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지하 투기장(2)
* * *
블랙 로터스에 대한 제보가 들어온 다음 날.
나와 서지유, 김정태와 한예진은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서지유는 내가 하루만에 허락을 받아낸 것이 신기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부인께서 잘도 허락해주셨네요."
"다 방법이 있지."
참고로 잠자리에서 기분이 좋을 때 말하는 것이 비결이다.
티아는 오늘 아침에 내 다리에 매달렸지만 그게 먹힐 리가 있나?
한편, 멀찍이서 따라오고 있는 한예진은 조금 불만스런 얼굴을 보였다.
원래 내 애인 역할은 그녀가 해야겠지만...
한예진은 내 건강을 담당하는 에스콰이어라서, 아무래도 연기력과 분장술이 많이 불안하다.
멀쩡한 서지유를 놔두고 굳이 시키고 싶진 않다.
나는 공항에 설치된 마력 감지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통과하곤 위장용 신분증을 내밀었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헌터들을 판별할 수 있는 이 감지기는 제법 고성능이라서, 예리엘조차 속여넘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만...
내 경우에는 체내의 그린 더스트로 마력 반응을 완전히 억제할 수 있어서 프리패스다.
'덕분에 편하다니까.'
서지유의 코디 덕분에 헤어스타일도 완전히 바뀌었다.
요즘 내 머리는 여기저기 잠입 하느라 얌전할 날이 잘 없다.
서지유 본인도 코디를 많이 바꿔서, 지나가던 애 엄마나 어르신들이 눈살을 살짝 찌푸릴 정도.
벼락부자의 애인 역할이니까 어쩔 수 없긴 하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내게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하여간 연기력 하나는 타고난 수준이다.
"예리엘 프로스트의 남편이랑 이러고 있는 거 들키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안 들키게 잘 해."
"하아..."
무난하게 런던에 도착한 우리는 회사에서 보내놓은 서번트와 합류했다.
그는 우리를 차에 태우곤 주저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런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스터란 호칭이 없는 것은 서지유의 존재 때문이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브리핑을 부탁했다.
"바로 설명해줘."
"네. 여러분들께선 기존 회원의 소개를 받아서 블랙마켓에 입장하시게 될 겁니다."
"그 기존 회원은 우리 회사원인가?"
"아뇨. 외부인입니다. 거슬리시면 언제든지 버리셔도 무방합니다."
일레네 윌슨은 이미 이쪽 라인을 완전히 포기할 작정이었다.
그녀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자 옆에서 서지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본인과 대우가 비슷하다고 느낀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위장 신분의 국적만 바꿀 순 없나? 중국인이라든가, 일본인으로..."
이제와서 대한민국의 국격 따윌 걱정할만한 애국심은 남아있지 않지만, 만에하나 꼬리를 잡히게 되면 곤란하다.
아쉽게도 서번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중국인은 실제로 종종 회원이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기존 회원들의 텃세에 금방 쫓겨나지만요."
"그럼 일본인은?"
"주요 회원들 중 일본 헌터 업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놈이 있습니다. 놈에게 걸리면 금방 들통날 겁니다."
그래서 결국 한국인의 신분으로 잠입할 수밖에 없는 건가.
한국도 헌터 강국이 된지 좀 됐으니, 신규 회원이 한둘 정도 생겨도 이상할 것은 없다.
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던 서지유가 조심스레 물었다.
"영국은 그... 분위기가 괜찮나요? 레이드나 던전 같은 거요."
"네. 런던은 유럽에서도 정세가 굉장히 안정된 편입니다. 섬나라라서 방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니까요. 인구수도 상당하구요."
물론 영국도 국토의 면적이 아주 좁은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던지기'를 당하진 않는다.
내 보충설명에 서지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지기요?"
"보통 육지에선 국경지대에 몬스터가 출현하면 다른 나라로 쫓아내거든. 특히 레이드 보스 같은 거라도 뜨면 진짜 지옥이지. 서로 잡기 싫어서 완전 난리도 아니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뉴스에서 몇 번 봤던 것 같아요."
"그렇지?"
한국도 사실상 섬나라라서 던지기를 잘 안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게다가 영국은 이 우월한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의 헌터들을 많이 흡수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영국의 헌터 전력은 유럽에서도 매우 강한 편이다.
"그래서 지하 투기장 같은 헛짓거리도 할 수 있는 거지."
물론 영국 헌터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예리엘 선에서 죄다 컷이다.
나는 쓸데없이 자부심을 느끼며 우리들을 소개해줄 기존 회원의 집으로 들어갔다.
서지유는 고성을 그대로 쓰고있는 듯한 저택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와, 으리으리하네요."
"그래. 특히 관리비가 으리으리할 것 같아."
밤이라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잘 보면 눈에 띄는 곳만 깨끗이 청소해놓았다.
담장이나 구석 같은 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지 오래다.
"빚이라도 지고 있는 건가?"
"정확합니다. 그럼 바로 만나보시죠."
이번 작전의 안내역은 예상보다 훨씬 앳된 느낌의 청년이었다.
그는 나와 서번트를 보곤 곧바로 몸을 살살 떨었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그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저, 저기..."
"너무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댁을 협박하거나 입을 막는 건 제 역할이 아니니까."
"정말로 이번에 협조하면 빚을 청산해주는 거죠?"
우린 놈을 쳐다보며 말없이 웃었다.
나는 서번트를 따로 데려가서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빚을 지고있는 놈이 블랙마켓에 출입할 수 있는 거야? 거기 부자들만 드나든다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지하 투기장에서의 도박 때문에 빚이 생긴 거니까요."
"아, 그렇게 된 건가."
"그리고 한국 속담을 보면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잖습니까. 저놈은 아직 2대째니까 너무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헌터들을 모아서 지하 투기대회 같은 걸 하는데 도박이 빠질 리는 없다.
나는 그에 대한 동정심을 잃어버린 채 잠입용 프로필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내가 맡게 된 역할은 한국의 최신형 헌터 장비를 팔아치우기 위해서 영국까지 날아온 협회의 중역 겸 매국노다.
김정태는 당연히 호위역이고, 서지유는 비서 겸 애인.
당연히 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서 어제부터 설정을 달달 외워왔는데...
정작 그런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내 기억력에는 이상이 없으니, 연기가 많이 어색한 모양.
그러나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지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 오늘은 이쯤하지. 아직 준비기간은 좀 남았으니..."
"치... 침실은 이쪽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감사."
저택의 손님용 방을 이용하게 된 나는 서지유를 조용히 불러서 솔직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형편상 그녀가 가장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편이다.
"지유 씨, 내 연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요?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에요."
"내가 언제 이런 걸로 화내는 거 봤어?"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서지유가 머뭇거리다가 고백했다.
"그, 배역에 비해서 연기가 너무 딱딱하다고 해야하나?
"그래? 정확히 어떤 부분이?"
내가 한 발짝 다가가며 진지하게 묻자 서지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한 발짝 물러났다.
"전반적으로 저를 대하시는 태도가 많이 어설펐죠."
"어설퍼?"
"그, 저는 '설정상' 팀장님의 애첩이잖아요? 그런데 팀장님은 부인을 대하시던 자세가 남아있어서 너무 정중하고 딱딱하다고 해야하나..."
얼굴을 살짝 붉히며, '설정상'이라는 부분을 굉장히 강조하는 서지유.
그녀의 노골적인 단어사용에 나까지 덩달아서 부끄러워졌다.
"애첩이라니..."
"애인이나 애첩이나 그게 그거죠. 결혼 생각까진 전혀 없는 엔조이 상대.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관계 위주에요.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해줄 필요따윈 없어요."
서지유는 냉정하게 옳은 소리만 해댔다.
이 여자, 사기에 관해선 언제나 진심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이 구구절절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어적으로 대꾸하게 됐다.
명색이 유부남이다보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이번의 팀장님은 전보다 훨씬 방탕하고 도덕성이 없는 역할이에요. 소위 말해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남자죠. 그런데 제가 찰싹 붙어있어도 목석처럼 가만히 있는 건 좀 아니죠."
확실히 이번의 배역은 전과 차이가 많다.
이제와서 조금 더 얌전한 설정으로 되돌리기도 힘들다.
나는 아예 서지유를 빼버릴까 싶었으나, 그녀는 이런 연기에 대해선 나보다 아득히 위에 있었다.
결국 나는 속으로 예리엘에게 사과하며 각오를 다졌다.
"알겠어."
"아니. 갑자기 알겠다고 하셔도 좀 곤란... 아앗..."
당황하던 서지유를 한쪽 팔로 꽈악 끌어안자 제법 볼륨감있는 몸매가 느껴졌다.
사실 이쪽도 피지컬은 예리엘 못지않다.
괜히 그녀에게 사기당한 남자들이 재판까지 따라와서 그녀를 변호해줬겠는가.
서지유의 전과를 떠올리자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며 그녀를 대하기 편해졌다.
솔직히 상대가 상대라서 좀 못되게 굴어도 될 것 같다.
"어차피 예리엘에게 허락도 받았으니까..."
"그, 그렇군요. 그럼 저도..."
작게 한숨을 내쉰 서지유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소 갑작스럽게 입술을 맞춰왔다.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저쪽도 만만찮다.
입술을 맞추는 내내 끊임없이 요동치는 두 사람은 절대로 자연스런 커플처럼 보이지 않으리라.
"우웁."
"푸흐, 하아, 하아... 사, 사양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연기니까요."
"사양하긴 누가 사양했다고 그래?"
"그... 그럼 다시 할까요?"
우린 얼굴을 화악 붉힌 채 차마 눈을 맞추지 못했다.
잠시 뒤,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부드러운 감촉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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