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지하 투기장(4)
* * *
"투기장의 고고한 챔피언, 블루 라이트닝! 그 상대는... 한국 출신의 전 대통령 경호팀장, 사반디!"
짝짝짝짝!
회원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블루 라이트닝의 1회전 상대는 얼마전에 청와대에서 봤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경호 실패의 책임을 지고 대원들과 함께 쫓겨난 경호팀장!
검투사용 가명을 쓰고 있어서 대진표만 봤을 때엔 전혀 못 알아봤다.
'그새 직장을 옮긴 건가? 전직 한 번 빠르군.'
보통 헌터들은 출국이 무척 제한적인데...
벌써 영국에 온 것을 보니 밀입국이라도 해버린 모양이다.
패트릭은 내가 그를 알아보는 것을 눈치채곤 조용히 물었다.
"저 남자를 알고있나?"
"우리 협회 특수 수사관에게 찍혀서 쫓겨난 놈이지."
"특수 수사관이라면... 예리엘 프로스트의 남편?"
"대통령 경호팀장도 쫓아낼 수 있는 건가. 그야말로 실세로군."
내 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낯뜨거웠으나...
다른 회원들도 우리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서,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
나는 그들을 적당히 응대하는 한편, 블루 라이트닝의 실력을 기대했다.
이렇게 대진표를 짜놓았으니 단번에 탈락하진 않겠지.
티아마트의 푸른색 머리는 여섯 머리들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자, 블루 라이트닝은 아주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녀의 상대는 전직 대통령 경호팀장인만큼, 나름대로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경호계획을 짜고 실행하는 솜씨는 형편없었지만 전투력만큼은 A랭크에서도 상위권인 것이다.
그라면 S랭크 헌터를 상대로도 발목 정도는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가 무색하도록, 전 경호팀장은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졌다.
블루 라이트닝은 이름 그대로 푸른 번개가 되어서 비좁은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S랭크 중에서도 가속에 특화된 헌터 수준의 속도.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끝낼 수 있겠지만, 검투사로서의 쇼맨십도 좀 있는 듯,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붙잡힐 것 같은 모습까지 연출하고 있다.
"잡아라! 잡아라!"
"지지마라 한국인! 한 방이라도 먹여봐!"
아래층의 비회원 관중석은 벌써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회원들은 비교적 점잖게 앉아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다들 엉덩이가 반쯤 띄워져있다.
하긴. TV에서나 보던 헌터들이 실제로 능력을 발휘해서 경기를 벌이고 있으니 흥분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푸른 전격은 볼거리로서도 매우 훌륭했다.
"끄아악!"
결국 전직 경호팀장은 경기 시작 50초만에 다운.
관중들은 무척 아쉬워하면서도 다음 선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오늘이야말로 블루 라이트닝의 패배를 볼 수 있을것이라고 기대하는 눈치다.
반면 나는 감이 썩 좋지 않았다.
'엄청 빠르군. 게다가 공격도 강하고 정확해.'
티아마트의 조각은 엄청난 위험요소다.
녀석을 방치해두면 나중에 검은색 머리처럼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일단 한 번 회유해보고, 최악의 경우에는 이곳에서 처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저토록 강하다니.
무엇보다도 인간형으로 변신한 채 싸우는데에 익숙해 보인다는 것이 골치아프다.
'저 체격이 저 속도로 움직이면 답이 안 나오는데?'
이래서야 다른 검투사들이 잘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
나는 다른 회원들과 함께 그들을 응원했다.
그 사이 패트릭은 고민 끝에 맨 뒷순번의 투사가 블루 라이트닝을 이긴다는데에 베팅했다.
"이번에는 승산이 있어! 보통 저런 능력은 체력을 심하게 소모한다니까..."
글쎄.
그건 인간 기준의 이야기고, 쟤는 몬스터로 분류하는 게 맞아서 좀 다르다.
티아마트는 6등분이 돼도 어지간한 레이드 보스보다 강하다.
'푸른색 머리가 가속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저건 다른 머리들과 떨어지게 돼서 오히려 강해진 케이스야.'
블루 라이트닝은 전격 공격을 자랑하며 두 번째 도전자를 때려눕혔다.
이번에는 1분 20초.
아까보다 확연히 느려진 페이스에 모두가 더욱 흥분했다.
원래 타겟이었던 백작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영국 헌터계의 거물일지는 몰라도, 표정 연기에는 영 재능이 없는 양반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3번째 도전자와 4번째 도전자가 동시에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블루 라이트닝은 물론이고 관객들도 살짝 놀랐으나, 진행자 겸 해설자는 무척 뻔뻔했다.
"흔치 않은 이벤트 매치니까 더 화끈하게 가볼까요! 과연 블루 라이트닝은 끝까지 왕좌를 지켜낼 수 있을지..."
당연하지만 블루 라이트닝은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거절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제대로 된 신분조차 없는 그녀는 블랙마켓의 비호를 받아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소 과격하고 치사한 짓을 해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파밧!
또다시 도전자들을 해치운 그녀는 제법 기세좋게 외쳤다.
"더 없나? 어서 덤비라고!"
"이젠 블루 라이트닝도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도전자는..."
"제발, 제바알!"
이미 내게 받은 돈을 전부 베팅한 패트릭이 간절히 기도했다.
나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경기가 끝나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루 라이트닝은 레이드 보스다운 저력을 과시하며 마지막 상대도 힘 들이지 않고 쓰러뜨렸다.
보란듯이 헥헥거리고 있지만, 저것은 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운영측은 블루 라이트닝의 승리를 선언하지 않았다.
"음?"
잠시 뒤, 무대가 다시 열렸을 때엔 그녀에게 패배했던 검투사들이 다시 우르르 올라왔다.
제대로 된 헌터 장비까지 갖춘 그들은 온몸에 살기가 가득했다.
명목상 검투경기라지만 선수들끼리 실제로 죽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백작이 다른 회원들에게 살짝 항의하는 와중, 해설자가 아주 태연히 발표했다.
"운영측의 조사 결과, 블루 라이트닝 선수가 경기 전에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확인되어 경기는 무효가 됐습니다. 베팅액은 모두 환불 처리가 될테니 부디 안심하고 처벌을 지켜봐주십시오."
"처, 처벌?"
"무효라고? 좋았어!"
"역시 더러운 수를 썼던 거였군..."
어떻게든 블루 라이트닝이 패배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관중들은 오히려 환호했다.
나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곤 속으로 혀를 찼다.
블루 라이트닝은 굳이 부정행위를 저지를 필요조차 없을만큼 압도적인 강자인 것이다.
'설마... 운영측이 블루 라이트닝의 정체를 눈치챈 건가!'
원래 녀석이 티아마트의 머리들 중 하나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나...
티아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면서 사정이 좀 바뀌었다.
레이드 보스에서 헌터펫으로 전직한 티아는 SNS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녀석의 유명세 때문에, 검투사 생활을 즐기고 있던 블루 라이트닝도 덩달아서 정체를 들켜버렸다.
블랙마켓의 운영진은 뒤늦게 깨달았다.
블루 라이트닝은 본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회원들이 녀석의 정체를 눈치채게 되면 엄청난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놈들은 너무 늦기 전에 블루 라이트닝을 처분하기로 했다.
연속 경기로 체력을 최대한 깎아내고, 마지막에는 검투사들에게 무기를 들려줘서 마무리.
너무도 노골적인 수법에 블루 라이트닝도 상황을 눈치채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은 아직도 항의하고 있었으나 다른 회원들의 태도는 굳건했다.
블루 라이트닝은 오늘 여기서 죽어야 한다.
"저흰 어떻게 하죠?"
"차라리 잘 됐어. 일단 대기해."
"네!"
놈들이 블루 라이트닝을 처리해준다면 나쁠 것은 없다.
마음이 급해진 백작이 블랙 로터스와의 연결고리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낙관하며 경기장을 내려봤다.
그런데, 큰 소리로 웃은 블루 라이트닝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들킨 건가? 여긴 꽤 마음에 들었는데... 어쩔 수 없지!"
파밧!
첫 경기 때보다도 훨씬 빨라진 번개가 경기장 안에 휘몰아쳤다.
무기를 들고 서있던 검투사들은 순식간에 피륙으로 변해서 허무하게 쓰러져내렸다.
참혹한 유혈사태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관객들.
치이익!
철창 외부에서 가스 같은 것이 분사됐으나, 블루 라이트닝은 순식간에 철창을 찢어버리곤 분사구까지 뭉갰다.
녀석은 급기야 강화유리를 깨부수고 회원 구역까지 침입했다.
쨍그랑!
"무, 물러나십시오!"
피칠갑을 한 블루 라이트닝을 보곤 앞다투어 달려드는 블랙마켓 회원들의 경호원들.
그녀는 손톱을 세워서 놈들 중 대부분을 찢어버렸다.
아무래도 본인을 처분하려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나는 일단 서지유를 데리고 몸을 피했다.
"일단 나가자!"
"나, 나도 데려가!"
패트릭도 서둘러 나를 따라오던 중.
등 뒤에서 백작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S랭크의 경호원을 보유한 그는 다른 회원들보다 조금 더 떳떳했다.
"잠깐 기다려주게. 나는 당신의 아군이니까..."
"시끄러워!"
"커흑?!"
그러나 S랭크의 헌터도 단 1합만에 참살!
블루 라이트닝의 스테미너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면 나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달리는데, 다른 회원들이 입구에 우르르 몰려든 것이 보였다.
"젠장, 다른 입구는 없어?"
"없어요! 입구는 저기 뿐입니다! 에잇..."
"가, 가면 안 돼!"
잠시 패트릭을 붙잡고 묻자 그가 내 손을 뿌리치곤 입구로 호다닥 달렸다.
하지만... 그들의 탈출은 성공하지 못했다.
놈들이 굳게 닫힌 문을 열기도 전에 푸른 번개가 그들을 모조리 분쇄해버린 것이다.
블루 라이트닝은 단 한 놈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와, 이거 완전히 조졌네. 백작도 이미 죽은 것 같은데..."
"히익!"
서지유는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의 다리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제대로 뛰지도 못할 것 같다.
"티, 팀장님? 어떻게... 하죠? 아, 웃..."
"..."
김정태는 차가운 눈으로 서지유를 내려봤다.
여기서 내가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목을 치겠다는 뜻이었다.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서지유가 그것을 목격하게 되면 제법 골치아파진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희생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야, 얘가 죽으면 특수대 일은 누가 하고? 안 그래도 일손 모자라서 죽겠는데..."
"알겠습니다."
"네에? 팀장님, 지금 무슨 이야기를..."
"정태야, 지유 씨 데리고 여기서 나가. 안전한 곳까지 책임지고 모셔놔."
나는 김정태에게 서지유를 맡기곤 녹색의 불씨를 피워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블루 라이트닝이 아주 반갑게 웃었다.
"음? 그린... 그린 더스트? 맞지? 너는 제법 유명해."
"퍼랭아. 나랑 한국 안 갈래? 네 동생도 나랑 같이있어. 황금색 머리인데. 알지?"
티아의 이야기를 꺼내며 설득을 시도해봤지만, 블루 라이트닝은 크게 웃을 뿐이었다.
"뭣? 푸하핫! 그 자식이 너한테 잡힌 거였나? 그렇군. 그래서 이놈들이 내 정체를 눈치채고 처분하려고 한 거였어!"
"걔 요즘 진짜 잘 먹고 잘 지내. 너도 가보면 만족할거야. 어때?"
"뭐... 좀 구미가 당기긴 하는데, 인간들에게 사육당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거든. 이미 인간 사회에 대해서도 배울만큼 배웠고."
사악하고 잔인하게 웃은 푸른색 머리가 내게 손톱을 드러냈다.
녀석의 꼬리가 꼿꼿이 서며, 몸 주변에 푸른 전격이 감돌았다.
"이제 안내인은 필요없어. 괜히 놔뒀다가 추적당해도 곤란하니까 그냥 죽어."
파슷!
정지 상태였던 블루 라이트닝이 순식간에 최고 속도까지 가속했다.
나는 그것을 어렵사리 받아내며 서지유와 김정태가 도망가기 위한 길을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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