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선상 카지노(4)
* * *
결국 서지유는 기어코 나를 따라왔다.
기껏 조사했는데 결말을 못보는 것이 아쉽다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야근하기 싫은 것 같다.
나는 차를 타고 가는 사이 티아에게 당부했다.
"카지노 안에서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면, 무조건 고개만 끄덕여. 쉽지?"
"저는 원래 복종밖에 몰라요!"
"착하네."
우리를 태운 차는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나는 김정태를 내버려두곤 나머지 인원들과 함께 당당히 걸어갔다.
무거운 돈가방을 들게 된 서지유가 끙끙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여기에 얼마나 든 거에요?"
"2억 5천 정도."
"네에? 뭐 이렇게 많아요?"
"아마 모자랄걸?"
티아와 앨리스의 외모가 워낙 화려한데다, 서지유도 나름대로 미인이라서 주변의 이목이 금방 모였다.
나는 줄을 완전히 무시하며 앞으로 나가서 환전소에 돈가방을 들이밀었다.
"교환."
"어억..."
무척 당황하던 직원들은 굉장히 쭈삣거리며 겨우 칩을 바꿔줬다.
티아에 앨리스까지 있으니 나를 못 알아볼 수가 없다.
내가 그들의 안내를 무시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앨리스가 내게 귓속말했다.
"여기선 오라클을 이용해서 슬롯머신을 고장내면 어때?"
"그 정도론 어림도 없어. 기계 고장을 이유로 당첨금 지불을 거부할 수도 있고."
이 선상 카지노는 슬롯머신이 아니라 다양한 테이블 게임이 메인이다.
슬롯머신은 그냥 자리 꽉 찼을 때 심심풀이로 하는 게임 취급.
게다가 슬롯머신의 최대 당첨금이 2천이라지만, 당첨이 10번씩 나와도 카지노 측에겐 큰 타격이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카지노라면 영업이익이 최소 수십억대... 많이 나오면 100억대도 가능하리라.
누적 당첨금이 억대인 슬롯머신도 있지만 저것도 다 장사가 되니까 넣어둔 것이다.
나는 일반 구역을 지나쳐서 헌터 전용 구역으로 향했다.
이곳도 무지막지하게 장사가 잘 되지만, 메인은 역시 저쪽이다.
티아가 음료수 하나를 받아들곤 아주 맛있게 마시는 사이.
뒤늦게 연락을 받은 카지노의 지배인이 호다닥 튀어나왔다.
"트, 특별 수사관님? 저희 카지노에는 어떤 일로..."
"손님들 다 내보내세요."
30대 중반 정도의 지배인은 내 말에 인상을 팍 찌푸렸으나 하는 수 없이 지시를 이행했다.
내가 온 이상 어차피 그냥 넘어가긴 글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회색지대니 뭐니 해봤자 수사기관에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다.
업장 안에 사채업자들이 대놓고 돌아다니는 시점에서 상당히 위험하다.
이들은 원래부터 지역 경찰들에게 뇌물을 제법 먹이고 있었으리라.
나는 안쪽에서 은근슬쩍 탈출하려던 헌터들을 다시 밀어넣었다.
"당신들은 남아있으시고."
"아, 예..."
"수사관님. 일반 손님들은 다 보냈습니다. 혹시 헌터 손님들께 볼일이라도..."
"잘 하셨습니다. 볼일이야 당연히 있죠."
나는 티아의 목줄을 풀어준 다음 헌터 전용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내 예상대로 그리 넓지 않은 공간.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다섯 명의 헌터들은 티아를 보고 몸을 살살 떨었다.
죄다 돈 좀 가지고 있을만한 A~B랭크 상당의 현역 헌터들이었다.
콰앙!
미리 이야기한대로, 앨리스는 본인의 입장에 삑삑 소음을 토해내던 마력 감지기를 한 방에 부숴버렸다.
때마침 비어있던 자리를 차지한 나는 여전히 굳어있는 지배인에게 물었다.
"여긴 종목이 뭡니까? 홀덤? 세븐?"
"주로 세븐 포커입니다. 저, 수사관님. 정말로 하실 건가요?"
"미니멈은?"
"바이 인 100불. 노 리밋입니다."
"수수료는 어떻게 되죠?"
"레이크는 5%지만 최대 100불 상한선이 있습니다."
내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하는 지배인.
나는 대충 예상했던 대답에 속으로 혀를 찼다.
'노 리밋인데 레이크 상한이 꼴랑 100불... 아주 지랄하고 있네. 대놓고 사기치겠다는 심산이군.'
다시말해서 2000불 이상 베팅하면 더 이상 수수료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뜻인데...
도박장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규칙이다.
물론 수수료를 받아먹는 장사가 가장 안정적이지만, 이런 헌터 고객들을 모으는 수고에 비하면 너무 적다.
조금 전에 앨리스가 박살낸 마력 감지기만 해도 최소 수천 ~ 억단위까지 가는 장비다.
여기 테이블이 꼴랑 하나 있는데, 수수료만 받아봤자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그럼 돈을 더 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그야 도박장 측이 게임에 관여해서 손님들의 돈을 직접 빼앗아오는 것이 제일이다.
찔끔찔끔 수수료를 받아먹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낫다.
다시 말해서 사기도박.
이 중에 한 명, 어쩌면 여러명... 도박장 측의 타짜가 섞여있을 확률이 아주 높다.
당연하지만 이런 놈들은 정직하게 도박을 하지 않는다.
귀하디 귀한 카지노 측의 돈으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확실하게 이겨야 한다.
예상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헌터 능력을 이용한 사기와 기계를 이용한 사기, 그리고 전통적인 사기다.
나는 가장 먼저 능력을 이용한 사기부터 봉인하기로 했다.
지배인은 무척 죄송하다는 듯 손을 싹싹 비벼대며 내게 거의 애원했다.
"수사관 님. 오늘은 부정행위용 방지 장치가 부서졌으니 게임을 하실 수는..."
"아, 괜찮습니다. 이게 있으니까."
왼손 약지에 착용하고 있던 결혼반지.
내가 그것을 반바퀴 돌리자 고순도의 그린 더스트 덩어리가 찬란한 광채를 뿜어냈다.
테이블의 헌터들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곤 기겁했다.
"어엇, 그, 그린 더스트 반지?"
"세상에 어디서 저런 걸..."
내 행동을 지켜보던 앨리스가 뒤에서 소리없이 경악했으나...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보통 헌터들이 이걸 보면 내 부인인 예리엘을 의심하지, 나를 의심하진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대충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역시 예리엘 프로스트. 저 정도 크기의 원석까지 구하다니..."
"부, 부인의 사랑이 느껴지는 반지군요."
"죄송하지만 부정 행위의 방지를 위해서 악세사리의 착용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봐주시죠. 저는 헌터도 아니고, 이거 빼면 와이프가 화내거든요."
내 대답에 지배인은 하는 수없이 특례를 인정했다.
"... 그런가요? 하긴, 그분께서 화내시면 안 되죠."
이것으로 능력을 이용한 사기는 방지 완료.
다른 헌터들은 어서 자리를 떠나고 싶은 눈치였으나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진 못했다.
나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차분히 다음 단계로 이행했다.
할당량을 좀 아껴야 하지만, 오라클 덕분에 기계를 이용한 사기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전통적인 사기 하나뿐.
눈썰미엔 나름대로 자신이 있으나 아무리 그래도 전문 도박꾼이 작정하고 손장난을 치는 것을 판별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뒤에 버텨서있던 티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티아. 여기서 손장난 치는 놈 있으면 바로 손목을 잘라."
"..."
끄덕끄덕.
티아는 아까 이야기했던대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녀석이 손장난을 판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기를 치는 입장에선 그녀의 시선을 무척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자고로 블러핑은 카드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덕분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헌터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모든 종류의 사기를 배제한 채 진행되는 세븐 포커.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른 플레이어들의 돈을 팍팍 빼앗았다.
"이, 이런..."
"졌습니다. 이상하게 강하시군."
이상하게 강하다니.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는 건가.
나는 속으로 웃으며 플레이어들을 한 명씩 탈탈 털어먹었다.
사실 나는 이기든 지든 진짜로 상관이 없어서 철저하게 승률에 따라 베팅을 하고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수법도 없진 않았다.
덕분에 개털이 된 플레이어들도 불만이 없진 않았으나, 감히 대놓고 반발하진 못했다.
그들도 알고있다.
특수대에게 찍혔는데 판돈 좀 잃고 끝난다면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다.
'대부분 이미 마음을 놓았군. 잘 됐어.'
나는 식어버린 그들의 가슴에 다시 불을 좀 붙여주기로 했다.
이제 나를 포함해서 실력이 괜찮은 세 명만 남았을 즈음.
테이블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있던 지배인이 내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데, 다들 그거 알고 계십니까?"
"넷?"
"이런 도박판에서 헛수작을 부리다 걸리면, 도박죄보단 사기죄로 기소를 당하게 됩니다."
"..."
헌터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으며 내 말을 경청했다.
나는 청중들의 훌륭한 태도에 만족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승패가 정해져있는 시점에서 이미 도박이 아니라는 거죠. 이렇게 되면 피해자들은 오히려 피해액의 일부를 환원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둔하고 멍청한 사람이라도 이쯤되면 눈치챈다.
나는 본인들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란 것을.
내게 개털이 된 헌터들은 순식간에 안색을 바꾸며 나의 아군으로 돌아섰다.
"수사관님. 그 말씀은 이게 사기 도박이라는..."
"신나죠?"
"자,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저희 카지노는 일체의 부정 행위를 허용하지 않습..."
"앉으시죠. 슬슬 직접 치셔야죠?"
내가 플레이어 둘 중 한 명에게 눈짓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물러났다.
카지노 측에서 심어뒀던 타짜가 자리를 비키자 온몸을 덜덜 떨던 지배인이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강력한 헌터임이 분명한 그는 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이제 그의 얼굴엔 조금의 가식도 남아있지 않았다.
"... 어떻게 알았지?"
휙.
나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그에게 던져줬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조금 전에 물러난 타짜였는데, 카지노 측의 직원에게 돈가방을 전달받고 있었다.
어제 영업이 끝났을 때 본인의 몫을 분배받은 것이다.
운 좋게도 실외에서 전달돼서 김정태가 찍었지만, 실내에서 몰래 전달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허..."
"테이블 하나짜리 특별구역으로 본전을 뽑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헌터 도박꾼들이 머릿수는 적어도 돈은 잔뜩 들고왔을테니..."
"이, 이런 개자식들이!"
"가만히 있어요. 아직 게임중이니까."
그제야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곤 분개하던 헌터 하나가 내 말에 겨우 진정했다.
지배인은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듯 빈 손을 꽉 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