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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65화 (65/131)

〈 65화 〉 지하 투기장(3)

* * *

블랙마켓 개최 당일.

우리는 한층 능숙해진 기분으로 회장에 들어섰다.

지하 투기장이라곤 해도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일 뿐, 진짜 지하는 아니다.

실제로는 아주 번듯한 건물을 통째로 빌려서 개최하고 있다.

망해버린 지하 클럽에서 열렸던 다른 블랙마켓들과는 천지차이다.

경비태세도 무척 훌륭해서, 청와대에 보여주고 싶을 정도.

입구에는 비싼 마력 감지기까지 설치되어 있다.

전보다 많이 거리가 좁혀진 서지유는 내게 찰싹 달라붙은 채 감지기를 통과했다.

나도 당연히 통과.

그런데, 우리를 따라서 들어오던 김정태가 통과하자 마력 감지기가 삑삑 울어댔다.

내가 화들짝 놀란 서지유를 안심시키는 사이, 직원들은 멋대로 납득했다.

"경호원입니까?"

"그런데?"

"그럼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헌터들이 싸움까지 벌이는 곳이라서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물론 김정태의 능력이 비교적 단순한 것도 한 몫 했으리라.

서지유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내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낯뜨겁게 애교라도 부리는 줄 알 것이다.

"보안팀장님도 헌터였어요?"

"블러프니까 신경쓸 필요없어. 헌터가 공무원 같은 거 될 수 있겠어?"

"아하."

그대로 서지유의 엉덩이에 손을 대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치솟는 죄책감을 억누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되뇌어야 했다.

'서지유는 비처녀. 서지유는 사기꾼. 서지유는 횡령범... 이런 여자가 처녀일 리가 없지.'

그녀는 그런 내 생각이 무색하도록 자꾸만 움찔거렸다.

그나마 며칠동안 많이 익숙해진 것이 이 정도다.

짧은 치맛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그녀는 살짝 불쌍해보일 정도였다.

다행히 그녀는 좀 익숙치 않아보여도 괜찮았다.

어차피 다른 회원들을 상대하는 역할은 그녀가 아니라 나다.

일반인을 애첩으로 삼아서 데려왔다는 설정이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우리들의 안내역은 다른 회원들의 시선을 과하게 신경쓰며 주춤주춤 따라왔다.

나는 그와 어깨동무를 하며 좋게 타일렀다.

"긴장 풀라니까? 댁은 그냥 신규 회원을 한 명 소개시켜준 것뿐이야."

"저... 정말로 별 일 안 하는 거죠?"

"그것까진 알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그, 그렇긴 하죠."

이래서야 금방 위화감이 보이겠다.

나는 김정태를 불러서 007가방 하나를 그에게 넘겨줬다.

가방의 안에는 현찰이 가득 들어있었다.

"소개료야. 이걸로 좀 즐길 수 있겠지?"

"히야. 바로 따라오시지."

이런 도박 중독자에겐 나름의 이용법이 있는 법이다.

도박 자금을 받아들게 된 그는 주저없이 메소드 연기에 빠져들었다.

먼저 도착해있던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나를 간단히 소개시켜주는 것은 물론, 문제의 지하 투기장도 보여줬다.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이쪽은 나름대로 유명한 모양이다.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지하 투기장만 즐기러 온 손님들도 적지 않다.

"다만 그쪽은 정식 회원도 아니고, 경매에도 참여할 수 없지. 비회원용 관람석은 정말 형편없어."

"그렇군."

확실히 우리가 있는 정회원용 구역은 돈냄새가 풀풀 풍겼다.

우리가 바에 앉아있는 사이, 김정태는 경매를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물건을 맡겼다.

이번 작전을 위해서 특별히 공수해온 미끼.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는 신형 헌터 장비였다.

"오, 패트릭이 웬일로 멀쩡한 회원을 데려온 건가?"

"한국 헌터 협회의 중역이라는데..."

"요즘은 한국산 장비도 괜찮지."

오늘의 안내역은 회원들 사이에서 평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블랙 로터스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회원을 기다리며 천천히 블랙마켓을 둘러봤다.

회원용 구역 아래에는 원형의 투기장이 있었는데, 벌써부터 제법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안내역인 패트릭은 붉어진 눈으로 대진표를 노려봤다.

"오늘도 챔피언이 출전하는 건가..."

"챔피언?"

"여기, 블루 라이트닝. 이놈이 이곳 투기장의 현 챔피언이지. 내가 이놈 경기 역배에 걸었다가 얼마를 잃었는지 몰라."

패트릭은 그렇게 말하며 도박자금을 크게 떼어서 블루 라이트닝에게 베팅했다.

블루 라이트닝은 패트릭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이지만...

그런 그조차 베팅할 수밖에 없을만큼 강력한 투사라는 것이리라.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보곤 피식 웃었다.

블루 라이트닝은 머리를 파랗게 물들인 여자였다.

"뿔이 달려있네?"

"으응? 그렇지. 헌터들 사이에서 이 정도는 흔하다니까 뭐..."

"그런가?"

'이거 아무리 봐도 티아 친구인데?'

서지유도 그렇게 생각한 듯, 옆에서 눈을 파르르 떨었다.

티아마트의 여섯 머리들 중 하나!

물론 티아보다 나이는 훨씬 많아보이지만, 티아마트 특유의 야생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만 티아쪽은 그런 분위기가 많이 희석돼서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티아마트... 이런 곳에 있었다니.'

만약 블루 라이트닝이 티아마트의 머리들 중 하나라면 블랙 로터스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 녀석은 S랭크 헌터 같은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다.

내가 변장용으로 착용하고 있었던 안경에 블랑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스마트폰은 입구에서 압수당했지만 이건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다.

[타겟의 메신저 기록에서 블루 라이트닝을 암시하는 대목을 확인했습니다.]

'예상이 맞았군.'

이곳의 회원들이 녀석을 못 알아보는 것이 좀 우습기도 했으나...

잘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인류는 아직 티아마트의 머리들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 머리의 경우에는 인간형으로 목격된 적이 거의 없고, 티아도 최근에야 포획됐다.

설마 티아마트의 머리들 중 하나가 인간 세상에 깊게 숨어들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우리가 살짝 당황하고 있자 마침내 오늘의 타겟이 입장했다.

콧수염을 살짝 기른 중년의 남성은 다른 회원들보다 명백히 급이 높아보였다.

마켓 밖에서 급습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차라리 이곳을 노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느꼈을만큼 삼엄한 경계태세.

그의 호위들 중에는 S랭크 상당으로 보이는 헌터도 있었다.

저 정도 즈음 되면 내가 기습을 해도 깔끔하게 제압하기 힘들다.

"저 양반이..."

"그, 그래. 너희가 만나게 해달라고 했던 제임스 콜리스야. 여기선 주로 백작이라고 부르지."

패트릭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확인해줬다.

오늘의 목표는 저놈에게서 어떻게든 블랙 로터스의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다.

S랭크 헌터가 호위로 붙어있으니, 힘으로 덮치는 것은 최후의 방법이다.

그런데 백작은 다른 회원들과 길게 어울리지도 않고 곧장 내실로 향했다.

나는 몇몇 회원들이 백작을 따라가는 것을 보곤 패트릭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거야?"

"아무래도 중요한 회의를 하러 가는 것 같은데..."

"우리가 끼어들 수는 없나?"

"안 돼. 블랙마켓 운영회의는 정회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들어갈 수 있어."

하긴. 패트릭이 그 정도의 중역으로 보이진 않는다.

미리 예상했던 대답에 한숨을 내쉬자 패트릭이 뒤늦게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회의의 내용은 곧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운영 회의가 끝나면 결정사항을 발표하니까."

"좋아. 그나마 다행이네."

우리는 지하 투기장의 대진표와 경매장 출품 목록을 살펴보는 체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틈틈이 서지유를 괴롭혀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블랙마켓 운영회의에 참여했던 인원들은 오래지 않아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나는 백작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짓고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회의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뭐지? 자기 뜻대로 안 된 건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해서 헤메고 있던 중.

핵심 회원들 중 한 명이 회의의 결정사항을 발표했다.

"갑작스럽게 알리게 되어 죄송하지만, 오늘의 대진표가 크게 변경되었습니다."

"뭣?"

"이미 베팅까지 했는데..."

"물론 베팅된 금액은 완전히 돌려드리겠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께서 변경된 대진표를 보시면 이해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촤라락.

이윽고 그것이 공개되자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새로운 대진표는 일단 형태부터 좀 말이 안 됐던 것이다.

언뜻 보면 토너먼트 식인가 싶었지만... 사다리가 이상하게 그려져있다.

1경기에 블루 라이트닝이 출전하는데, 2경기에도 블루 라이트닝이 출전한다.

3경기와 4경기도 마찬가지.

즉, 이건 현 챔피언인 블루 라이트닝이 연속해서 덤벼드는 도전자들을 쓰러뜨리는 식의 경기다.

해설자는 사뭇 자랑스럽게 그것을 설명했다.

"블루 라이트닝은 지금까지 모든 관람객들에게 사랑받는 선수였습니다. 문제는 블루 라이트닝이 너무 강한 나머지 베팅이 다소 무의미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녀의 배당 비율은 오래 전부터 1.1배를 넘지 못하게 됐죠."

이건 좀 심각하긴 하다.

참고로 러시아 월드컵 당시 한국 vs 독일전의 독일측 배당 비율이 1.14배였다.

"우리는 이 대진표를 통해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녀에게도 새로운 도전을 시켜주려고 합니다. 늘 그녀에게 베팅하시던 분들에겐 이젠 좀 더 까다로운 선택이 필요하게 될 겁니다."

짝짝짝짝!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박수소리가 나왔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운영회의의 결과를 반기고 있었다.

다만 백작은 여전히 영 탐탁찮은 얼굴이다.

'계획이 꼬인 건가? 일단은 지켜봐야겠어.'

나도 일단 경기를 지켜보자고 마음먹던 중.

블루 라이트닝 측이 새로운 대진표를 승낙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회원들이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이쪽을 향해서 손을 흔들어보이는 그녀는 아주 자신만만해보였다.

"다들 엄청 좋아하네? 그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건가?"

"그것도 그렇고, 여자 검투사는 경기에서 지면 따먹히거든. 막대한 파이트 머니의 대가라고 해야하나?"

"... 뭐?"

나와 서지유, 심지어 김정태까지 일제히 패트릭을 돌아보자 그가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회원들의 환호성은 아직 멎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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