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모방범(3)
* * *
블랙마켓으로 쓰이고 있던 상점가에는 코가 비뚤어질 것만 같은 피비린내가 흘렀다.
바닥은 질척질척하고, 곳곳에는 보도블럭 대신 시체들이 쫙 깔려있다.
아무리봐도 감동의 재회를 할만한 장소는 아니다.
사실의 감동의 재회라고 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놈은 멋대로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무기를 땅에 떨궜다.
나도 도저히 칼을 휘두르거나 총을 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네가 왜 여기있어!"
나는 아까 했던 말을 멍하니 되풀이했다.
그러자 녀석이 몹시 횡설수설하면서도 어찌어찌 설명했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저희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그린 더스트가 원수를 갚아준 줄 알았는데..."
"... 사실상 내가 죽인거나 다름없지."
"아닙니다! 이젠 알겠어요."
그렇구나. 녀석도 나에 대한 확신은 없었던 건가?
그래서 아직 내 순서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뒤늦게 납득하며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6년 전, 북두칠성 사건으로 인해서 각성한 것은 나 하나 뿐만이 아니었다.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각성해서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녀석을 칭찬해줄 수 없었다.
"대학에 가라고 학비도 보내놓았더니... 사람이나 죽이고 앉았냐."
"공부 따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저도 팀에 넣어주세요. 저도 헌터들을 심판할 수 있어요!"
녀석은 내게 제법 간절히 말했다.
확실히, S랭크 헌터 정도 되면 굉장한 전력이 되겠지만...
나는 도저히 그를 부려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너희 아버지 앞에서 무슨 말을 들으라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어요.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요."
"..."
내가 심하게 갈등하던 찰나.
녀석이 기가 찬 소리를 해대며 내 마음을 굳혀줬다.
"아저씨가 놈들을 찾아내시면, 제가 죽일게요."
"잠깐, 그 방법은 그만뒀어."
"어째서죠?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한 번 선을 넘어버린 인간말종 놈들은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저도 이 일을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의심해봤지만, 그 때마다 마찬가지였다구요!
"... 그렇구나."
확실히, 한 번 선을 넘어버리면 돌아갈 수 없다.
나는 녀석의 말에 슬프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저, 정말이요? 그럼..."
"너를 대량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머리가 좀 식으면 적당히 꺼내줄테니까, 얌전히 굴어."
"!"
파아앗!
허공을 부유하던 그린 더스트가 다시 발광하기 시작했다.
조명은 여전한데다, 그린 더스트까지 있으니 저쪽은 손발이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자 녀석이 발악하듯 외쳤다.
"웃기지 마! 본인은 마음껏 저질러놓고, 이제와서 착한 체 하겠다고?"
"그 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뿐이야."
"내겐 지금도 마찬가지야! 좋아, 다 필요없어. 이젠 내가 그린 더스트다!"
나는 녀석이 멋대로 지껄이도록 놔두며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사정거리 안에 진입한 우리는 주저없이 권격을 겨뤘다.
마력으로 인한 신체 능력의 강화는 그대로라서, 조건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상대의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내 몸을 비껴나갔다.
퍼억!
"쿨럭!"
녀석의 허리가 꺾인 틈을 타서 주저없이 연타.
신나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놈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체격은 저쪽이 조금 더 좋지만 경험치가 완전히 다르다.
헌터를 상대할 때 쓰는 무술은 일반적인 격투기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게다가 이제는 사정 봐줄 필요도 없다.
나는 로우킥에 대응하기 위해서 한쪽 다리를 든 채로 주먹을 날렸다.
원래는 제대로 위력이 나오지 않아야 하는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다.
"윽!"
눈을 부릅뜨고 있던 놈은 다음 순간, 초약식 그린 버스트에 의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방사능이나 열방출은 거의 없는 대신 섬광 효과만 강화한 변형 기술이었다.
전투 경험이 좀 있는 헌터나 몬스터였다면 내가 팔로 눈을 가리는 것을 보곤 곧바로 반응했을 것이다.
빠악!
잠시 눈이 멀은 나머지 굳어진 놈에게 회심의 발차기가 꽂히자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바닥을 굴렀다.
이대로 체포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잽싸게 수갑을 꺼내드는데...
돌연 놈의 등 뒤에 얇은 와이어 같은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놈은 허공으로 똑바로 치솟았다.
"뭣? 능력은 못 쓸텐데..."
뒤늦게 눈치챘다.
녀석은 블랙마켓에 돌입하기 전, 상점가의 옥상에 장치를 설치해놓은 것이었다.
코스튬의 벨트와 연동된 장치는 전투 불능에 빠진 녀석을 곧바로 탈출시켜줬다.
"어디서 저런 재주까지..."
"으으... 이런 위선자가!"
겨우 몸을 추스른 녀석이 저 멀리서 사납게 짖어댔다.
"그린 더스트의 이름은 내가 받아간다! 앞으로는 내가..."
"야, 내려와!"
놈은 내가 그린 버스트를 준비하자 곧바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림자 이동이라는 사기 능력을 감안하면 이번에 무조건 잡았어야 했는데... 너무 아쉽게 됐다.
나는 말 그대로 땅을 치며 후회했다.
"젠장. 저런 것까지 준비했을 줄이야."
"주인님, 쫓아볼까요?"
"너 S랭크 헌터 따라잡을 수 있어?"
"아뇨..."
결국 만신창이가 된 채 현장을 정리하곤 터덜터덜 귀환.
몸은 멀쩡했지만, 마음은 그 어느때보다도 엉망진창이었다.
블루 라이트닝과 맞붙었을 때에도 이토록 힘들진 않았다.
블랙마켓에서의 참극은 정체불명의 헌터 범죄자의 소행으로 처리됐으나...
알만한 놈들은 모두 그린 더스트의 소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한국에는 달리 그만한 거물이 없는데다, 얼마전에 복귀 신고까지 했으니까.
"특수대 일이 이 정도로 망했던 적이 있던가?"
하다못해 블랙 로터스가 엮였을 때에도 200억 중 160억을 회수하고, 공범들을 잡아들이거나 블루 라이트닝을 처리하는 등. 나름대로의 성과는 거뒀다.
나는 사건이 정리되는 동안 뒤늦게 녀석의 흔적을 훑었다.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훈련만 했군. 이걸 진작 못 알아차리다니..."
"서방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내 잘못이 아니면 누구 잘못인데."
예리엘이 기껏 위로를 해줬건만, 나는 날 선 말투로 화풀이를 하게 됐다.
다행히 그녀는 조금도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을 본 내 기분은 더욱 우울해졌다.
티아와 케르도 쓸데없이 전전긍긍 하고있자 보다못한 앨리스가 나섰다.
"야, 잠깐 나와봐. 언니는 가만히 있고."
"잠깐. 앨리스, 내가 위로해드리고 있는데..."
"어차피 결국 몸이 목적이면서. "
"엑? 아, 아니. 물론 하긴 할거지만..."
물론 하긴 하는 것인가...
예리엘이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긴 한데... 가끔은 센스가 의심된다.
나는 아연실색하며 앨리스를 따라나섰다.
녀석은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타버리더니,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도 없이, 곧바로 차에 탑승하자 앨리스가 능숙하게 운전을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가까운 영화관이었다.
이미 심야라서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하지만 영화의 선택지 자체도 없었다.
앨리스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상영관을 골라서 티켓 2개를 구매했다.
음료수도 팝콘도 없이 그대로 입장해서 착석.
보기보다 자주 와본 듯, 제법 익숙한 태도였다.
녀석이 가끔씩 이렇게 기분전환을 한다는 사실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모처럼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따라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일까?
확실히, 심야의 영화는 머리와 가슴을 비우는 데에 도움이 됐다.
OTT 따위가 발달돼도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과 음향효과는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관에서 나온 앨리스도 나름대로 만족한 듯,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뽑기운이 좋네. 보통은 상영관이 많은 블록버스터 계열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심야에 공포영화는 좀 아니지 않냐..."
"왜, 무서워?"
앨리스는 나를 놀리며 냉큼 손을 잡았다.
제법 반가운 온기와 감촉.
우리는 멀쩡한 차를 놔두고 밤공기를 즐기며 돌아가기로 했다.
그놈의 리본을 모두 떼어놓은 덕에, 앨리스는 평소보다 훨씬 눈에 덜 띄었다.
물론 그래봤자 '평소보다'일 뿐이고... 아무래도 외국계는 한국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지라 커다란 선글라스를 썼다.
분명 어른인데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살짝 우스운 모습.
앨리스는 새벽인데도 영업이 한창인 가게들을 돌아보며 새삼 놀랐다.
"다들 늦게까지도 있네."
"어디 들어가볼까?"
"뭐?"
살짝 당황하는 앨리스를 데리고 느낌이 괜찮은 바로 들어가서 착석.
녀석은 이런 가게에 익숙치 않은 듯 초조한 얼굴이었다.
사실 나도 엄청 익숙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술집이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윈터킹덤 사람들은 회식 같은 걸 자주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 애초에 술도 잘 안 마시고."
"그렇지. 예리엘 언니도, 길드 마스터도 술을 즐기진 않으니까."
그래도 이런 날이 아니면 또 언제 마시겠는가.
가볍게 마시고 들어가자.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문을 하던 중.
카운터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옆에 있던 여자의 잔에다 뭔가를 털어넣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내가 그것을 눈여겨보고 있자, 내 시선을 쫓았던 앨리스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운터석 남자의 팔을 홱 낚아챘다.
"잠깐, 당신 뭐하는 거야?"
"악! 이, 이거 놔!"
남자는 앨리스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작은 손은 보기와는 다르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품 속에 들어있던 약병을 압수하며 그를 윽박질렀다.
"당신 방금 이거 저 여자 술잔에 넣었지?"
"아, 아니. 그게..."
"그래서 뭐 어쩌라구요!"
놀랍게도, 피해자가 될 예정이었던 여자 쪽은 성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두둔하는 것이 아닌가.
앨리스가 무척 당황한 사이, 나는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가만히 놔둬요! 눈치도 없어요?"
"잠깐... 이 여자, 앨리스 윈터잖아? 헌터가 일반인 폭행해도 되는 거에요?"
"내, 내가 언제 폭행을 했다고..."
상대의 신분을 눈치챈 두 사람이 되레 기세등등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앨리스와 같은 헌터들에게 진짜로 맞을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
아무래도 내가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 같다.
카운터석의 남녀는 아예 대놓고 앨리스에게 면박을 줬다.
"모처럼 분위기 좋았는데 다 망치고 지랄이야. 지가 헌터면 다야?"
"아냐. 나는 그냥 도와주려고..."
"신고하기 전에 얼른 가라고! 아니면 뉴스라도 나오고 싶어?"
몬스터라면 그냥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일반인은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앨리스가 울상을 지은 채 전전긍긍하던 찰나.
나는 여자의 머리를 카운터에 처박았다.
그녀가 심하게 꿈틀거리자 남자는 물론이고 앨리스도 크게 당황했다.
"악!"
"어엇!"
"야, 너 지금 뭐..."
"동작 그만. 여기 이거 뭐야?"
나는 그대로 그녀의 팔을 걷어서 팔꿈치 안쪽을 보여줬다.
그곳에는 아주 선명한 주삿자국이 몇 개나 남아있었다.
"그거 마약류지? 대가리에 총맞은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자기 술잔에 약을 넣는데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 그게... 이건..."
남자는 뒤늦게 도주를 시도하다가 앨리스에게 제압당했다.
우리는 그대로 경찰을 부르곤 가게 전체를 샅샅이 수색했다.
다행히 바텐더는 별다른 혐의가 없어보였다.
"조금 이상한 손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줄은... 저희는 절대 그런 가게가 아닙니다!"
"알겠으니까 진정하시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즉시 두 사람을 체포했다.
남자가 휴대하고 있었던 약물은 헌터용 강화제의 일종이었는데, 헌터들에겐 감각을 고양시키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반인들에겐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이런 식의 범죄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건 어디서 새어나갔는지 봐야겠군요. 저희 특수대 쪽에서 보관하겠습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헌터 장비는 원래 특수대 쪽에서 보관하는 것이 맞으니까 문제없습니다."
"하긴..."
경찰들은 우리에게 증거물을 넘겨주곤 범인들을 데려갔다.
주문해놓은 잔만 마시고 가게를 나온 나는 조금이나마 부활한 기분이 됐다.
묘하게 착잡한 얼굴이 된 앨리스가 시무룩한 몸짓으로 나를 따랐다.
"저런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을 보니까 다시 의욕이 나는데?"
"..."
앨리스는 아까전의 폭언에 기분이 몹시 상한 듯 했다.
덕분에 이젠 내가 그녀를 위로해줘야하는 판국이 됐다.
"야, 그 약쟁이 새끼들 말 신경쓰지 마."
"아니... 내가 그 인간들 사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이 무색하도록.
앨리스는 끝없는 자책을 시작했다.
아까전의 말들이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 같다.
"나는 사교성이 나빠. 친구도 없어. 말을 해도 비꼴 줄밖에 몰라..."
"그게 뭐 어때서? 나도 친구 없어."
"..."
"나는 사교성이 나쁜 사람이 좋아. 앨리스 너는 친하게 지내는 헌터가 거의 없으니까, 언제나 수사에 공정하게 임할 수 있지."
"너 지금 그걸 위로라고..."
앨리스가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도, 나는 열심히 그녀를 변호해줬다.
"말을 좀 험하게 해도 괜찮아. 어차피 본심은 착한 거 알아. 말만 번듯하고 정작 행동이 개판인 놈들보단 네가 훨씬 나아."
"... 정말로?"
"오늘 나를 데리고 나와준 것도 너잖아.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아."
"..."
고개를 숙인 채, 한참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는 앨리스.
내 손을 붙잡고 묵묵히 걷던 그녀는 이내 옆길로 새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완력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