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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57화 (57/131)

〈 57화 〉 은행강도(3)

* * *

"이게... 왜 되는 거지?"

예리엘의 협조 요청을 받은 헌터 길드들은 아주 빠르게 응답했다.

개중에는 중력계와 공간계 헌터들의 알리바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길드원들에 대한 자료도 보내주는 길드도 적잖게 있었다.

우리 특수대나 헌터 협회에서 협조 요청을 해도 이렇게까지 깔끔하고 빠르게 되진 않는다.

나는 그것이 무척 신기하면서도 괘씸하게 느껴졌다.

"퇴근 시간 직전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였어?"

"후훗."

"이제야 언니의 위대함을 좀 알겠어?"

쓰게 웃는 예리엘의 옆에서 괜히 우쭐해하는 앨리스.

하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거의 살아있는 여신 취급인 것이 예리엘 프로스트인데...

현역 업계인들 사이에선 그 위상이 어떨지 제대로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나는 미등록 헌터라서 그쪽 분위기를 읽는 것은 모자람이 많았다.

앞으로는 예리엘의 이름을 좀 더 자주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길드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감별하던 블랑쉬가 신호를 보냈다.

나는 스마트폰을 두드리며 녀석이 팝업해준 자료를 읽었다.

"검은늑대 길드 소속 B랭크 헌터, 레이널드 스미스. 현재 연락 두절."

"레이널드 스미스? 외국계인가요?"

"미국 출신 귀화 헌터야. 제법 희귀한 압축 능력을 가지고 있지. 놈이라면 충분히 이번 범죄에 끼어들 수 있었을 거야."

[스마트폰 추적 결과 없음. 이미 폐기한 것 같습니다.]

'영리한 판단이군.'

레이널드 스미스는 얼마 전부터 길드원들과 어울리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아직 할당량이 한참 남아있는데, 공략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제법 느슨한 계약으로 묶여있어서 길드에선 방치해뒀지만, 일단 의심을 받게 되니 가장 먼저 일러바칠 정도.

나는 정황상 이놈이 범인일 확률이 아주 높다고 봤다.

'차량 추적은 되나?'

[결과 없음. 대포차 이용 중으로 예상.]

'당연히 그렇겠지.'

이쯤되면 나도 오기가 생긴다.

'할당량을 좀 써도 되니까, 얼굴 인식으로 전환해서 추적해봐.'

분명 변장을 했을테니 인식률이 많이 떨어지겠지만...

이번 용의자는 외국 출신이라서 비교적 추적이 용이했다.

블랑쉬는 항구가 있는 곳부터 중점적으로 훑었다.

[찾았습니다. 인천 국제공항 옆이네요. 용의자와 신체적 특징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경로 추적으로 검증 완료.]

"나가자!"

"버, 벌써요?"

우리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놈들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되도록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오라클을 써야 겨우 쫓을 수 있을 정도라니.'

물론 현재의 오라클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가능한 것을 조금 더 빠르고 손쉽게 이루는 정도.

이서우와 서지유가 다른 차량에 탑승한 덕분에, 블랑쉬는 대놓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다른 놈들은? 용의자랑 같이있나?"

[이미 흩어진 것 같습니다. 현재 추적 중.]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외국 출신 헌터면 그래도 돈벌이 좀 되는 거 아니었나? 그런 놈이 이런 범죄를 저지르다니..."

[레이널드 스미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블랑쉬는 앨리스의 딴지에 차분히 대꾸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대원은 미친 듯 엑셀을 밟았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서 배를 띄우긴 이르니, 시간은 충분할 것 같다.

인천쪽 항구로 갔으니까 아마 돈을 들고 중국으로 망명이라도 할 생각이겠지.

[레이널드 스미스의 능력은 분명 유용하지만, 개발 난이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사용자의 공간지각 능력을 극한으로 요구하는 종류라고 합니다.]

"압축 능력을 막상 전투에 써먹으라고 하면 좀 곤란하겠죠. 무슨 짐꾼도 아니고."

김정태가 맞장구를 치자 블랑쉬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레이널드 스미스는 한국으로 귀화하며 등급 평가가 하락한 케이스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부정 평가라도 받았다는 거야?"

[아뇨. 한국의 등급제도는 타국에 비해서 엄격하고 체계적입니다. 외국 출신의 A랭크 헌터가 한국에선 B랭크 판정을 받는 일도 흔합니다.]

"아, 그런..."

한국은 헌터강국답게 등급 평가가 상당히 빡센 편이다.

레이널드 스미스는 본인의 평가에 격분했으나, 뒤늦게 귀화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행히도 한국에서 그가 보여준 활약은 B랭크 헌터라는 평가가 딱 맞는 수준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과대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블랑쉬는 담담하면서도 잔인하게 그에 대한 해설과 평가를 계속했다.

[레이널드 스미스의 코리안 드림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미국에 있었던 시절보다 업무량과 위험도는 대폭 하락했으나, 수입도 그만큼 하락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소비습관이란 것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하더군요.]

수입이 줄었는데 소비습관이 바뀌지 않았다면 저축을 까먹게 된다.

그리고 저축을 다 까먹고도 씀씀이를 줄이지 못하면...

"빚이 생겼겠군. 얼마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8억입니다. 사채까지 썼다면 더 늘어나겠죠.]

"미친..."

앨리스는 상상 이상의 사태에 욕지거리를 삼켰다.

이 정도면 B랭크 헌터의 연봉으로도 빚만 갚아야 할 판국이다.

레이널드 스미스의 씀씀이는 그만큼 무분별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파티를 벌이면서 심심할 때마다 백화점 쇼핑... 잘도 이렇게까지 쓸 수 있었군요. 정황상 마약에도 손 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수백억대 은행털이에 참여할만한 동기가 차고 넘친다.

이미 빚을 왕창 져버렸으니, 크게 한 탕 해버리고 한국을 떠날 작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속으로 혀를 찼다.

'레이널드 스미스는 리더가 아닌 건가.'

이번 은행털이는 굉장히 대담하면서도 치밀했다.

이건 마약 중독자 따위가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건이 아니다.

이런 계획을 짜내고, 범죄자들을 통솔한 리더는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내 옆자리를 차지한 예리엘은 조금 심란한 얼굴이 됐다.

"점점 더 사회의 그림자 속으로 다가가는 기분이네요."

"그런가?"

예리엘은 헌터 사회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차량에 몸을 맡기던 우리는 머지않아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부두를 습격하기 위해서 준비를 갖췄다.

부두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놈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호다닥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포위망을 완성한 상태였다.

"검은 늑대 길드 소속 B랭크 헌터, 레이널드 스미스! 특수절도와 무허가 출국 시도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젠장!"

놈은 아주 능숙한 영어로 욕하며 몸부림을 쳤으나 금방 체포됐다.

목줄을 벗게 된 티아는 놈을 아주 간단히 눕혀버리곤 등을 짓밟으며 승리의 포즈를 취했다.

"주인님!"

"야, 사람을 그렇게 밟으면 안 돼! 너 뉴스 나와!"

"아앗..."

나는 티아를 밀쳐낸 뒤에 레이널드에게 윽박질렀다.

"다른 놈들은 어디있어! 돈은 어디에 숨겨놓았지?"

"자, 잠깐만요! 기다려, 기다리라고요!"

용의자는 우리를 몹시 두려워하며 양손을 번쩍 들었다.

이런 범죄를 저질러놓고, 막상 처벌을 받게 되자 겁이 난 모양이다.

하긴. 치안이 썩 좋지 않은 나라에선 경찰에게 저항하다가 그대로 사살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놈의 품속을 뒤져서 자그마한 큐브 같은 것을 꺼내들었다.

"이건... 지폐인가? 무게까지 줄어드는 사양이었나."

휙.

정육면체 형태의 큐브를 앞으로 던지자 그것이 저절로 부풀어오르며 원래의 크기와 형상을 되찾았다.

우리는 수북하게 쌓인 지폐 더미를 눈앞에 둔 채 작게 혀를 찼다.

5만원권이 수북하게 쌓여있는데, 못해도 수십억은 될법한 부피였다.

"하지만 200억엔 턱없이 모자라."

"저, 저게 전부야!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저게 전부라고! 나머진 다른 놈들이랑 나눴어!"

"다른 놈들?"

"호... 혹시 그놈들의 정보를 제공하면 무죄를 받을 수 있을까?"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듯, 턱도 없는 소리를 해대는 용의자.

나는 녀석의 몸을 압박하며 최대한 진심을 듬뿍 담아서 중얼거렸다.

"아니. 지금 당장 제대로 불지 않으면 최대한 정성을 들여서 기소해주지."

"큭! 아무튼 내 몫은 저게 전부야. 40억! 더 이상은 때려 죽여도 없다고!"

"40억?"

나는 예상보다 적은 액수에 살짝 당황했다.

레이널드 스미스는 이번 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능력은 대체가 불가능하므로, 아무리 적어도 60억 이상은 받았을 줄 알았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여기까지 오면서 예상해본 내용을 검증하기로 했다.

"실행범은 총 몇 명이지? 너를 포함해서 4명인가?"

터널의 건설을 돕고 금고의 구조를 파악했을 법한 탐색계 헌터가 한 명.

해킹을 담당한 전자계 헌터가 한 명에, 굴착 담당이 또 한 명.

마지막으로 현금 운송 및 자재 운반 담당인 레이널드 스미스까지...

이번 작전에 필요한 인원은 최소 4명이었다.

인원이 늘수록 각자의 몫도 줄어드니까, 여기서 함부로 인원을 더 늘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널드 스미스는 5번째 멤버의 존재를 주장했다.

"5명이야! 잡비 떼고 200억을 5명이서 평등하게 나눠서 1인당 40억!"

"5명이라고? 그럼 리더는 누구지?"

"리더는 얼굴도 본 적 없어! 항상 텔레파시 능력으로 대화하고, 작전 당일에도 나타나지 않았단 말야!"

말도 안 된다.

설마 형량을 줄여보려고 술수를 쓰려는 건가?

내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읽어낸 놈이 아주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이번 건을 계획한 것도, 멤버들을 모으고 통제한 것도 모두 그 인간이야! 아니면 우리가 뭐하러 직접 오지도 않았던 녀석에게 5분의 1이나 떼어줬겠어?"

"그만큼 떼어줬다는 게 더 수상한데?"

"협박을 당했어. 만약 자기 몫을 내놓지 않으면 우리의 위치를 고발하겠다고 했단 말야! 믿어줘! 우리들의 도주경로도 모두 그 녀석이 짜줬어. 돈은 헤어지기 직전에 놔두는 식으로 전달을..."

믿기 힘든 소리지만, 용의자의 필사적인 태도는 도저히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 이름이 뭐지?"

"여, 여자 목소리였지만 이름까진 몰라. 정말이야!"

"여자였나? 그래도 뭐라고 부르긴 했을 거 아니야!"

"브... 블랙 로터스. 일단은 그렇게 불렀어."

"블랙 로터스?"

완전 농담처럼 들리는 별명이지만 정말로 달리 단서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한 채 다른 범인들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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