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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100화 (100/131)

〈 100화 〉 출장(1)

* * *

이른 아침.

사무실 출근과 동시에 협회의 회장실로 불려가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협회장도 딱히 나를 부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호출을 거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양반이 나를 부른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지.'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

협회장의 맞은편에 자리잡은 나는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제현 씨. 혹시 국외 출장도 나가줄 수 있나?"

"국외 출장? 갑자기?"

"그래. 일본 헌터 협회에서 헌터 범죄 수사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이 들어왔네."

이것 참, 전혀 예상치 못한 요청이다.

나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일부러 으르렁거렸다.

"협회장님, 요즘 제가 아주 친근하고 편하죠?"

"아, 아니... 요청이 들어와서 전달했을 뿐이라네. 바쁘다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요즘 좀 한가하긴 하다.

블랑쉬의 할당량이 늘어난 이후, 녀석이 전산화로 가능한 거의 모든 업무를 처리해줘서 작업 속도가 대폭 향상된 것이다.

덕분에 팀원들은 이제야 좀 제 시간에 퇴근을 하고있을 정도다.

게다가 출장 목적도 웬일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헌터 범죄 수사에 대한 강의라니.

아마 일본 협회측도 던전의 생성이 급격히 감소되고 있는 경향을 눈치채고 부랴부랴 대비를 갖추려는 것이리라.

이번 제안은 지금껏 내가 해온 일에 대해서 인정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출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며 협회장에게 물었다.

"정말 그것 뿐입니까? 그렇다면 굳이 외국까지 나가고 싶진 않은데요."

"... 사실은 비밀 안건이 하나 더 있지."

아까보다 조금 더 무겁게 운을 뗀 협회장이 진정한 출장 목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티아마트의 초록색 머리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네."

"티아마트의 초록색 머리?"

녀석에 대해선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얀색 머리처럼 예리엘이 직접 찾던 놈은 아니지만...

그놈은 다른 이유 때문에 회사에서 찾고 있었다.

'초록색 머리라면, 블랑쉬의 업그레이드용 파츠잖아?'

블랑쉬와 매튜 마누엘이 요청했던 업그레이드용 파츠 중에서도 최우선 순위다.

만약 블랑쉬가 초록색 머리의 능력을 얻는데에 성공하면, 그 때부터는 나무와 풀, 새와 쥐들도 우리의 귀가 되어줄 것이다.

블랑쉬는 전지전능에 몇 발짝이나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무척 흥분한 애써 그 기색을 감추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지금 나보고 당신들의 첩보원 역할까지 하라는 거야?"

"티아마트의 초록색 머리는 능력의 활용도가 너무 높아. 만약 일본 협회 측에서 녀석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 한국은 헌터 경쟁에서 크게 뒤쳐지게 될지도 몰라."

"웃기는 소리. 예리엘이 있는데 잘도 그러겠다."

이건 무조건 가야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협회장에게 특수 제작된 케이스를 하나 내밀었다.

"일단 이거나 받아."

"음? 이게 뭔가?"

"그린 더스트. 그걸로 헌터용 구속구 좀 더 만들어서 보급해. 앞으로 더 필요할 거야."

"고, 고맙네. 그럼 출장 건은..."

"그건 좀 천천히 생각해볼게. 강의 일정이 언젠데?"

협회장은 내가 선물을 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본 협회측은 다음 주 수요일 정도를 희망하더군."

"그거면 됐어. 용건 더 없지? 나 간다?"

"잠깐! 티아마트의 초록색 머리에 대한 정보는 극비사항이니까 꼭 비밀로 해주게!"

나는 협회장의 애원을 뒤로한 채 회장실을 나가서 점심 식사 약속을 잡았다.

모처럼 예리엘이 동석한 가운데,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티아마트의 초록색 머리가 발견됐어. 나한테까지 부탁하는 거 보니까 확실한 정보같아."

"초록색 머리요? 분명 능력이... 자연 감응이었죠?"

"맞아. 전자계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확실히 커버해줄 수 있는 특급 능력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블랑쉬가 곧바로 메세지를 띄워올렸다.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현재 매튜님께선 제 본체 옆에서 광란의 춤을 추고 계십니다.]

"그런 것까지 알려주지 않아도 돼..."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추는 기쁨의 댄스라니. 별로 보고싶진 않다.

매튜는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직접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총력전이다! 티아마트의 초록색 머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확보해야 해!]

나는 인사 겸 경영 담당인 일레네 윌슨을 찾았다.

"마담, 듣고 있어?"

[말해. 더스트.]

"현재 동원 가능한 모든 인력을 일본으로 보내줘. 수석 에스콰이어는 당연히 포함해야겠지."

[좋아.]

"매튜. 좀 쓸만하겠다 싶은 장비는 모두 보내."

[알겠다. 요청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평소와 달리 협조가 척척 되는 각 분야의 마스터들.

그도 그럴 것이, 오라클의 완성은 우리 모두의 비원이다.

이번에는 예리엘의 힘도 기꺼이 빌릴 생각이다.

다행히 그녀도 출장을 원하는 눈치였다.

"가끔은 가까운 해외도 좋죠."

"고마워. 그럼 다들 출장 준비해."

"잠깐. 그 일본 협회에서 요청했다는 헌터 범죄 수사 강의는 어떻게 할거야?"

"그야 당연히 해야지."

나는 앨리스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원래는 입국 제한인 헌터 협회 관련인사를 자기들 손으로 들여보내주는데, 뭐하러 거절하겠어?"

"아... 둘 다 할 생각이었구나."

"그렇지. 어차피 작전은 밤에 진행될거야."

점심 식사 겸 회의를 마친 뒤, 협회장에게서 자료가 날아왔다.

초록색 머리의 소재지는 다름아닌 도쿄.

이런 곳에 놔두고도 오라클에게 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한 것 같다.

아마 거의 모든 전자 장비들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협회 소속의 헌터들을 써서 일을 진행했으리라.

"역시 아날로그 강국이군. 블랑쉬, 보여?"

[네. 자료를 바탕으로 탈취 작전을 구상하겠습니다.]

"이젠 네가 직접 작전도 세우는 거야?"

[저는 이래봬도 마스터의 제자니까요. 어차피 최종 승인은 마스터의 몫이구요.]

블랑쉬는 '엣헴, 엣헴' 하고 젠체하는 이모티콘까지 사용하며 대꾸했다.

나는 서둘러 출장 준비를 마치곤 다음 주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하여 다음 주.

우리는 윈터킹덤 길드에서 내준 전용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게 됐다.

앨리스와 예리엘은 물론이고, 명목상 통역 역할의 서지유와 티아, 심지어 케르까지 합세한 라인업.

뒤에 두 녀석은 의외로 흔쾌히 허가가 나와서 놀랐다.

아마 일본 협회쪽도 티아에 대해서 여러모로 궁금한 것이리라.

나는 비행기가 착륙하는 김에 생활 범죄 상식을 알려줬다.

"아, 지난번에 겪었던 보험사기 사건 있잖아? 보통 그런 걸 하려면 이런 외국에서 저지르는 게 최고야."

"네... 네에?"

"대부분의 외국은 한국보다 인구밀가 훨씬 낮고, 애초에 관광객은 수사도 많이 껄끄러우니까... 보험 조사관들의 움직임도 많이 제한되고 말야."

"... 보통 그런 걸 이런 타이밍에 가르쳐주는 거야?"

앨리스는 살짝 어이없어했으나, 예리엘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기뻐했다.

"그랬군요. 외국에서 저지르면 사체의 처리도 쉬운 건가요?"

"아, 꼭 그런 건 아니지. 보통 사고가 발생하면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고, 보험사는 반드시 해당 기록을 열람할테니까... 아예 시체가 제대로 발견되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

"그럼 협곡이나 절벽 같은 관광명소에 가는 게 좋겠네요. 아니면 바다라든가..."

"역시 바다가 최고지."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있던 앨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방금 결정했어. 나는 너랑 절대로 바다는 안 갈거야."

"뭐라고? 그럼 수영복 안 보여줄 거야?"

"어림도 없어."

우리가 관광 기분에 취해서 떠들어대고 있자 협회에서 차량이 마중을 나왔다.

나는 몰라도, 예리엘 프로스트를 직접 모시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앨리스는 제법 삼엄한 태세에 살짝 긴장했으나, 내 설명을 듣곤 긴장을 좀 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숙소는 이미 정해놓았어."

"그게 어디인데?"

"우리 회사 도쿄 지부에서 잡아준 호텔."

"아... 역시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대기업이네."

그렇다. 이곳 일본에서도 회사의 서포트를 빵빵하게 받을 수 있다.

사안의 중대함을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보다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태운 차량이 향하게 된 곳에는 벌써 예리엘을 환영하는 인파가 몰려와있었다.

내가 예상했듯, 이번 행사의 주인공은 이미 바뀌었다.

일단 짐을 놔둘 겸 호텔에 방문하자 가장 좋은 객실 안에 이런저런 장비들이 도착해있었다.

첩보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형 카메라나 폭발물 등은 물론이고 내 중장갑 전투복까지.

앨리스와 서지유는 그 목록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거야?"

"이런 걸 잘도 들여왔네요."

"수석 에스콰이어의 능력 덕분이지."

수석 에스콰이어의 헌터 능력은 아공간 수납.

그의 능력이야말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다.

일단 목표를 확보해서 전달만 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우리가 본인의 자매를 사냥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안, 티아는 아까 봤던 자판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주인님, 아까 복숭아맛 콜라가 있던데..."

"그래? 나중에 나갈 때 사줄게."

"우와!"

나는 대충 짐을 내려놓곤 미리 준비해온 강의 대본을 꺼내들었다.

서지유가 옆에서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 저희 첩보작전 하러 온 거 맞죠?"

"강의도, 첩보 작전도 제대로 해낼거야. 긴장 풀어. 너 완전 테러하러 입국한 것 같아."

"테러의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충 맞는 소리 아닌가요?"

"서방님! 이거 보세요. 교복이에요 교복."

우리는 그새 옷을 바꿔입고 나온 예리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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