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헌터제(2)
* * *
헌터제 당일.
나는 예리엘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축제를 맞이한 거리에는 이런저런 분장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헌터들의 전투복은 물론이고 마녀나 좀비, 치파오, 바니걸, 심지어 경찰복 등등...
도대체 헌터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를 복장들도 잔뜩 있었다.
나는 뒤늦게 헌터제의 정체를 이해했다.
"아하, 이것도 그런 날인가..."
"그런 날이라뇨?"
묘하게 신이 난 예리엘이 조용히 묻자, 나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답했다.
"왜, 이상한 옷 입고 섹스하는 날 있잖아."
"푸흣..."
사람들은 예리엘을 어렵지 않게 알아봤건만, 정작 섣불리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취재를 나온 듯한 기자들도 무슨 위성처럼 멀찍이서 맴돌고 있다.
예리엘은 명백히 주변의 접근을 거부하는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를 방해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아직 대회까진 시간이 좀 있는지라... 우리는 적당히 축제를 돌아보기로 했다.
앨리스와 티아는 회장에서 준비중이고, 서지유도 그쪽에 있기 때문에 지금은 나와 예리엘 단둘이다.
우리는 우선 팝업스토어에 들려서 인파를 좀 피하기로 했다.
윈터킹덤 길드 소속 연예인의 콜라보 카페라는데, 그나마 겉보기엔 평범해서 다행이다.
"아직 날도 안 저물었는데 벌써 이 정도라니... 대회는 저녁에 시작이었지?"
"맞아요.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네요."
"그러게..."
우리는 그 뒤로도 여러모로 궁리했지만, 딱히 필승법이라고 할만한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나마 진지하게 논의된 것이 부정투표인데...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치사해서 패스했다.
"앨리스랑 티아가 잘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냥 제가 SNS에 글이라도 쓸까요?"
"... 너 SNS 계정이 있었어?"
"아뇨. 지금 하나 만들면 되죠 뭐."
나는 예리엘의 제안에 심하게 갈등했지만 장고 끝에 그만뒀다.
"역시 관두자. 네가 글을 쓰면 부정투표랑 다를 게 없어."
"아앗, 너무하셔요."
"예리엘 언니! 세상에, 언제 오셨어요?"
직후, 콜라보 카페의 주인까지 합세해서 투닥거리고 있자...
멀리서 기자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왔다.
예리엘은 사냥 대형을 갖춘 듯한 그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한 명 짚어서 부르는 게 더 낫겠는데요?"
"블랑쉬, 적당한 사람 한 명 추천해줘."
[헌터일보의 사원이 괜찮겠네요. 상당히 균형잡힌 기사를 쓰는 기자입니다. 심하게 과장된 부분도 없구요.]
블랑쉬는 즉석에서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들을 검색하곤 가장 괜찮은 인원을 추천해줬다.
예리엘의 부름을 받게 된 그는 조심스럽게 인사하곤 착석했다.
"모처럼 휴일이신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되도록 빨리 끝내죠."
"아앗, 예. 그럼 부인께 먼저 질문을..."
기자는 미리 준비해온 듯한 질문을 주저없이 꺼내들었다.
그나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예리엘에 대한 질문은 '은퇴 이후에 잘 지내고 있느냐' 수준이었으나, 그의 진짜 목적은 다름아닌 내쪽이었다.
그는 특수대를 예의주시 하고 있었다는 듯. 시작부터 깊이있는 질문을 던졌다.
"남편분께는 가장 먼저 최근 논란이 되고있는 흑마 길드의 과로사 사건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아, 네. 좋죠."
"감사합니다. 이번에 흑마 길드는 소속 헌터들까지 거의 다 처벌을 받게 됐는데, 일각에서는 처벌이 과하거나 부당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
"부당하다라..."
나는 잠시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흑마 길드 소속 여성 헌터들 중 일부가 헌터 자격을 박탈당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은데... 맞나요?"
"바로 그렇습니다."
"해당 절차는 전혀 부당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헌터 자격을 박탈당한 사원들은 전원 던전 공략 횟수 부족으로 처벌을 받은 거니까요."
"던전 공략 횟수 부족이요?"
전혀 상상도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라는 기자.
그가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헌터들은 등급에 따라서 매년 일정 횟수 이상의 던전을 공략해야 하죠. 던전 공략으로 먹고살던 하청 길드 소속 헌터가, 던전 공략 횟수 부족으로 처벌을 받은 겁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아시겠죠?"
원래는 피해자인 하민성 씨가 공략했던 던전을 본인이 공략한 것처럼 해서 할당량을 채웠는데...
수사 과정에서 그 사실이 까발려진 탓에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 외에도 정직 의무 위반, 헌터 협회 보조금 부정수급, 사냥 전리품 횡령... 아직 남은 혐의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진짜 처벌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 그렇군요. 하지만 사소한 범죄에 특수대의 수사력을 너무 소모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수사력 낭비라...
수사에 손 하나 보태주지 않으면서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혀를 차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기자님께선 살면서 사소한 범죄 정도는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아뇨... 그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소하든, 사소하지 않든. 공평하게 수사하는 것이 수사기관의 역할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저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특히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닌 헌터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이쯤에서 인터뷰를 마치곤 커피를 홀짝였다.
콜라보 카페라고 해서 불안했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다.
물론 수사력의 부족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오라클의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그걸 극복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옆에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예리엘은 나를 놀리듯 엷게 웃었다.
나는 괜히 툴툴거리듯 그녀에게 물었다.
"중간부터 내 인터뷰가 되어버렸네. 뭐가 그리 재밌어?"
"아뇨...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서방님은 역시 사람들을 믿고 계시는구나 싶어서요."
"내가 사람들을 믿어?"
"네. 헌터들도 결국 환경에 따라서 교화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으면 이런 일은 못하죠."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살짝 낯뜨거워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예리엘이 들릴 듯 말듯 작게 덧붙였다.
"마치 시체에 주사를 놓고 활력의 징후를 찾는 것 같네요."
"음?"
"아녜요. 슬슬 회장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니.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대회가 진행될 무대로 향했다.
무대의 앞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가득해서 비집고 들어갈 자리조차 찾기 힘들었다.
직원들의 안내를 받은 우리는 겨우 티아와 앨리스가 있는 대기실로 입장할 수 있었다.
"왔어?"
"곧 어필 타임이지?"
서지유에게 화장을 받고있는 앨리스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이미 기도하는 듯한 심정이 되어서 상황을 확인해봤다.
"남성 헌터들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것 맞지?"
"남자들은 표가 많이 분산되어 있어. 대부분 아이돌 타입이지. 원래 이 대회는 여성 헌터들이 강세인 것도 있고."
"그건 다행이네."
하지만 여성 헌터 쪽은 아주 강력한 우승후보가 있다.
이번 대회의 우승후보인 신소이는 큰바다 사건 이후로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원래부터 톱급 배우인만큼 인지도가 압도적이라서 예상 득표율은 30% 이상이다.
앨리스도 나름대로 인기가 있지만, 특정 취향의 투표자들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속성.
그나마 이쪽은 후보 단일화가 상당히 잘 되어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아무래도 앨리스와 이미지가 비슷한 후보는 거의 없는 것이다.
"에이, 뭣하면 그냥 훔쳐오거나 하면 되니까..."
"잘도 그런 소리를 하네."
"주인님.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제 화장을 받을 차례였던 티아가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말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믿어주시면 안 돼요?"
"내가 너를 믿어서 무대에 올려보내는 거잖아."
그렇다. 티아도 이번에 앨리스의 헌터펫 자격으로 함께 무대에 올라간다.
티아마트의 조각이란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단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티아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 듯, 본인의 목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뇨, 이걸 풀어달라구요!"
"뭐야. 너 이제와서 살처분 당하고 싶어?"
"주인님. 지금 제 모습은 마력 부족으로 인한 거에요. 만약 마력이 충분히 공급되면 저도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어요."
"음?"
아, 그러고 보니 자매들 중 티아만 체형이 좀 이상하긴 하다.
검은색 머리도, 블루 라이트닝도 죄다 쭉쭉빵빵한 미녀였는데 얘 혼자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인 것이다.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곤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만약 티아도 그 녀석들과 비슷한 이미지로 변한다면, 신소이의 표를 제법 빼앗을 수 있을지도...'
막말로 나와 예리엘이 무대 뒤에서 도끼눈 뜨고 지켜보고 있을 것인데, 목줄 좀 풀어준다고 얘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예리엘도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는데 한 번 시도해보죠."
"그럴까? 마력은 누가 주고?"
"아무래도 주인님의 마력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것도 나름대로 상성이 있거든요."
"아, 그러셔..."
결국 나는 어필 무대 시작 30분 전이라는 알림에 결단을 내렸다.
티아를 구속하고 있던 목줄을 풀어주고, 한쪽 팔을 내밀자 녀석이 냉큼 내 손가락을 쪽쪽 빨아댔다.
"쭙, 쭈웁..."
상당한 탈력감이 찾아온 직후. 티아의 몸이 급격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앨리스의 키를 넘어서 예리엘과 서지유만큼 성장하는 녀석.
크게 자란 것은 키 뿐만이 아니었다.
쭈우욱...
짧아서 귀엽던 꼬리가 순식간에 길어지고, 있는지 없는지 티도 안 나던 뿔도 제법 우아하게 휘어졌다.
녀석의 의상도 육체의 성장에 맞춰서 변화.
변신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멍한 기분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굴곡을 갖춘 몸은 도저히 전과 동일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 누구세요?"
"후하! 어때요 주인님? 완전 달라졌죠?"
"무대 위에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되겠네요."
앨리스와 서지유도 아연실색한 사이, 예리엘만 태연히 말했다.
확실히 입을 여니까 평소의 티아가 떠올라서 좀 많이 깬다.
녀석은 큰 소리로 웃으며 허리춤에 자신있게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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