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85화 (85/131)

〈 85화 〉 헌터제(1)

* * *

황금같은 토요일 아침.

나는 거실에서 청소기를 둘리고 있었다.

위이이잉!

원래 검사들은 막대한 업무량 때문에 휴일이고 뭐고 없지만 나는 검사가 아니라 특별 수사관이다.

덕분에 이렇게 집안일을 하면서 생색도 낼 수 있다.

"정말, 그런 건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예리엘이 나를 말리는 사이.

소파에 늘어진 앨리스는 청소기가 다가오자 다리만 살짝 들어보였다.

원래부터 인형같은 녀석이었지만 오늘은 더욱 그렇다.

아침부터 늘어진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았지만, 녀석에겐 편히 쉴만한 자격이 있었다.

"요즘 앨리스가 확실히 일을 많이 한단 말이지. 지난번에는 심문도 도와줬어."

"그래요?"

"우리 업무량 너무 많아... 팀원 좀 더 뽑아봐."

"그렇다고 아무나 뽑을 수는 없잖아."

작게 투덜거리며 청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뉴스 채널을 돌려보자... 잠시 뒤 한예진이 아주 자연스럽게 초인종을 누르며 방문했다.

이제 슬슬 다시 그린 더스트를 보급해줘야하는 타이밍인 것이다.

나는 옆에 늘어져있던 앨리스가 호다닥 거리를 벌리자마자 작업을 시작했다.

그 사이, 뉴스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올해의 헌터제도 예정대로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에...]

"헌터제? 아, 이제 슬슬 하는 건가?"

공식적인 헌터 활동 경험이 없는 나도 알고있을만큼 유명한 행사.

지난번에 엮였던 대학교 축제의 헌터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다만 규모는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나는 헌터제에 직접 참여해본 것은 아니라서 새삼 궁금해졌다.

"근데 헌터제에서 보통 뭐해?"

"음? 헌터제, 참여해보신 적 없으셔요?"

"알다시피 내가 좀 바빠서..."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예리엘에게 대답하자 앨리스가 옆에서 태연히 정곡을 찔렀다.

"보나마나 집에서 이상한 피규어 같은 거나 색칠했겠지."

"피규어가 아니라 미니어처 모델이라고!"

"죄, 죄송합니다..."

본인이 그걸 홀라당 태워먹었던 것을 떠올리며 새삼 다시 한 번 사죄하는 한예진.

어느새 케르까지 데리고 올라온 티아가 멀찍이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축제요? 지난번의 그 축제 같은 곳에 또 가는 건가요?"

"헌터제는 정말로 괜찮은 축제에요."

예리엘은 웬일로 티아의 말을 웃어넘기며 내게 설명해줬다.

"일반인들이 헌터 능력을 체험해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각 길드에서 팝업스토어 같은 걸 내기도 하죠."

"오, 재밌겠네. 나는 못 가겠지만."

"... 왜죠?"

얼굴을 조금 굳히며 물어오는 예리엘.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설명했다.

"그야 딱 봐도 헌터 범죄가 엄청 일어나기 쉬운 환경 같은데... 비상대기 해야하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쉬실 수 있겠죠?"

"... 쉴까?"

"네."

띠링!

묘하게 강압적인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블랑쉬는 제법 기다란 목록을 화면에 띄워올렸다.

"아, 또 이건가."

"그건 또 뭔가요?"

"회사의 요청사항... 현상수배 같은 거지."

[황금사자의 털가죽]

[뇌우조의 가면]

[...]

회사에서 보내온 목록은 대부분 희귀한 몬스터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그것도 블랑쉬의 업그레이드에 사용할 수 있는 재료들.

다만 핵심적인 기능을 추가하는데에 쓸 것은 아니고, 단순히 성능을 조금 향상시키는 수준에 불과하다.

만약 오라클의 핵심 기능에 연관이 되어있는 재료라면 진작 수배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대로 목록을 클릭하자 재료에 대한 세부사항이 주루룩 떠올랐다.

재료의 능력과 예정된 사용처는 물론이고, 가장 최근에 발견된 곳까지 모두 기재되어 있는 자료.

나는 그것을 빠르게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우리쪽 할당량을 좀 늘릴 수 있는 재료가 있다면 좋을텐데... 요즘은 블랑쉬도 수사대 일을 꽤 잘 하게 됐으니."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말 그대로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는 블랑쉬.

나는 녀석에게 무어라 하려다 말았다.

그녀는 목록을 멋대로 재정렬시켜서 적절한 재료들만 보여줬다.

[당장 할당량을 늘릴 수 있는 재료는 총 2개입니다. 뇌우조의 가면과 백은랑의 송곳니죠.]

"그 중 한국에서 목격된 물건은?"

[뇌우조의 가면은 약 1개월 전에 한국 소속인 붉은 용 길드에서 입수했습니다.]

붉은 용이라면 나름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형 길드다.

만약 윈터킹덤 길드에서 해당 재료를 입수했다면, 예리엘의 말 한 마디로 가져올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쉽게는 안 풀리는 것 같다.

그래도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어디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쉬를 재촉했다.

"혹시 매각 예정이 되어있나?"

[아뇨. 뇌우조의 가면은 희귀하면서도 강력한 재료라서, 원래 길드 내부에서 소비할 예정이었지만... 협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헌터제의 대회 상품으로 내놓게 됐습니다.]

"헌터제의... 대회 상품이라고?"

저렇게 취급하는 것을 보면 최소 10억대의 재료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대회길래 상품이 10억짜리란 말인가?

내가 아연실색하고있자 앨리스가 옆에서 흠칫거렸다.

"어, 그거 혹시..."

[그렇습니다. 헌터제의 메인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헌터 인기투표입니다.]

"헌터 인기투표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저런 고가의 헌터용 소재를 상품으로 내걸었다면, 당연히 헌터들을 대상으로 한 대회여야 한다.

아니면 우승자가 상품을 수령하지도 못할테니까.

헌터 소재를 다루는 것도 나름대로의 허가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벌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인기투표라... 이건 예리엘이 나가면 끝이네."

"아, 죄송하지만 저는 그 대회에 못 나가요."

"응? 어째서?"

나도 아내를 굳이 그런 대회에 내보내고 싶진 않지만...

이번에는 걸려있는 상품이 너무 크다.

예리엘은 쓰게 웃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헌터 인기투표는 현역 헌터들만 참가할 수 있거든요."

"그, 그럼 잠깐만 은퇴를 번복하면?"

"그것도 안 돼요. 제가 그 대회에서 5년 연속 우승해서, 저는 작년부터 출전금지 당했어요."

"그것 참 납득이 될 수밖에 없는 사유네..."

사실 예리엘이 나간 시점에서 대회고 뭐고 진행이 될 리가 없다.

앨리스는 지난번 대회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작년에는 득표율이 95%를 넘었지. 참고로 2위는 1.6%였어."

어쩐지 상품을 너무 센 걸로 건다 싶더니...

이번 기회에 대회를 한 번 제대로 살려보려는 것 같다.

나는 다급히 차선책을 찾았다.

오라클의 할당량을 늘릴 수 있게 되면 특수대 활동이 굉장히 편해질 것이다.

"예리엘이 출전을 못한다면... 앨리스 너는 안 돼?"

"나? 내가 나간다고 이긴다는 보장도 없잖아?"

앨리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나는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고 봤다.

"아니, 앨리스 너도 인기가 엄청나잖아? 윈터킹덤 길드의 마스코트 취급이니까 말야. 그리고... 그 의상이 있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그 의상?"

"지난번에 보여줬던 '어둠의 마법소녀 앨리스' 의상을 입고 나가면... 그아앗!"

분노한 앨리스는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나를 응징했다.

"내가 미쳤다고 그걸 남들 앞에서 입을 것 같아?"

아쉽지만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블랑쉬도 앨리스 혼자선 승산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제 예측 결과 그 정도론 부족할 것 같습니다.]

"뭣?"

[조금 전에 A랭크 헌터 신소이 씨의 대회 참가 신청을 확인했습니다. 현재로선 그녀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입니다.]

"아... 작년 대회 2위가 바로 신소이 씨였지."

앨리스도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소이라면 확실히 헌터로서도, 배우로서도 급이 굉장히 높은 여자다.

이번 대회에선 예리엘이 출전을 못하게 됐으니 반드시 우승한다는 마인드로 나오겠지.

나는 진심을 듬뿍 담아서 한탄했다.

"신소이 정도 되는 배우가 왜 이런 곳에 나오는 건데..."

"헌터 인기투표에서 우승하면 공짜로 홍보가 되잖아. 게다가 이번에 우승하는 사람은 예리엘 언니의 후계자 비슷한 포지션이 되는 거고."

"그렇게 말하니까 확실히 메리트가 있는 것 같네."

어쨌거나 신소이에게 순순히 우승 상품을 넘겨줄 수는 없다.

우리는 열심히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했다.

"서지유... 는 기껏해야 화장만 도와주는 정도겠지. 대회에는 헌터만 출전할 수 있다니까. 혹시 주변에 아는 헌터 없어?"

"아무리 그래도 신소이만큼 잘 나가는 연예계 헌터는 없지..."

"경쟁자들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앨리스는 특정 취향의 투표자들에게 확실히 어필할 수 있어. 그러니까 신소이의 득표율을 최대한 깎아먹는 거야."

"잠깐, 특정 취향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적당히 소란스러운 회의를 진행하고 있자...

돌연 티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녀석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우리 지금 바쁘니까 콜라는 알아서 꺼내먹어."

"아, 아뇨. 콜라 달라는 소리가 아니라... 혹시 그 대회에 헌터펫은 출전 못하나요 주인님?"

"헌터펫?"

나도, 앨리스도, 심지어 예리엘도 생각지 못한 의견에 당황했다.

블랑쉬는 곧바로 사례를 찾아냈다.

[헌터펫과 함께 대회 무대에 오르는 경우는 적지않게 있습니다. 지난 대회만 봐도 3건 이상 있었군요.]

"그래?"

확실히, 티아도 겉모습만 보면 상당히 괜찮다.

녀석과 앨리스가 손을 잡고 나가면 정말 볼만하겠지.

하지만 앨리스는 대회의 규정을 들먹이며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건 본인 소유의 헌터펫만 가능할텐데?"

"그쪽도 문제없어. 사실 티아는 서류상 네 헌터펫이니까."

"... 뭐라고?"

잘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예리엘은 은퇴 헌터니까 헌터펫 양육 허가가 나올 리 없고, 나는 아예 일반인이라서 마찬가지.

결국 특수대의 유일한 헌터인 앨리스가 티아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서류상으론 그렇게 되어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앨리스가 뒷목을 잡았다.

"설마 그렇게 처리가 됐을 줄은..."

"근데 쟤를 데리고 나간다고 도움이 될까?"

사실 티아도 앨리스와 비슷한 취향에게 어필할 수 있는 외모다.

게다가 녀석은 티아마트의 일부분.

한국은 티아마트의 침공을 받았던 나라인만큼... 잘못하면 오히려 득표율을 깎아먹을 수도 있다.

티아는 그런 내 의견에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주, 주인님. 제가 그래도 여섯 머리들 중 매력 담당인데..."

"너 그 컨셉 언제까지 밀려고 그래?"

"컨셉이 아니에요!"

"멍멍!"

나는 적당히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주말을 보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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