹 쉬셔야 한다니까요?"

"미안해. 금방 끝낼게."

"그나저나 이번 사건은 확실히 흥미롭더라구요."

예리엘도 원격 업무를 통해서 틈틈이 일을 돕고 있는지라 이미 스토킹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녀는 피의자의 자택을 그대로 촬영한 사진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하네요."

"역시 그렇지? 스토커 치곤 너무 깨끗하잖아."

"네. 무엇보다도, 피해자에 대한 사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음?"

나는 전혀 색다른 관점에서의 의견에 무척 당황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예리엘은 사진은 물론이고 문자 기록까지 하나씩 차근차근 짚으며 설명했다.

"분명 피해자가 좋아서 스토킹을 했다는데, 집적거리는 문자 한 번 없었잖아요? 같이 던전 공략까지 했으니 연락처 정도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그런 짓을 하면 증거가 남게 되잖아. 그 정도 정신머리는 있었나보지 뭐."

"그래서 사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단 거예요. 정말로 피해자에게 푹 빠져서 스토킹까지 할 지경이라면,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수 있을 것 같나요?"

"으음..."

듣고 보니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 사리분별이 잘 된다면 애초에 스토킹 따윌 하지 않겠지.

게다가 가해자의 자택에서는 피해자의 사진 한 장 발견되지 않았다.

직접 찍은 도촬 사진이나 영상 따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프로필 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하지만 피해자는 실제로 스토킹을 당했지. 가해자도 그걸 인정했고 말야."

"그렇죠."

"다시 말해서, 스토킹을 하긴 했지만 피해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진 않은 것 같아.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랬겠지."

예리엘이 내 추론에 고개를 끄덕이자 앨리스가 옆에서 화들짝 놀랐다.

"그럼 피해자를 죽이거나 하려고 했다는 소리야?"

"아니, 그럴 확률은 매우 낮아. 가해자는 동종 전과는 물론이고 이종 전과도 아예 없었어. 이번 사건 전까지는 아주 깨끗하고 모범적인 헌터였지."

그리고 보통 살인이나 폭행같은 범죄는 본인보다 더 약해보이는 상대를 대상으로 저지르기 마련이다.

본인보다 훨씬 강력한 전투계 헌터는 썩 적절한 상대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괜히 정말로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나서야 조사에 돌입했던 것이 아니다.

"사진이나 영상 자료 같은 것도 아예 없으니 성 도착증이라고 보긴 힘들지."

"그럼... 도둑질?"

"그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네."

나는 즉석에서 서지유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시를 변경했다.

"지유 씨, 지금 당장 피해자를 조사해줘."

[네에? 가해자 말고 피해자를요?]

"그래, 내 감이 맞다면 그쪽도 뭔가 있어."

[아... 알겠어요.]

피해자가 보내왔던 우편물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스토킹 범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뭔가 이유가 있긴 있는데, 우리에게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이유라는 뜻이다.

블랑쉬를 이용해서 피해자의 스마트폰을 뒤져봤지만 그쪽도 깨끗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요즘 용의자들은 다들 전자기기를 참 깨끗하게 쓴다니까. 일본에서 강의 같은거 하지 말 걸 그랬나?"

"덕분에 범죄율은 좀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글쎄... 일단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사건을 정리해보던 나는 곧바로 수상한 부분을 깨달았다.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군."

"응?"

"피해자와 가해자가 엮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던전 공략부터야. 그 전까지는 아예 접점이 없었어."

"아, 그러고 보니 던전에서의 사건을 계기로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했지?"

피해자와 가해자는 던전 안에서 단둘이 낙오됐다.

이 기록은 공략에 참여했던 다른 멤버들도 검증했으니까 믿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때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것인데...

나는 문득 티아를 돌아보곤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그렇군... 그렇게 된 건가."

"응? 뭐가?"

"이제야 앞뒤가 다 맞아. 이게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쓴웃음을 머금은 채 생각을 정리한 나는 블랑쉬에게 새롭게 명령했다.

"블랑쉬, 이제부터 피해자 하지은 씨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파악해줘."

[진행하겠습니다. 인간이 밉지만요.]

이 녀석이 이렇게 툴툴거리다니.

정말 어지간히도 상처가 된 것 같다.

나는 녀석을 위로해주며 기분좋게 입욕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온 예리엘이 또다시 꽥꽥거리며 고무 오리의 포지션을 차지하려 했다.

"저, 저기..."

"서방님도 가끔씩은 취향을 좀 바꿔보세요. 지금보다 더 좋아질지도 모르잖아요?"

"...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솔직히 등은 나 혼자 씻기도 좀 힘드니까 한 번 져주기로 했다.

나는 목욕 도중 예리엘에게 문득 물었다.

"그런데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빨리도 눈치챘네."

"그야 저도 경험자니까요. 이따가 제가 모아놓은 서방님 사진이랑 기사 스크랩 보실래요?"

"아... 아니."

묘하게 시무룩해진 예리엘과 목욕을 마칠 즈음.

때마침 블랑쉬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스터. 현재 피해자 하지은 씨가 이동 중입니다.]

"어디로?"

[목적지는 아직 불명이지만, 자차를 이용하지 않고, CCTV또한 최대한 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웬일로 마스크까지 썼군요.]

이거다.

나는 확신에 가득차서 다시 웃옷을 걸쳤다.

"요즘 야근도 거의 안 했으니 한 번 가볼까? 목적지는 대충 알 것 같아."

"그게 어딘데?"

"블랙마켓."

"으응?"

앨리스는 살짝 의아해하면서도 냉큼 현관을 나섰다.

예리엘도 오랜만에 현장 동행.

나는 차를 몰고가는 길에 이번 사건의 시나리오를 설명해줬다.

"피해자 하지은 씨와 가해자는 실제로 던전 공략 도중 단둘이 낙오됐어. 하지만 두 사람은 팀원들에게 의도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숨겼지."

"사실을... 숨겨?"

"그래. 두 사람은 낙오 당시에 희귀하고 비싼 헌터 전리품을 발견했던 거야."

"아!"

앨리스도 그제야 감이 잡힌 듯 작게 혀를 찼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의 티아를 위해서 선심쓰듯 설명해줬다.

"보통 전리품을 발견하면, 협회에 그걸 공탁해놓고 공식적인 루트로 판매하게 되지. 분배 비율은 길드와 공략팀에 따라서 다르지만..."

"뭐, 보통 5천 이하는 평등분배가 원칙이야."

나는 앨리스의 해설에 감사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티아는 5천이란 액수에 잔뜩 흥분했다.

"5천만원이면 먹고싶은 건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겠네요! 지난번에 사진으로 봤던 호텔 망고빙수 같은 것도..."

"너 진짜 하루종일 음식 사진만 찾고 다니는 거냐? 뭐...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여기서 간단한 수학을 해보자."

"수, 수학이요?"

보통 던전은 최소 6인 이상으로 공략하니까, 기본 6등분... 이지만 선심써서 5등분.

이 시점에서 벌써 5천이 1천으로 쪼개졌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던전 전리품은 세금이랑 판매 수수료를 상당히 떼니까 거기서 200 더 빼고, 전리품을 얻으면 연금공단에서 특별 연금을 강제로 납부하도록 시키지."

"너, 너무해요!"

그래서 5천짜리 대박 전리품을 운 좋게 주워봤자 결국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은 500~600 정도.

원래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두 사람이 나누면 어떻게 될까?

티아는 그제야 사건의 전개를 대충 짐작했다.

"아하! 그럼 두 사람은 그것을 빼돌린 거군요?"

"그렇지. 둘은 사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니라 공범이었던 거야."

본대에서 낙오된 덕분에 찾아낸 전리품이니, 그것은 마땅히 본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이렇게 전리품을 숨겨두곤, 나중에 어둠의 루트로 처리해버리면 본인들의 손에 떨어지는 금액이 훨씬 커진다.

물론 블랙마켓도 수수료를 엄청 떼가서, 거의 30% 정도는 먹어버리지만...

그렇게 쳐도 70%가 남는 것이다.

이걸 2등분하면 35%.

만약 수십억대의 헌터 전리품을 얻었다고 치면 충분히 밀매를 시도해볼만하다.

다른 팀원들이 현장을 목격했다면 또 몰라.

현장에는 때마침 딱 2명밖에 없었으니, 그야말로 신이 내려준 기회 아니겠는가.

두 사람은 즉석에서 용케 공모하여 전리품을 밀매하기로 했다.

원래는 최대한 빨리 판매와 분배를 진행할 계획이었겠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근데 그걸 왜 이제야 처리한대?"

"그게, 지금까지는 블랙마켓이 제대로 안 돌아갔거든."

"응? 어째서?"

"가짜 그린 더스트. 지난번에 그놈이 블랙마켓 한 곳을 완전히 박살내버려서, 지금까진 다들 몸을 사리고 있었지."

"아앗... 그, 그게 그렇게 이어지는 거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앨리스는 작게 감탄했다.

아까는 나도 참 기가 막혔다.

전리품의 처리가 너무 오래 걸리자, 가해자는 공범이 물건을 독차지하려는 줄 알고 그녀를 스토킹했던 것이다.

애정 목적이 아닌, 금전 목적의 스토킹!

그러니 피해자에 대한 사랑이고 뭐고 느껴질 리가 없었다.

피해자는 그를 떼어내기 위해서 특수대에 도움을 청했지만, 우리가 이렇게까지 깊게 파고들 수 있었으리라곤 짐작하지 못한 것 같다.

여차하면 정말로 전리품을 독차지하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 막 영업을 재개한 블랙마켓으로 내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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