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모방범(1)
* * *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향한 현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장은 골목이라곤 해도, 결국은 서울이다.
따라서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현장 통제에 나선 경찰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차단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사건 현장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와 함께 희생자를 목격한 앨리스가 작게 탄식했다.
"와아, 이건..."
사건의 희생자는 골목의 벽면에 기대어있는 자세로 죽어있었다.
우선 가슴을 찔러서 숨통을 끊고, 양손을 나이프로 꿰뚫어서 벽면에 박아넣는 식으로 박제해놓은 것이었다.
놈의 시체 위 벽면에는 녹색 페인트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그린 더스트가 돌아왔다]
조금 올드하지만 나쁘지 않은 센스.
다만 문구는 영 별로다.
"괜찮군. 우선 예술점수 10점."
앨리스는 내가 묘하게 신이 난 것을 보곤 살짝 기겁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아, 미안. 요즘 완전 수준이하의 빌런들만 만나다 보니까 좀 그래서."
"엑? 하긴..."
부하 직원을 혹사시켜서 죽게 만든 하청업체 사장이나, 시청자들을 개돼지로 알던 버튜버 3인방 따위에 비하면 이번 사건의 범인이 예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일명 상대적 선녀 효과라고 해야하나?
게다가 사건의 피해자도 때마침 현상수배범이다.
나는 원래 이 정도 인간 쓰레기들은 좀 죽어도 된다는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김정태는 곧바로 피해자의 프로필을 읊었다.
"전직 A랭크 현상수배범. 민간인 살인 및 성폭행 전과. 빅스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죠."
저런 우스꽝스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은 A랭크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는 뜻이다.
물론 수배자가 된지 좀 됐으니 그동안 기량이 많이 하락했겠지만...
기습을 해도 쉽게 죽일 수 있을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 녀석은 상당한 악질이니까, 나도 주저없이 사냥했을 것이다.
"목표 선정 점수 10점."
나는 피해자의 한쪽 손을 고정하고 있었던 나이프를 뽑아내곤 자세히 살폈다.
손바닥을 관통한 나이프는 벽에 제법 깊게 박혀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던 물건이군."
"H사의 베스트셀러인 모델입니다. 일부러 흔한 것으로 고른 것 같군요."
"그렇겠지."
몬스터들이 설치기 시작한 이후, 일반인들도 이 정도 물건은 종종 구매한다.
물론 실성능은 거의 없지만 부적 내지는 기념품 대신으로 구하는 것이다.
덕분에 이 정도 헌팅 나이프를 취급하는 업체는 아주 흔하다.
"구매 내역을 추적하는 건 소용이 없겠어. 그럼 사체와 현장 분석을 시작할까?"
"예."
케르와 대원들이 현장을 샅샅이 분석하는 사이.
나는 여러가지 장비를 동원해서 피해자의 사체를 살펴봤다.
일단 마력 반응은 없음.
흉기는 나이프로 추정되고,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이 확실하지만... 가슴의 상처가 완전 엉망이다.
"심장을 몇 번이나 칼로 쑤시고 비틀었어. 절대로 프로의 솜씨는 아니야. 첫 살인인 건가?"
"첫 살인이라면... 살인죄를 덮어씌우기 위해서 그린 더스트의 이름을 빌린 것 아닐까? 이놈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을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말야."
앨리스도 이제 그럴싸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게 됐지만... 이번에는 감점이다.
나는 주저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 흔적은 원한 때문에 시체를 손상시켰다기 보단, 확인사살에 가까워. 그리고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 그린 더스트의 이름을 빌리는 건 최악의 선택이야."
"어째서?"
"그야 그린 더스트가 지금껏 한두명을 죽인 게 아니니까."
그린 더스트의 이름을 잘못 빌렸다간 기억에도 없는 범죄를 왕창 뒤집어쓰게 될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이 그 정도로 멍청해보이진 않는다.
그 사이 케르와 대원들은 범인의 도주 경로를 찾아냈다.
"여기서 피해자를 찌르고, CCTV를 파손시킨 다음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옥상으로 가보자. 블랑쉬, 뭐 신경쓰이는 건 없어?"
[주변에 영상 검색 결과 없음... 범인은 이동에 용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나랑 똑같은 능력은 아니네."
그린 더스트는 이동 면에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범인의 예상 도주 경로까지 살펴본 나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는 80점 정도네. 장래가 기대되는데?"
"높은 거야?"
"상당히 높은 거지. 잘 봐. 작전 실행하고 도주까지 5분도 안 걸렸을 거야. 피해자의 동선을 아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거지."
피해자는 별명까지 붙어있었던 A급 현상수배범.
하지만 헌터들간의 전투 치곤 방어흔이 거의 없었다.
놈을 단숨에 해치울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이동 및 기습에 특화된 능력이네. 최소 B랭크 이상. 블랑쉬, 협회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는?"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좋아. 미등록 헌터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너무 기대하진 말자고."
"어째서?"
"상처를 보니까 초보 티가 났어. 몬스터와의 전투경험이라도 있었다면 훨씬 더 깔끔하게 죽였을 거야."
"아하. 그럼 엄청 위험한 거 아닌가? 싹쑤부터 글러먹은 놈이라는 뜻인데."
"글쎄. 일단 잡고 봐야지."
사건 현장에서 더 이상의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우리는 이미 범인의 예상 신상명세를 입수했다.
"키는 180 정도. 체격 좋고, 오른손잡이. 코트의 메이커는 확인됐지?"
"네."
"좋아. 그것도 포함해서 국내에서 일하고 있는 애들한테 뿌려. 특히 블랙마켓을 잘 보라고 그래."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럼 나는 잠깐 위에 좀 다녀올게."
그새 협회장의 호출이 있는 것을 본 나는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이번엔 나 아니야."
"저, 정말로?"
"빅스틸 그 새끼는 잡기만 하면 무조건 실형인데, 뭐하러 죽이겠어? 내가 아니라 모방범이 저지른 짓이야."
"이제와서 모방범이라니."
"내가 인기가 좀 많았잖아. 덕분에 결혼도 하고."
협회장은 마지막 부분을 아주 깔끔하게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잡아주게. 이제와서 특급 헌터 범죄자가 다시 설쳐대는 건 별로 보기 좋지 않을테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건 그렇고, 협회의 연간 던전 할당제는 슬슬 폐지해야지?"
나는 온 김에 하고싶었던 말을 다 해버리기로 했다.
협회 소속의 헌터들은 매년 일정 횟수 이상의 활동을 해야하는데...
이게 이제와선 형평성이 맞지 않는 것이다.
"던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할당량은 그대로니까..."
"이미 진행중이야. 예리엘도 그 이야기를 했지. 정치인들에겐 내가 말할테니 얼른 잡아줘."
"걱정마."
아니나 다를까.
내가 다시 사무실로 내려오자마자 범인의 목격 정보가 들어왔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시리얼킬러 유망주다.
이제와서 활동을 접어버릴 것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모습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CCTV나 블랙박스에 찍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적이 드문 교외 지역에 거주해야 한다.
한국의 수도 집중화 현상은 게이트 사태 발발 이후로 더욱 심화돼서, 그런 곳을 특정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서번트들의 인력과 블랑쉬까지 동원하면 금방이다.
"적당한 곳이네. 인적 드물고, 접근성이 아주 나쁘진 않고..."
"지금 바로 출동합니까?"
"해가 저물면 출발하자. 아무리 그래도 하루만에 또 범행을 저지르진 않겠지."
적당히 낙관한 나는 천천히 준비를 시작했다.
날이 저물자마자 출동한 우리는 범인이 숨어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폐공장을 완전히 포위했다.
장소의 특성상, 회사의 비밀창고가 있는 곳과 그리 멀지도 않았다.
그런데, 혼자 평상복 차림인 앨리스가 가볍게 몸을 풀며 앞으로 나서던 가운데.
돌연 옆으로 빙 돌아가고 있던 케르가 그녀의 앞을 턱 가로막았다.
"컹컹."
"케르? 왜 그래?"
스윽...
케르는 말없이 앞발을 들어서 바닥을 가리켰다.
녀석이 짚어준 곳을 자세히 살펴보자 자그마한 덫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물론 덫이라곤 해도 살상력은 아예 없고, 그저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앨리스가 살짝 어이없어하는 사이. 나는 모두에게 무전으로 알렸다.
"전원 정지.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그럼 어떻게 해?"
"티아, 돌격."
"엥?"
어차피 올가미나 구덩이 수준의 함정이라서 일반인이 밟아도 안 죽는다.
헌터 상대로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도 앨리스에게 시키긴 좀 미안해서, 나는 티아를 동원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목줄을 풀어주자 녀석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주, 주인님? 진짜로 가요?"
"마력 빌려줄게."
"아, 그렇다면야."
잠시 뒤, 몸집이 훨씬 커진 티아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앞으로 돌격했다.
다행히 위험한 함정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녀석은 올가미를 맨몸으로 끊어버리며 공장에 진입했다.
"도착! 협회 특별 수사대다! 모두 손들어!"
티아의 외침은 공장의 안쪽에서 공허하게 울려댈 뿐이었다.
나는 텅 빈 공장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함정 때문에 눈치채고 튀었군. 저렇게 원시적인 함정에 발목잡힐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저희가 완전히 포위했잖아요?"
"헌터 능력을 썼겠지. 공간이동계만 아니면 좋겠네."
범인은 이미 놓친 것 같지만, 성과가 없진 않았다.
공장 내부에는 놈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리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닌 셈이다.
나는 작업대 위에 놓여있는 장비들과 실패작 코스튬 몇 개, 그리고 내 과거의 범행에 대해서 조사해놓은 흔적을 보곤 작게 혀를 찼다.
"이건 좀 부끄러운데..."
"그린 더스트의 팬인 건 확실하네."
"팀장님, 여기 다음 타겟 목록이 있습니다."
"어디?"
헐레벌떡 다가가서 그것을 살펴보자, 미국 드라마식으로 핀과 압정 따위를 이용해서 정리해놓은 칠판이 있었다.
공장의 한켠에는 훈련 기구도 잔뜩 놓여있었는데... 아주 의욕이 가득한 것 같다.
나는 범인의 타겟 목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 어디서 많이 봤던 현상수배범들이다.
"열심히 사는 친구네."
"저, 그런데 팀장님. 여기..."
"응?"
하지만 목록에 기재된 전원이 납득된 것은 아니었다.
범죄자들이 서로 얽히고 섥힌 칠판의 구석.
그들과 많이 색다른 느낌의 인물이 압정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알아보곤 어리둥절한 기분이 됐다.
"잠깐, 내 사진이 왜 여기 있어?"
"..."
기라성 같은 헌터 범죄자들과 현상수배범들이 즐비한 칠판.
가장 위쪽에 박제되어 있는 사진이 바로 내 것이었다.
심지어 그린 더스트 버전도 아니고, 예리엘과 함께 찍힌 사진에서 예리엘만 쏙 빼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채 한참동안 굳어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