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은행강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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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은행강도라고 하면 복면을 쓴 범죄자들이 총을 들이밀며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그게 맞다.
다른 방법으로 은행을 터는 것은 대부분의 범죄자들에게 무리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 따위로 은행털이를 했다간 3시간도 못 버티고 붙잡힐 것이다.
이곳은 원래부터 은행강도들에게 가혹한 환경이었지만, 대 헌터 시대가 시작된 뒤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한국에는 길바닥에 널려있는 것이 B랭크 헌터들이요, A랭크들도 심심찮게 돌아다닌다.
연약한 강도들의 입장에선 온 사방에 지뢰가 깔려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서울 중구 소재의 고조선 은행 본점은 큼지막한 건물들의 옆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이름과 별개로 어엿한 대기업.
게다가 바로 몇 블럭 옆에 한국은행 본점까지 자리잡고 있다.
이미 인터넷 뉴스가 나가서 그런지, 건물의 앞에는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바글거렸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제치고 현장에 들어섰다.
경찰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인상을 왈칵 찌푸리며 상관을 찾았다.
"잠시만요, 여기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이 사람 치울까요 주인님?"
"너 혼난다."
이상하게 의욕을 보이던 티아는 내 꾸중에 시무룩해졌다.
모처럼 큰 사건을 맡게 된 경찰들은 좀처럼 자리를 비키려 하지 않았으나, 특수 수사대의 권한이 훨씬 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원래 특수대는 계엄령이 떨어져야 할 상황에서나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인 것이다.
물론 진짜로 그런 상황은 아닌지라 나도 적당히 느슨하게 활동하고 있긴하다.
"잠깐 보고 헌터 관련 사건 아닌 것 같으면 바로 비켜드린다니까요."
"지금 헌터 사건이란 근거도 없는데..."
"이렇게 유능한 경찰분들이 아직 범인을 못 잡았다는 게 헌터 사건이란 증거 아니겠습니까."
현장의 책임자가 내 말에 울 듯 말 듯 끙끙 앓던 것도 잠시.
돌연, 건물의 지하에서 비명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경찰들과 직원들은 기겁하며 밖으로 탈출했다.
"우와아앗!"
"뭐야, 불인가?"
"연기입니다. 지하 금고에서 갑자기 연기가 발생해서..."
"이놈의 금고들은 왜 다 지하에 있는거래?"
앨리스가 옷자락을 살짝 거두며 툴툴거렸다.
나는 예리엘과 함께 앞으로 나가며 대충 설명해줬다.
"그야 지폐도 쌓이면 무게가 장난 아니니까. 금괴는 굳이 말할 것도 없고..."
"와아... 예, 예리엘 프로스트다!"
외출복을 차려입은 예리엘은 한쪽 손을 가볍게 뻗어서 연기를 모조리 흡수 및 압축시켰다.
원래 저게 저런 식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닐텐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응용력이다.
'이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싶으면 진짜로 해버린다.
그대로 지하 금고로 내려간 우리는 연기의 발생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넓은 금고의 한쪽 바닥에서 매캐한 연기가 쉴새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예리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장을 입고 나온 김정태가 망설임 없이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급히 따라왔던 경찰들이 화들짝 놀라자 예리엘이 그들을 안심시켰다.
"능력이 걸려있으니까 걱정할 필요없어요."
"아, 그렇군요."
"일이 어떻게 된거죠?"
"그게... 바닥에서 절도에 사용된 땅굴 같은 걸 발견해서 그걸 열었더니 저렇게 됐습니다."
금고의 한켠은 아주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는데... 아마 저곳에 있던 현금과 금괴를 빼돌려서 달아난 것이리라.
나는 경찰이 방치해놓은 바닥판을 들고 자세히 살펴봤다.
물론 바닥판이라곤 해도 원래는 떼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다.
금융계 대기업의 본점 금고답게, 이곳의 모든 것은 특제였다.
"땅굴을 파고 들어와서 돈을 훔쳐간 건가?"
"일단은 그렇게 보고있습니다."
"아, 이거군요."
나는 바닥판에 연결되어 있던 와이어 같은 것을 발견하곤 경찰들에게 보여줬다.
중간에 끊어지긴 했지만 타버리지 않고 남아있었다.
경찰들이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이자, 이윽고 김정태가 불에 타버린 잔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소형 산소탱크입니다."
"산소가 모자라서 제대로 불타지 않을까봐 놔둔 건가? 솜씨가 좋군."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범인들은 땅굴을 파고 들어와서 물건을 훔친 다음에 부비트랩을 설치한 겁니다."
사실 2013년에 독일에서도 비슷한 은행털이 사건이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놈들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터널을 태운 것은 물론, 발각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 부비트랩까지 설치했다는 것이다.
아마 와이어가 점화장치에 연결되어 있어서 바닥판을 들어올리자마자 작동하는 구조였을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이놈들이 마음에 들었다.
"완전 프로네. 정태야, 터널 반대편은?"
"막혀있었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매몰시킨 거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마, 말도 안 됩니다. 이 근처에 대형 건물이 몇 채나 되는 줄 아십니까? 하수도는 물론이고 도로까지 있다구요."
경찰 측 책임자가 내 의견에 딴지를 걸었으나, 이미 땅굴이 발견된 이상 신빙성은 없었다.
물론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울 중구 한복판의 지하공간에서 이 정도의 공사를 진행했다는 것은 확실히 비상식적으로 보였으니까.
"헌터 능력을 쓰면 가뿐하죠. 투시 능력은 탐색계 헌터들에게 아주 흔합니다. 그쪽에 도움이 되는 헌터 장비도 있고."
경찰은 무어라 더 걸고넘어지고 싶은 눈치였으나 예리엘을 봐서 그만뒀다.
나는 내부의 감시 카메라 하나가 이상하게 꺾여있는 것을 보곤 질문했다.
"저 카메라는요?"
"침입 당시에 망가진 것 같습니다."
"경보는 없었습니까?"
"네. 카메라 화면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고..."
저것도 헌터 능력을 쓰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도 오라클을 운용하며 배우게 된 것이지만, 해당 능력자에게 기본적인 해킹 지식 정도만 있어도 난이도가 팍팍 내려간다.
이 경우엔 C랭크 정도만 돼도 가능하겠지.
금고의 다른 경보장치들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크게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정도를 해결했다고 끝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런 절도는 우리가 상대했던 헌터 범죄 중에서도 손꼽히는 난이도를 자랑한다.
"피해액은 얼마나 되죠?"
"직원들 말로는 최소 200억 이상. 아직 집계중이니 더 늘어날 수도..."
"헌터 범죄자들이 나눠먹고도 남을 정도군요."
경찰도 이젠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 헌터 능력도 없이 이런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 사이, 밖에 있던 경찰들이 땅굴의 출발지점을 알아냈다.
아무래도 터널의 매몰이 완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땅굴 출발지점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좀 떨어진 상가 지하입니다."
"확실해?"
"아직 확인 중이지만, 그쪽에서도 연기가 솟았다니까요. 400미터나 떨어져 있었답니다."
"무슨 북한군도 아니고 400미터짜리 땅굴이라니..."
헌터 능력으로 땅을 파는 것은 훨씬 쉽다.
흙과 친한 능력이나, 소환수... 심지어 육체강화 능력자들까지.
터널을 파고 경보 장치를 무력화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다.
"이거 정말 잡을 수는 있는 겁니까? 범죄자들이 헌터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막막한데..."
"저희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경찰에게 대꾸하곤 이서우와 서지유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대원은 내 갑작스런 질문을 받곤 거의 동시에 대꾸했다.
"서우 씨, 지유 씨. 보통 이런 사건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게 뭐라고?"
"그건... 용의자의 범죄 능력입니다."
"범죄 능력이요."
그렇다.
원래는 동기부터 조사하지만, 이런 팀 단위의 범죄는 보통 돈이 목적이다.
나는 두 사람의 학습태도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400미터짜리 땅꿀을 들키지 않고 팔 수 있는 헌터는 너무 흔해. 은행의 전자 보안 장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헌터도 드물진 않아. 하지만... 공사 도중에 나온 흙과 200억원 어치의 현금을 몰래 옮길 수 있는 헌터는 어떨까?"
"아, 그건 확실히 드물겠네요."
"그렇지?"
오라클로 확인해본 결과, 땅굴의 근처에서 공사용 트럭이 움직이는 모습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게 자주 들락날락 거렸다간 진작 주변의 상인들에게 들켰을 것이다.
범행 당일 하루라면 또 몰라. 공사 내내 들키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이건 무척 희귀한 공간계나 중력계 능력이라도 있어야 가능한 범죄다.
"근데 그쪽도 아주 적진 않으니까... 범인을 제 때 잡는 건 힘들겠군."
"그런가요?"
내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리엘.
나는 살짝 부끄러운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골든타임은 아무리 길어봤자 자정까지야. 그 안에 용의대상 모두의 알리바이를 조사하는 건 힘들어. 아무리 공간계랑 중력계가 적어도 한국에 10명 이상은 있을테니까."
"그럼 각 길드 측에 협조를 요청하면 되잖아요?"
"아니, 그거 협조 요청 한다고 바로바로 대답이 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살짝 답답해하자 여전히 이해를 못하는 예리엘.
이윽고 그녀는 스마트폰을 들고 짧게 단어 몇 개를 툭툭 적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설마 싶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뭐 한거야?"
"협조 요청이요."
"응?"
"제 이름으로 직접 요청했으니까, 한국에서 계속 길드를 운영하고 싶다면 알아서 협조하지 않을까요?"
띠링, 띠리링!
잠시 뒤.
예리엘의 스마트폰이 미친 듯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블랑쉬에게 대응을 맡기곤 여유롭게 결과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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