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은행강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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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널드 스미스의 밀고 덕분에, 두 번째와 세 번째 범인은 금방 잡을 수 있었다.
범죄자들은 같은 팀원들에게도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 애를 썼으나, 어차피 죄다 같은 업계 사람이라서 머지않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는 급히 달아났으나 본인 몫의 현금을 거의 다 버려두고 가야했다.
어차피 네 번째 범인이 잡히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헌터들은 원래부터 공항 이용이 심하게 통제되는데다 항구에도 비상령이 떨어져서 도망칠 곳이 없다.
'이놈들이 괜히 시간을 벌려고 애쓴 게 아니지.'
하지만 다섯 번째 범인이자 주동자.
텔레파시 능력으로만 참여했다는 블랙 로터스는 종적조차 잡을 수 없었다.
녀석의 몫을 놔뒀다는 곳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아마 사람을 보내서 늦지 않게 회수한 것이리라.
그쪽은 단서가 아예 없는지라 추적이 무척 막막하다.
[근처를 지나다녔던 차량을 모두 추적해볼까요?]
"시간 낭비에 할당량 낭비야.차량을 한 번 옮겨타기만 해도 추적 못 해. 수고했다 블랑쉬."
결국 날이 넘어가기 전에 네 번째도 범인도 잡혀서, 200억 중 160억의 회수에 성공.
그러나 언론은 아직 40억을 찾지 못했다며 우리를 들들 볶아댔다.
협회 본사로 돌아온 앨리스가 긴급 편성된 뉴스를 보곤 격분했다.
"이건 처음부터 우리 사건이 아니었잖아! 경찰들이 골든타임을 거의 다 날려먹었는데..."
"그렇다고 경찰들을 탓할 수는 없지."
내가 녀석을 진정시키자 대원들이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그런가?"
"어차피 헌터 관련 사건에서 경찰은 아마추어나 마찬가지야."
이서우는 내 말을 듣곤 아주 쓰게 웃었다.
나는 구속실의 범인들을 살펴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껏 특수대가 상대했던, 굵직한 사건의 범인들은 대부분 A랭크 이상이었다.
대형 길드의 주력 멤버로 활동할 수 있는 수준의 헌터들.
이제 현대 사회도 헌터들에게 아주 무력하진 않아서,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범죄를 제대로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방방곡곡 카메라가 있는 한국의 도심은 범죄자들에게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에 잡힌 놈들 중 A랭크는 없었다.
대부분이 B랭크고, 해킹 담당은 아예 C랭크였다.
레이널드처럼 거액의 빚을 지고 있는 놈들도 많아서 40억이라는 거금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러나 놈들에게 그런 체계적인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할만한 능력은 없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은 분명 5번째 범인인 블랙 로터스였다.
내가 심문해본 범인들에게선 그만한 조심성과 계획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서우는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려고 했으나, 그도 이내 블랙 로터스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역시 리더격 존재를 만들어서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형량을 줄이려는 게 아닐까요?"
"글쎄. 지금까지 잡혀온 네 명 중 누구도 다른 세 명을 제대로 통솔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그리고 이야기가 좀 황당해서 오히려 신빙성이 있어."
"네? 그건 또 무슨..."
"만약 서우 씨의 말대로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면, 블랙 로터스도 실제 범죄에 참여했다고 주장했어야지. 텔레파시로만 대화하는 범죄 컨설턴트라니, 말도 안 되잖아."
"아..."
너무 말도 안 돼서 오히려 믿음이 가는 케이스.
만약 거짓말을 하려고 작정했다면 저것보단 잘 했을 것이다.
나는 밤 늦게까지 놈들을 제각각 심문한 뒤에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재구성해봤다.
예리엘은 군말 한 마디 없이 가만히 기다려줬으나...
대원들은 그것이 더욱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이미 늦었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어.'
나도 묘한 압박감을 받으며 정리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개월 전, 레이널드 스미스 외 3인은 블랙 로터스라 자칭하는 텔레파시 능력자와 접촉하게 돼. 블랙 로터스는 이미 4명의 빚이나 범죄 경력을 알고 있었어. 아마 미리 조사한 거겠지."
은행털이 건에 비하면 그건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티아는 무슨 말인지 아예 모르는 눈치였지만, 앨리스가 감자칩을 쥐여줘서 조용히 시켰다.
녀석은 내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감자칩을 씹었다.
"범죄행위를 보고 이런 말을 하긴 좀 뭣하지만, 은행털이 건은 거의 예술의 경지였어. 시작부터 끝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지."
먼저 목표의 설정부터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그들이 털어먹은 고조선 은행 본점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마력 감지기를 도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선상 카지노의 점원들도 써먹던 것이 마력 감지기라지만, 그걸 방범용으로 제대로 만들면 10억 단위로 깨지기 때문이다.
은행 본점 지하금고는 면적이 꽤 넓어서 더더욱 비용이 높았다.
고조선 은행의 선택은 결국 40억의 손실과 신용도 하락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블랙 로터스는 첫 접촉 당시에 이미 자세한 계획을 세워뒀어. 현장에서 400m 정도 떨어진 상가의 지하를 임대해서 즉시 공사를 시작했지. 탐색 능력으로 경로를 설정하고 흙을 액화시켜서 소리 없이 공사를 진행한 다음 압축 능력으로 처리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해킹 담당의 교육까지 시작했다.
원래 C랭크 헌터였던 해킹 담당은 은행의 보안설비를 해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만, 블랙 로터스의 교육을 받으며 급성장했다.
그녀는 상당히 훌륭한 교육자인 것이 틀림없다.
은행털이 멤버들은 준비가 진행될수록 불안해했으나, 블랙 로터스가 그들의 약점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40억과 새로운 인생이라는 명확한 비전까지 제시했다.
팀원들의 도주로를 마련해준 것도 다름아닌 그녀였다.
각자의 역할에 딱 맞는 능력을 동원한 덕에 터널 공사는 소음도, 사고도 없이 무사히 끝났다.
블랙 로터스가 멤버들에게 각별히 주의를 요구했던 것이 바로 그 다음 단계.
작전의 실행이었다.
그녀는 은행강도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잘 알고있었다.
"200억을 털어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면 소용없어. 고조선 은행 본점의 금고 체크는 하루 2번. 퇴근 시간과 아침 출근 시간이야. 하룻밤만에 털어먹고 외국으로 도망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지."
그래서 블랙로터스는 도주에 필요한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 힘썼다.
절도 자체를 조용히 처리하는 것은 물론, 금고 감시 카메라의 영상을 덮어씌우고 땅굴을 소각해서 증거를 없애는 것은 물론 부비트랩까지 준비한 것이었다.
특히 감시 카메라를 조작한 것이 제대로 먹혀서, 다음 날 아침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한참동안 내부자의 횡령이나 전산오류를 의심했다.
금고에서 돈을 가지고 나가는 장면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대부분의 전자장비들은 헌터 능력을 이용한 공격을 가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류의 조작에 극히 취약하다.
대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블랑쉬가 없었다면 범인들은 진짜로 도주에 성공했을 거야.'
문제는 진짜 주범인 블랙 로터스로 향하는 단서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범인들을 일회용으로 써먹을 작정이었다는 듯, 본인에게 연결되는 단서를 전혀 남겨놓지 않았다.
다른 4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텔레파시 능력으로 의사소통을 했다니까, 오라클을 써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어. 당장은 여기서 종결할 수밖에 없나...'
어떻게든 계속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나는 나중에 범인들을 좀 더 괴롭혀주기로 마음먹으며 대원들을 퇴근시켰다.
"이미 날이 넘어갔으니까, 충분히 쉬고 오후에 출근하도록. 다들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후아암."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티아는 뒤늦게 예리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가렸다.
다행히 예리엘은 나를 탓하는 기색이 아예 없었다.
사실 은행강도 놈들이 잘못한 거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화를 내겠는가.
그래도 좀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법도 했을텐데 군소리 한 번 안 해줘서 고맙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몰던 나는 돌연 답답한 마음에 혀를 씹었다.
이제와서 헌터 범죄 전문 컨설턴트라니.
그런 상대가 아직 이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막막하다.
게다가 블랙 로터스는 이번 건을 통해서 특수대의 능력을 대충 파악했을 것이다.
특수대는 명색이 정부 기관이니까, 속임수를 쓰거나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저쪽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성심성의껏 해결해야 한다.
"답답하군. 아, 맞다. 저녁 약속 못 지켜서 너무 미안해."
"서방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일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는 걸요?"
예리엘은 딱 잘라 말하면서도 무섭게 웃었다.
"그 블랙 로터스란 여자, 나중에 찾아내서 찢어버리죠."
"찌, 찢는다니."
"쿠울..."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던 티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
앨리스가 그 틈을 타고 본심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미 티아를 챙겨주는 담당이나 다름없었다.
"난 얘가 진짜 아무 생각도 없이 투항했다는 게 신기한데."
"티아는 음모 같은 걸 꾸밀 수 있는 지능이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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