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선상 카지노(3)
* * *
도박장으로 돌아온 서지유는 업장측의 배려 덕분에 테이블 게임에 끼어들 수 있었다.
눈을 시퍼렇게 뜨고있는 사람들 사이로 요령 좋게 끼어든 그녀는 블랙잭으로 도박을 시작했다.
앞서 말했던대로 그리 잘 하진 못하는 모습.
규칙을 숙지하고, 거기에 더해 노하우가 조금 있는 수준이다.
"스테이! 아앗..."
'금방 털리겠군.'
여기서 따면 가져가도 되긴 개뿔.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다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카지노와 직접 승부하는 경우, 카지노 측의 승률이 더 높은 것은 당연하고...
제법 희귀한 도박장이라 그런지 수수료도 상당히 높게 설정되어 있다.
최소 베팅액과 최대 베팅액도 평균보다 높다.
관광 느낌으로 놀러온 손님들도 없진 않지만, 대부분은 이미 절벽 위에 서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도박중독자들이다.
개중에는 이미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카지노 측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가지고 돈을 다 잃고 떠나는 것이라면 그나마 양반이지만...
저런 식으로 빚을 지기 시작하면... 그것도 사채를 빌리기 시작하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다.
앞서 강원랜드를 까긴 했지만 결코 그곳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 선상 카지노가 강원랜드보다 나은 것은 딱 하나. 무료로 나눠주는 음료수의 수준 뿐이다.
그새 신나게 잃고 있던 서지유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베팅을 하기 시작했다.
최소 베팅으로 패배한 게임이 끝나자 곧바로 2배를 베팅한 것이다.
'마틴게일 베팅법인가... 어디서 본 건 있나보지?'
마틴게일.
돈을 잃으면 전보다 2배로 늘려서 이길 때까지 계속 베팅하는 전략.
나는 그녀를 마구 혼내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얌전히 음료수만 홀짝였다.
곧이어 처음의 2배를 잃은 서지유는 이어서 4배를 베팅했다.
4배를 베팅한 다음은 8배. 8배 다음은 16배...
서지유의 실력이 시원찮은 것도 있어서, 승률은 50%보다 훨씬 낮았다.
그래도 영원히 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32배 차례에서 이겼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손에 들어온 것은 푼돈이었다.
1+2+4+8+16 = 31이라는 당연한 이치.
그녀가 지금껏 잃은 총액이 미니멈 벳의 31인데, 32배에 겨우 이겼으니 결국 수익은 1이다.
서지유는 그제야 마틴게일 베팅법의 단점을 깨달았다.
마틴게일 베팅법은 생각보다 훨씬 수익률이 나쁘다.
마틴게일 베팅법으로 확실한 이득을 거두려면 이런 식으로 이긴 뒤에, 판돈을 확 올려서 한 번 더 이기는 식으로 연승을 해야한다.
서지유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미니멈의 64배를 베팅했다.
이제 한판당 베팅액은 근 100만원!
이쯤되니 다른 손님들도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초심자의 행운이 따라준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순식간에 64배를 날려먹고 128배를 베팅한 서지유는 뒤늦게 두 번째 난점을 깨달았다.
만약 여기서 이기면 128 64로 미니멈 벳의 64배에 해당하는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근 100만원 정도 된다.
그러나, 여기서 지면?
군자금은 많이 남아있지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256배를 베팅할 수는 없다.
그녀의 베팅은 어느덧 맥시멈 벳에 가까워져 있었다.
"칫... 스테이!"
그러나 결과는 패배!
나는 오히려 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지유는 그대로 맥시멈 벳을 걸곤 또다시 그것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군자금을 2천씩 준비해서 아직 칩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순식간에 돈이 날아갔다.
"이익..."
블랙잭 테이블에서 달아난 서지유는 때마침 비게 된 포커 테이블을 차지했다.
카지노가 아니라 다른 손님과 붙는다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와 같은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들의 얼굴은 블랙잭 때보다 훨씬 밝았다.
서지유는 척 봐도 돈 많고 어리숙한 호구였다.
나는 잠시 그녀에게 칩을 내주는 체 하며 말했다.
"네 돈 아니라고 너무 편하게 즐기고 있는 것 아니야?"
"아, 아녜요. 여기서도 마틴게일 베팅법으로 하면..."
"너 바보냐? 카드를 받을 때마다 레이즈가 들어가는 포커판에서 어떻게 마틴게일을 쓴다는 건데? 상대 플레이어가 폴드하면 어떻게 하려고?"
"아앗..."
이 녀석, 이미 도박의 흥분으로 반쯤 맛이 가버렸다.
원래 이렇게까지 멍청한 녀석은 아니었지만... 도박판에서는 흔한 일이다.
나는 그녀가 돈을 좀 더 잃도록 내버려둔 다음 적당한 때에 끌고나왔다.
결국 오늘의 손실은 약 600만원이었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아, 아니. 조금만 더..."
"그럼 여기 계세요. 저는 갈테니까."
호다닥 칩을 챙겨서 나를 따라나온 서지유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도박으로 달아오른 몸과 머리가 겨우 식혀진 것 같았다.
"죄송해요 팀장님. 중간부터 조사에 대한 걸 완전히 잊어버려서..."
"훌륭한 연기였어. 아무도 네가 특수대 소속인 거 몰랐을 걸?"
"정말요?"
"그래.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니까."
"..."
살짝 희희낙락하던 서지유가 뒤늦게 쪼그라들었다.
어차피 조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서지유가 메소드 연기로 시간을 잘 끌어준 덕분에, 일반 구역은 물론이고 헌터 전용 구역의 출입자들도 대충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정도 재료가 갖춰지면 구워먹든 삶아먹든 내 마음대로다.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던 서지유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예상보다 규모가 훨씬 크더라. 손님들도 아주 줄을 서있고. 저 배는 사실상 범죄 공장이나 마찬가지야."
"그럼..."
"수사하자. 별로 어렵지도 않을 것 같아."
저렇게 대놓고 영업하고 있으면 조질 방법이 너무 많아서 고민 될 정도다.
나는 차에 몸을 실으며 딱 하나만 다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라 잃은 서러움 하나만큼은 제대로 느끼게 해주지."
"세상에."
밤늦게 귀가한 나는 김정태에게 지시를 내려두곤 집으로 올라갔다.
노곤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자 예리엘은 물론이고 앨리스와 티아까지 보였다.
셋은 제법 잘 지내고 있는 듯 했으나, 티아는 여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녀석은 현관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쪼르르 달려왔다.
"주인님, 어서오세요!"
"오. 살아있었네?"
"꽤 아슬아슬했어요."
티아가 냉큼 내 등 뒤로 숨자 예리엘이 엷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티아를 방으로 내려보내기 전에 녀석을 붙잡곤 물었다.
"정말로 하얀색 머리의 행방은 모르는 거겠지?"
"그, 그럼요! 제가 미끼 역할이라도 해볼까요?"
"됐으니까 얼른 가서 자. 넌 내일도 나랑 같이 간다."
"네!"
갑자기 하얀색 머리라니... 좀 당황스럽다.
티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잽싸게 사라졌다.
나는 앨리스에게 내일의 일정을 대충 설명하며 예리엘이 준비해준 간식을 깨작였다.
"선상 도박장 건은 내일 끝낼거야."
"그렇게 빨리?"
"굳이 오래 끌만한 건이 아니야. 정찰을 해봤는데 완전 개판이더라.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어."
"저도 갈까요?"
나는 예리엘의 질문에 살짝 기겁했다.
"아니. 당신 도박장 가본 적 없지?"
"네. 혹시 도박 경험이 필요한 일인가요?"
"그건 아니고. 도박장에 와이프를 데려가는 건 좀... 하다못해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말야."
카지노는 보통 실내에서의 흡연이 허용되는 경우가 많고, 이번 선상 도박장도 예외는 아니다.
밀폐된 공간이다보니, 공기 정화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담뱃재와 특유의 쩐내는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도박중독자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곳이다보니 분위기도 영 별로다.
당장 서지유만 봐도 날치기를 당할 뻔했다.
예리엘이 묘하게 기뻐하며 납득하자 나는 옆의 앨리스에게 잽싸게 덧붙였다.
얘는 여기서 한 마디 더 안 하면 무조건 삐진다.
"사실 너도 데려가고 싶지 않았는데..."
"늦었어."
앨리스는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그래서, 작전은?"
"가보면 알아. 사실 그리 대단한 것도 없으니."
우리는 냉큼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무실로 복귀했다.
티아는 사무실 식구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 안녕, 안녕! 사무실 카스트의 밑바닥, 주인님의 충실한 종복 티아가 왔어요!"
"헛소리 그만하고 앉아."
"넵!"
그래도 새 직장이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다.
녀석은 앨리스가 스마트폰을 두드려대는 것을 보곤 하루종일 끙끙 앓다가, 날이 저물어갈 즈음에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저도 이런 거 하나만 쓸 수 없을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지?"
앨리스가 냉랭하게 반응한 것이 무색하도록.
나는 열쇠로 잠겨있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최신형과 구형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이 우르르 나왔다.
"하나 골라."
"엣. 저, 정말요? 저는 그냥 해본 소리인데..."
"뭐야. 필요없어?"
"아뇨! 고마워요 주인님."
티아가 눈물까지 글성이며 스마트폰을 고르는 사이.
앨리스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티아에게 스마트폰을 준다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잠깐, 이거 설마..."
"당연히 대포폰이지."
"맙소사."
서랍을 열심히 뒤적거리던 티아는 이내 액정이 멀쩡한 아이폰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게 좋아요!"
"오냐, 잠깐 줘봐라."
녀석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에 글 따위를 쓰지 못하도록 조치해두곤 넘겨준 다음 사용법을 대충 가르쳐줬다.
슬슬 퇴근 시간이 될 즈음.
나는 마침내 오늘의 야근 인원을 발표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인원은 야간 출장이다."
"맡겨주세요! 오늘 컨셉은 어떻게 할까요? 어제랑 똑같이?"
"아니. 오늘은 변장 안 해. 애초에 지유 씨는 안 가도 돼."
"네에?"
서지유는 살짝 억울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오늘은 변장을 할 필요가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나는 앨리스와 티아, 그리고 김정태를 차출하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어차피 선상 카지노 자체는 법적으로 회색지대야. 기소해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그, 그럼 손님들은요?"
"손님들은 더하지. 어차피 상습 도박죄로 잡혀가봤자 금방 풀려나고, 헌터들은 상습 도박으로 인정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어."
애초에 도박 중독자들이 한 번 잡혀간다고 중독 증세가 나아질까?
그토록 쉽게 치료가 될만한 놈들이었다면 저런 수상쩍은 도박장에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예 가르쳐줄 생각이야."
"가르쳐 준다뇨?"
"도박은 무조건 힘 센 놈이 이기게 되어있다는 거. 한 번 제대로 보여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나는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하게 신이 난 티아가 앨리스의 손을 잡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나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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