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지하 투기장(1)
* * *
멸망까지 약 250일.
티아는 입마개와 목줄을 차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최근 녀석에 대한 여론을 반영한 코디... 는 아니고, 그냥 요새 너무 편한 것 같아서 심술을 좀 부려봤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녀석을 도로 풀어주게 됐다.
"사무실로 오는 동안 사람들 눈이 좀 이상하던데..."
"입마개는 포기하자."
"푸하!"
지난번의 은행강도 사건도 대충 마무리 되어서, 사무실은 오랜만에 좀 한가해졌다.
우리는 간만의 평화를 즐기며 천천히 업무를 시작했다.
"팀장님. S대에서 제보된 방화 사건, 수사할까요?"
"무시해. 거기서 화염병 던지고 있던 게 한두명도 아니고. 다른 건 뭐 없어?"
"은행강도 이후로는 조금 잠잠하네요."
나는 이서우의 말에 그리 기분좋게 동의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요즘 좀 잠잠하긴 하지만, 이게 폭풍 전의 고요처럼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역시 블랙 로터스다.
은행강도 사건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아직 꼬리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놈은 외국으로의 도주 루트까지 준비해놓았으니, 어쩌면 한국에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좀 답답해하고있자 이서우가 뒤늦게 장비를 반납했다.
"아, 그리고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마력 감지기라는 게 원래 이런 식으로 소형화가 가능한 거였나요?"
"원래는 안 되지. 이거 팔면 5억은 가뿐히 나올걸?
"예?"
마력 감지기를 무슨 교통 정리봉처럼 취급하고 있었던 이서우가 내 말에 움찔했다.
사실 생산단가만 따져서 5억이란 것이고, 기술적 가치까지 따지면 훨씬 비싸진다.
이건 회사의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장비니까 당연하다.
"그, 그럼 얼른 가져가세요."
"티아, 이거 창고에 넣어놔."
"네!"
저런 게 일반 경찰들에게 보급되면 헌터 범죄가 확연히 줄어들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업무를 대충 분배한 내가 자리로 돌아가서 노트북을 켜려던 중.
블랑쉬가 화면을 깜빡거리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
"갑자기 웬일이야? 회사에서 전달 사항이라도 있어?"
좀 미안하지만 녀석이 반갑다기보단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감상이 무색하도록, 블랑쉬는 내가 기다렸던 바로 그 정보를 들고왔다.
[블랙 로터스 관련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사실 단서라기엔 좀 약하지만요.]
"뭐라고? 다른 블랙 로터스랑 헷갈린 건 아니지?"
골치아프게도, '블랙 로터스'라는 단어 자체는 제법 유명하다.
이름 그대로 검은 연꽃이라는 뜻인데다, 세계 최초의 트레이딩 카드게임인 MTG의 유명 카드이기도 하다.
그래서 블랙 로터스라는 게 꼭 예전의 그 은행강도 교사범을 의미한다는 보장이 없다.
다행히 블랑쉬는 확신에 가득찬 상태였다.
사실 내게 전달한 시점에서 이미 검증은 완료됐을 것이다.
[카드 게임 이야기 같진 않아요.]
"그게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데?"
[아쉽게도 국내는 아닙니다. 물론 마스터의 기준에서요.]
"외국?"
좀 당혹스럽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상정했다.
블랙 로터스가 외국으로 튀었을지도 모른다고, 얼마전에 생각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나마 회사의 영향력이 아주 강한 미국이길 바랬지만, 블랑쉬는 내 기대를 배신했다.
"그럼 미국이야?"
[영국이요.]
"젠장. 그래서, 영국 어디?"
[이번 주말에 런던 교외에서 비밀 행사가 열립니다. 그곳을 블랙 로터스가 주시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요.]
심지어 본인이 오는 것도 아닌 건가?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참가를 결정했다.
달리 녀석에 대한 단서가 없다.
"자세히 정리해봐."
[런던 블랙마켓은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곳의 주요 회원 중 한 명이 블랙 로터스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메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얼마나 확신해?"
[98% 이상입니다. 다른 마스터들의 검수도 받았어요.]
런던 블랙마켓이라면 예전부터 회사측에서 잠입하기 힘들어했던 곳이다.
무슨 전 세계 블랙마켓을 통솔하는 인물이나 기관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때그때 맞춰서 잠입해야 하는데 이놈들은 유독 폐쇄적이었다.
"그쪽 블랙마켓은 뭐가 메인이지? 블랙마켓마다 특산품이라고 할만한 게 있잖아."
[영국 블랙마켓은 민간인 회원들도 많이 참가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죠.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될만큼 부유하거든요.]
"그래?"
저쪽 나라는 배가 부르면 기행을 저지른다.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귀중한 물건들의 경매가 이뤄지고, 전문 인력 알선도 자주 일어납니다. 하지만 메인은 역시 지하 투기장입니다.]
"... 지하 투기장?"
[마켓의 회원들을 만족시키고, 헌터들의 능력 또한 시연할 수 있는 1석2조의 이벤트죠, 블랙 로터스 또한 투기장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세상이 너무 살만해진 것 같다.
몬스터로는 모자라서 헌터들끼리 싸움까지 붙이다니.
블랙 로터스는 헌터들을 꼬드겨서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곤 했으니 그쪽에 관심을 가져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주저없이 출장을 결정하며 질문했다.
"영국 블랙마켓 회원권, 얻을 수 없을까?"
[전산으로 처리되는 부분이 거의 없어서 저로선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긴. 그런 곳은 대부분 인맥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나는 영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명령했다.
"일레네를 연결해줘."
[마스터 일레네, 연결 완료.]
회사의 인사 및 경영 담당인 일레네 윌슨은 기다렸다는 듯 내 통신요청을 받았다.
그녀는 답지않게 우는 소리부터 했다.
[더스트. 영국 블랙마켓 회원권은 나도 얻기 힘들어.]
"불가능하다곤 안 하는군."
내 지적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회원제 블랙마켓이라곤 해도, 결국은 물건과 인력을 사고팔기 위한 공간이다.
정기적으로 새로운 상품이 공급되지 않으면 마켓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건 동아리 내지는 사교회에 불과하다.
[검투사로 참가해도 된다면 일이 많이 쉬워지는데...]
"검투사로 참가하면 다른 회원들에게 접근하기가 어렵잖아. 내부에서의 행동도 심하게 제한될테고. 신규 회원으로 소개시켜줘."
매튜 마누엘이 천재 개발자인 것처럼, 일레네 윌슨도 이 정도 능력은 있는 여자다.
내가 흔치 않은 부탁을 하는 것을 즐기던 그녀가 의외로 흔쾌히 승낙했다.
[알겠어. 더스트에게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블랙 로터스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설치는 것도 영 달갑지 않고.]
"고마워 마담."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이건 내가 오랫동안 공들여서 만들어놓은 라인 하나를 통째로 희생시켜야 하는 일이라고. 현지에 서번트를 보내둘게.]
나는 일레네와의 통신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아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직감적으로 지껄였다.
"지유 언니, 출동!"
"엑? 또 내 차례야?"
꽈앙.
티아에게 꿀밤을 먹인 나는 다음 순간 앨리스에게 붙잡혔다.
"그런 위험한 곳에 진짜로 기어들어가겠다고?"
"위험하지 않아. 일레네 윌슨이 준비해준 신분을 쓰면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근데 거기서 위험한 짓을 할 예정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나도 데려가. 나도 절반은 영국인이잖아."
앨리스가 강하게 말하자 내 눈매가 자연스럽게 좁아졌다.
사실 앨리스가 혈통만 혼혈이지, 생긴 건 완전 영국인이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데려갈만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야, 거기서 너 못알아볼 사람이 어디있다고..."
"지난번에는 나도 변장하고 같이 갔잖아?"
"그건 사이비 종교 놈들이었고. 게다가 너는 외국인이었으니까 알아보기도 힘들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오히려 영국 혼혈이니까 들킬 확률이 꽤 높다.
반면 나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나는 동양인이니까 아주 높은 확률로 못 알아볼거야."
"..."
"게다가 위험한 짓을 하러 가는거니까,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고 할 생각이야."
"그거 참... 묘하게 인종차별같네."
앨리스는 차마 내 말에 반박하진 못했다.
서양인이 동양인을 잘 못알아보고, 동양인이 서양인을 잘 못알아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사실 인종차별도 뭣도 아니다.
서지유는 또다시 위험한 잠입조사를 하게 된다는 생각에 인상부터 썼다.
"무, 무슨 일이에요?"
"블랙 로터스의 꼬리를 잡았어. 외국이야. 서지유, 출동 준비해. "
"저희 외국은 조사 못하지 않아요?"
"안 되면 되게 하라."
정부기관 소속이 하면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척척 준비를 갖추는데, 서지유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 그럼 부인께선요?"
"..."
솔직히 말해서 예리엘이 좋아할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그녀를 데리고 갈 수도 없다.
"예리엘이 내 상관이야? 특수대 일을 상의하게?"
"그, 그건 아니지만요... 죄송해요."
"됐으니까 얼른 출장 준비해. 정태야, 이번엔 너도 같이 간다."
"네 팀장님."
호위를 아예 안 데려갈 수는 없어서 결국 멤버는 김정태와 서지유, 그리고 나 셋으로 결정됐다.
집에 남게 된 티아는 내게 울며불며 매달렸으나... 녀석도 데려갈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잽싸게 짐을 싸던 서지유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제 역할은 뭐에요? 제가 블랙마켓 같은 곳은 가본 적이 없어서..."
"너는 내... 애인이야."
"... 네에?"
내가 차마 서지유의 얼굴을 보지 못하며 대답하자 얼떨떨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그런 곳에 와이프를 데려가겠냐?"
"상식적인 사람은 그런 곳에 얼씬도 안 할 것 같은데요."
"그래, 상식적이지 않으니까 불륜 정도는 하겠지."
"엉망진창이잖아요..."
미안하지만 일레네 윌슨이 보내준 프로필에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당일에도 간단한 이미지 체인지 정도는 해야할테니, 서지유의 솜씨가 필요하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나는 예리엘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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