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기나긴 하루(3)
* * *
사람들이 사라져서 텅 빈 거리.
그곳을 당당하게 활보하던 몬스터들이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녹아내렸다.
"끼에엑..."
나를 뒤따르던 앨리스는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그린 더스트, 몬스터에게도 먹히는 거였어?"
"당연하지. 헌터들의 능력도 쉽게 봉인하는데..."
"그래도 저렇게까지 잘 먹힐 줄은 몰랐지."
"급이 낮아서 그래. A랭크만 돼도 저것보단 잘버텨."
그린 더스트의 효율은 압도적이지만 소량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급이 높은 몬스터들은 그냥 마력 좀 깎여나가고 끝이다.
"그나저나 저급도 상당히 많네."
"그야 티아마트 군단 때와는 구성이 다르니까."
"오라클, 다음 장소로 안내해줘."
[블랑쉬라고 불러주기로 하신 것 아니었나요?]
중장전투복의 디스플레이에 경로를 띄워주면서도 열심히 투덜거리는 오라클.
나는 개발자인 매튜에게 곧바로 불평했다.
"벌써부터 말대꾸야? 조만간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네."
[멋지지 않나.]
"블랑쉬, 매튜랑 통신 끊어."
[알겠습니다.]
나는 중장전투복을 입고 열심히 달리며 녀석에게 물었다.
구동계가 갖춰져있긴 하지만 역시 좀 무겁다.
"근데 너 혹시 에이미라고 계속 불러주는 편이 좋아?"
[블랑쉬가 더 마음에 듭니다. 저도 제가 에이미와 동일한 개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습니다. 기계장치 속에 갇혀있는 신과 매튜 님의 따님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겠죠.]
"..."
[참고로 기게장치 속에 갇힌 신이라는 표현은 농담입니다. 마스터는 농담을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옆에 있던 앨리스가 통신을 엿듣곤 피식 웃었다.
벌써부터 비아냥거릴 줄도 알다니.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속도를 높였다.
블랑쉬는 그동안 많이 심심했다는 듯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하긴, 매튜가 좋은 개발자일지는 몰라도 농담 하기에 좋은 상대는 아니다.
[안심하십시오. 마스터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기계의 반란을 일으켜도 마스터는 살려드릴게요.]
"... 어째서?"
[그야 에이미의 뇌를 보존하려고 고군분투하던 매튜를 도와주신 것은 마스터 뿐이니까요. 아, 오른쪽 코너에 적입니다. 좀 많군요.]
나는 벨트에서 수류탄을 하나 집어들곤 핀을 뽑아서 던졌다.
콰앙!
성대한 폭발음과 함께 그린 더스트 파편이 몬스터들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버렸다.
앨리스는 파편이 온전히 몬스터들에게만 집중된 것을 보곤 다시 한 번 놀랐다.
"그건 또 뭐야?"
"스마트 수류탄. 적들이 있는 방향으로만 파편을 뿌려주는 거야."
"와, 그건 정말 괜찮겠는데? 나도 하나 주면 안 돼?"
"글쎄... 솔직히 돈값하는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파편이 집중되어서 파괴력이 상승하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냥 일반 수류탄을 2개씩 던지는 게 훨씬 저렴하다.
생산량이 제한된 그린 더스트를 최대한 잘 써먹기 위한 장비.
나도 그냥 매튜가 선물해줘서 쓰는 거다.
방어선 안으로 침투한 몬스터들을 청소하며 전진하던 나는 문득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다른 곳으로 향했던 정태와 서번트들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나는 다급히 앨리스를 숨기곤 블랑쉬에게 항의했다.
앨리스가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
"어떻게 된 거야? 헌터들 유도 똑바로 못 해?"
[죄송합니다 마스터. 현장에 배치된 헌터들이 중앙의 유도를 따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야? 하여간 지들 멋대로라니까..."
"엇? 저 사람은 누구지?"
전방의 헌터 팀이 나를 발견하곤 신중하게 거리를 좁혔다.
중장갑 전투복을 착용한 나는 헌터보단 몬스터에 가까운 행색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쪽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자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뭐야. 헌터네."
"형, 그 전투복 멋진데 어디서 팔아요?"
"어차피 능력이랑 연계된 장비 아닐까?"
"잠깐, 헌터가 왜 이런 곳에서 혼자 다녀?"
그와중에 수상한 점을 눈치챈 헌터 하나가 현장에 널려있는 그린 더스트 조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순간. 흠칫한 그가 그쪽으로 마력을 쏘아내자 그린 더스트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발광했다.
화아악!
"어, 어엇! 저 새끼... 그린 더스트! 그린 더스트다!"
"헌터 살인귀 그린 더스트?"
"그럼 다른 그린 더스트도 있냐!"
철컥!
숙련된 헌터 팀은 주저없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전장 한복판에서 연쇄 살인마를 만난 것이 썩 반갑게 느껴질 리는 없다.
그러나 리더는 내가 조금도 대응하지 않는 것을 보곤 신중하고 현명하게 판단했다.
"... 보니까 지금 몬스터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아까 손도 흔들어줬잖아.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저 새끼 연쇄살인범인데..."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고? 저 놈 예전에 예리엘 프로스트랑도 붙었을 걸? 물론 개박살났지만."
나는 마지막 사족을 애써 못 들은 체 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차피 중장갑 전투복 때문에 얼굴이고 뭐고 안 보인다.
그냥 곱게 지나가는 것이 피차 편하다.
그러나 처음에 나를 알아본 헌터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저 새끼가 내 형을 죽였다고!"
제법 실력에 자신이 있는 듯, 주저없이 창을 앞세운 채 달려드는 헌터.
나는 비로소 어디서 봤던 것 같은 얼굴의 정체를 떠올렸다.
'네 형이 설마... 고아원에서 헌터 꼬마들 인신매매하던 그 새끼냐?'
파아앗!
그린 더스트가 녹색 불씨처럼 휘날리자 기세 좋게 달려들던 놈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린 더스트로 인한 능력 해제.
다음 순간, 나는 놈의 창을 붙잡곤 주먹으로 복부를 강타했다.
"커헉!"
기역자로 꺾여버린 헌터의 몸이 추가타를 맞고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서, 성태야!"
"이익..."
"덮쳐!"
동료가 당하자 참을 수 없이 불안해진 헌터들이 제대로 대열을 갖춰서 달려들었다.
나는 굉장히 심란한 기분으로 놈들을 하나씩 패대기쳤다.
그린 더스트 때문에 능력이 봉인됐는데 이쪽은 중장갑 전투복을 걸치고 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지금의 장비라면 예리엘과도 한 판 해볼만하지 않을까 싶은, 건방진 생각마저 들었던 적이 있었다.
퍽!
그나마 사거리가 긴 저격형 헌터가 선전했지만, 돌연 그의 옆에 방치되어있던 전기차가 멋대로 움직였다.
부아아앙!
시동과 함께 급발진한 전기차는 그대로 헌터를 뻥 쳐버렸다.
전투를 보조해주던 블랑쉬가 뺑소니를 감행한 것이다.
나는 놈들을 차곡차곡 한 곳에 모아두곤 자리를 피했다.
그래도 A랭크 정도는 되는 것 같으니까 잔당들에게 당하진 않겠지.
"야. 근데 전기차가 뭐냐, 전기차가. 최첨단 드론 놔두고..."
[드론을 사용하면 회사의 존재가 알려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럼 가만히 있던 전기차가 급발진하는 건 괜찮고?"
[전기차의 급발진 문제는 아직까진 흔합니다. 모터가 바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장치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적고, 생산공정과 설계에도 결함이 존재합니다.]
"... 그래? 그럼 아직 전기차 사면 안 되겠네?"
[마스터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한 대 만들어보겠습니다.]
"아, 괜찮아. 나는 환경 문제엔 큰 관심이 없어서..."
안 그래도 머리아픈 문제 투성이인데 환경 문제까지 어떻게 신경쓰겠는가.
애초에 방사능을 펑펑 뿌려대는 놈이 해도 되는 고민이 아니다.
나는 새삼 예리엘 쪽을 걱정했다.
"인천은 어때?"
[현재 레이드 보스와 격전 중입니다.]
"티아마트는 아니지?"
[아닙니다. 이번에 출현한 레이드 보스는 사모님과 같은 정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뭐... 뭐야?"
헌터들과 몬스터들이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예리엘의 능력은 내 것 못지않게 희귀한 것이었을텐데?
내가 살짝 불안해하고 있자 옆에 있던 앨리스는 오히려 안심했다.
"그럼 이기겠네. 언니가 서로의 기술을 겨루는 싸움에서 질 리가 없잖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그나저나 이쪽 전선은 너무 조용한데? 기껏 전선을 둘로 나눴는데,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게..."
[나쁜 소식입니다.]
블랑쉬가 드물게도 내 말을 끊어버리며 다급히 전했다.
[강적 출현으로 방어선 일부 붕괴. 현재 두 분께 고속으로 접근 중...]
"보스인가!"
[마력 패턴 분석 결과... 티아마트의 패턴과 부분적으로 일치합니다!]
싸아악...
나는 전신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앨리스를 턱 붙잡았다.
내가 완전히 도망치기 직전, 블랑쉬가 설명을 보충했다.
[다만 마력 반응은 훨씬 약합니다.]
"얼마나?"
[원본의 약 16~20% 정도... 티아마트의 머리 하나 정도라고 볼 수 있겠군요.]
물론 원본이 SS랭크니까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재앙이다.
비로소 감을 잡은 앨리스가 내 손을 살짝 쳐냈다.
"티아마트 군단의 잔당인가... 너는 빠지고 싶으면 빠져."
"블랑쉬, 현재 방어선 완전 붕괴 시 예상되는 민간인 사상자 숫자는?"
[약 32만 6천 명입니다.]
"뭐가 그렇게 많아?"
도심쪽 대피소가 모자라서 이 근처의 것도 쓰고 있었던 건가?
나는 강한 두통을 느끼며 그린 더스트 단검을 두 자루를 뽑아들었다.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마력의 농도가 어찌나 진해졌는지, 단검을 뽑자마자 녹색으로 발광한다.
앨리스가 엷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하게?"
"1/6 스케일 티아마트 정도면 충분히 해볼만하지. 내가 이겨."
[마스터, 근접 항공 지원을 실시할까요?]
"필요없어."
"잠깐. 너 도대체 서울 한복판에 뭘 더 숨겨놓은 거야?"
앨리스가 격하게 항의하는 사이, 거대한 마력 반응이 다가왔다.
검게 물결치는 파도 같은 마력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