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보험사기(1)
* * *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아침.
나는 예리엘과 함께 스파링을 했다.
지난번 일 때문인지 살짝 격해진 공방.
이번에는 완전무장 상태인데다...
좋게 말하면 실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치사한 기술들도 틈틈이 동원됐다.
그러나 예리엘은 그것을 여유롭게 받아내다가 끝내 나를 제압했다.
내가 눈찌르기 같은 거 해봤자 그녀의 입장에선 재롱잔치에 불과한 모양이다.
"많이 거칠어지셨네요. 가짜 그린 더스트 때문이신가요?"
"... 그렇지 뭐."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붙었을 때 확실히 제압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물렀다.
예리엘은 슬프게 웃으며 나를 다독여줬다.
"다음엔 그냥 저를 불러주세요."
"아니, 그건 좀..."
"서방님께서 자꾸 고생하시는 걸 보면 아예 특수대에 합류하고 싶어지는 걸요?"
"네가 오면 다들 알아서 자백하거나 도망쳐버릴걸?"
예리엘은 확실히 든든한 우군이지만...
내가 바라는 판례를 쌓기에 좋은 타입은 아니다.
적당히 아침 운동을 끝내고 출근한 나는 영 달갑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됐다.
특수대의 사무실에는 밧줄로 꽁꽁 묶인 헌터 범죄자 2명이 배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양반들은 또 뭐야?"
"수배되어있던 헌터 조폭들입니다. 강도와 협박 전과자들이죠."
"그래? 누가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그, 그게... 이런 게 같이 왔더라구요."
이서우는 [그린 더스트]라고 적힌 자그마한 카드를 내게 건네줬다.
나는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그러니까, 이 범죄자들은 가짜 그린 더스트의 선물인 것이다.
블랙마켓에서 헌터 범죄자들을 무자비하게 몰살시켰던 그였지만, 이 두 놈은 죄질이 너무 하찮아서 굳이 죽여버리기도 뭣했던 모양이다.
"지가 무슨 호랑이 형님도 아니고..."
내가 살짝 어이없어 하고있자 앨리스가 뒤에서 피식 웃었다.
"그놈도 일단 특수대를 지켜보기로 한 거 아니야?"
"도대체 어딜봐서?"
"사실 우리를 엿먹이려면 네 정체를 까발리는 편이 훨씬 쉽잖아. 물론 그래봤자 물증은 없고, 언론도 우리편이지만..."
그렇다.
나를 공격한다는 것은 곧 예리엘 프로스트를 공격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언론들은 멀찍이서 간만 조금씩 보고 있다.
가짜 그린 더스트가 실제로 내 정체를 까발린다 쳐도 큰 효과는 못 볼 것이다.
그래도 나는 괘씸한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나중에 잡히면 명의도용 혐의도 추가해야겠어."
"그게 열받는 거였어?"
"당연하지."
내가 성을 내고있자 냉큼 단백질 쉐이크를 대령하는 서지유.
티아는 본인의 몫을 받아들곤 쾌재를 불렀다.
"후후.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드래곤이에요!"
"컹컹!"
"... 이제 세상에 드래곤이라고 해봤자 너 포함해서 네마리밖에 안 남았잖아?"
"아앗, 너무하셔요!"
티아마트의 검은색 머리와 파란색 머리는 이미 죽은데다, 용 군단의 간부들도 지난번에 다 죽어서 진짜 네마리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이런 얼치기 드래곤이라니.
몬스터들도 이젠 끝장인 것 같다.
아침에 배달온 두 놈을 후딱 처리한 다음, 점심 먹고 참고인 조사를 진행.
오늘은 또 어떤 빌런들이 들어올까 기대하고 있는데... 김정태가 내게 조심스럽게 일을 하나 넘겨줬다.
"지난번에 그런 일도 있었는데, 오늘은 가벼운 걸로 가시죠."
"정태야. 그런 쓸데없는 배려는 필요없다니까..."
나는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자료를 확인했다.
좀 평범한 폭행이나 살인인가 싶었는데, 김정태가 그 정도로 뻔한 사건을 넘겨주진 않았다.
나는 그의 픽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보험사기 의심 사건? 재활운동으론 괜찮네."
"재활?"
"그야 난이도가 낮으니까."
앨리스는 내 설명에 더더욱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설명이 좀 부실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보험사기 사건이라면 척봐도 난해해보이는데, 난이도가 왜 낮아?"
"왜냐면, 보통은 보험 조사관이 알아서 증거를 모아오거든."
"아하."
보험사기 의심 사건에 보험금을 턱턱 내주면 당연히 보험사의 손해가 되니까, 보험사는 조사관들을 시켜서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한다.
보험 조사관들은 전직 경찰 출신이 많아서 상당한 수준의 수사능력을 자랑한다.
개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의료 지식을 지닌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그래봤자 수사권한이 없어서 쩔쩔메긴 하지만, 보통은 상대가 민원 넣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탈탈 털어버린다.
우리 특수대의 입장에선 가만히 있어도 증거가 굴러들어오는 셈이다.
"보험금 내주기 싫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잘 해야지."
"그런 건가..."
잠시 뒤. 내 말대로 자료를 바리바리 싸들고온 보험 조사관이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를 맞은편에 앉히곤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녕하십니까 특별 수사관님."
"어서오세요. 혹시 자동차 보험 관련 건인가요?"
"아뇨. 이번에 문제가 되는 보험은... 이쪽입니다."
전직 경찰 출신답게 보기 좋은 자료를 준비해온 조사관.
그런데, 나는 상품 카탈로그 같은 보험 설명용 자료를 보곤 대뜸 인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헌터 전용 생명보험? 잠깐만, 헌터에게 생명 보험을 팔았다구요?"
뭐지? 보험사가 망하려고 작정한 건가?
무슨 상해보험도 아니고 생명보험이라니?
생명보험은 이름 그대로 피보험자가 죽으면 유족들에게 보험금을 내주게 되는 개념이라서, 경찰이나 소방관 등등 죽음에 가까운 직업들은 가입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하다하다 헌터들에게 생명보험을 팔아먹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헌터들의 사망률은 다른 직종들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원톱이다.
보험 조사관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으며 열심히 설명했다.
"생명보험이라곤 해도순수보장형이 아니라 만기환급형 생명보험입니다. 연금처럼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는 종류죠."
"그런 식으로 헌터들을 꼬드겨놓고, 이제와서 보험금을 내주기 싫다고?"
앨리스가 뒤에서 몇마디 하자 땀을 뻘뻘 흘리는 보험 조사관.
사실 그녀의 말이 크게 틀린 구석도 없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정말 아무 헌터나 가입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일단 현장직들 중에선 치유 능력을 지닌 헌터만 가입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마저도 이런저런 조항이 많이 추가되죠."
역시.
정말로 아무 헌터나 생명보험을 들 수 있었다면 보험사는 진작 파산했으리라.
치유 능력을 지닌 헌터들이라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이다.
대부분 후방에 배치돼서 직접적인 전투에 노출되는 경우가 무척 드물고, 만약 전투상황이 벌어져도 비교적 잘 보호받는다.
전장에서 의무병의 효용성은 이미 몇 번이고 입증됐다.
이런저런 추가 조항이란 것들도 대부분 피보험자에게 불리하게 되어있어서, 전투에서 이탈했을 경우 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식이다.
보험사 정도 되면 자금력도 빵빵하고 법무팀 라인업도 상당할테니 굳이 손해보는 장사를 할 리가 없다.
분명 일반인들보다 훨씬 많은 보험료를 받고 있었으리라.
나는 조금 시큰둥한 기분이 되어서 계속 물었다.
"좋아요. 현역 힐러 헌터에게 생명보험을 팔았군요. 그런데요?"
"이번에 해당 헌터가 던전 공략 도중 사망했는데, 수상한 정황이 있어서요."
"던전 안에서 사망했다면, 사체는 남아있습니까?"
"예. 길드의 동료분들이 시체를 수습했습니다. 이쪽이 부검 결과입니다."
힐러 계열이라면 현장에서의 응급처치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허무하게 죽어버렸다니.
나는 단단히 각오한 채 자료를 속독했다.
사망자는 몬스터의 무기와 발톱, 송곳니로 몇 번이나 공격을 당했다.
개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등 뒤에서 단검으로 찔린 상처였다.
"포위당한 건가... 지독하군."
고작 이 정도로 보험사기를 운운하다니...
아무래도 보상금이 워낙 거액이라서 일단 걸고 넘어져본 것 같다.
만약 보험사가 제대로 지급을 하게 될 경우, 최소 15억 이상의 거액이 나가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보험사 입장에선 주기 싫은 게 당연하다지만... 옆에서 보면 상당히 야속한 감이 있다.
나는 나머지 자료들을 살펴보며 차근차근 반박했다.
"아니, 이 정도론 한참 모자라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맞는지 잘 들어보세요."
"네, 특별 수사관님."
"사망자 송중일 씨는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에 귀사의 헌터 전용 생명보험에 가입했어요.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만기환급형 생명보험이었죠. 수령자는 유가족이구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3년 동안 매달 꼬박꼬박 200만원 이상의 보험료를 지불했어요. 지금까지 납입한 보험료가 근 7천만원이군요."
"... 맞습니다."
보험조사관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것인지 눈치채곤 안색을 굳혔다.
나는 자료를 책상에 탁 내리치며 말했다.
"각이 안 나오잖아요 각이. 한창 잘 벌고있던 A랭크 헌터가 뭐하러 보험사기를 칩니까? 그것도 본인이 직접 가입한 생명보험을 가지고! 보험금도 3년이나 냈는데..."
"아뇨. 제 말은, 길드의 동료들이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보험 조사관은 처음부터 동료들의 범행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망자는 등 뒤에서 찔렸으니 그들을 의심하는 것이다.
게다가 수상한 점은 또 있었다.
"그리고 해당 던전은 공략 영상이 소실됐습니다. 전투 도중 저장 장치가 망가졌다고 하더군요."
"... 그건 확실히 수상하군요."
요즘은 던전을 공략할 때마다 바디캠 같은 것으로 증거를 남겨두는 시대다.
그런데 그런 자료가 완전히 소실되었다면 의도적인 증거인멸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보험 조사관도 아무 근거없이 동료들을 의심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렇지만 수령자는 길드의 동료들이 아니라 유가족이라면서요?"
"그렇습니다. 보험금 목적이 아니라, 단순 불화로 살해했을 수도 있으니, 부디 조사를..."
"아니. 그럼 더더욱 말이 안 되죠. 던전에서 동료를 죽였는데 뭐하러 사체를 수습해줘요? 그냥 버려두고 나오지."
"사체를 버려두고 나오면 더더욱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희 보험 조항에 사체 회수도 포함되어 있어서..."
"세상에. 진짜로 보상금 내주기 싫었군요."
살짝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해봤다.
다른 건 몰라도 공략 녹화본이 소실된 것은 너무나도 의심스럽다.
이 사건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물이 딱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조사관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망자 송중일 씨의 동료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 병원에 입원중입니다."
"뭐, 그렇겠죠. 제가 직접 만나봐야겠네요."
늘 그랬듯, 양쪽의 말을 모두 들어봐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앨리스는 물론이고 티아와 서지유도 냉큼 나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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