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기나긴 하루(2)
* * *
삐익, 삐이이익!
내가 겨우 옷을 다 갈아입었을 즈음.
요란한 경보 소리가 온 도시를 울려댔다.
6개의 머리를 가진 용, 티아마트 보다 더욱 강한 마력 반응.
그야 귀가 터져라 울어댈 수밖에 없겠지.
티아마트 때에도 사람이 제법 죽어나간 것으로 알고있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더할지 두렵다.
"그나저나 왜 또 하필이면 우리나라야?"
"그야 한국의 헌터 인구밀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으니까."
나는 그린 더스트제 단검의 상태를 살피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녀석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승해 있었는데, 덕분에 한예진은 잔뜩 쫄았다.
한국은 예전부터 인구밀도 하나는 세계적인 나라였다.
특히 수도권의 인구비율은 동체급의 국가들 중에선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은 헌터들의 밀도 또한 높다는 뜻이 된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등. 강하지만 땅이 넓은 국가에서 빡세게 구르던 헌터들은 평화를 찾아서 한국으로 귀화했다.
몬스터를 잡느라 정작 부모님의 장례에 참여하지 못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흔했다.
한국이 헌터 강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 덕분이기도 했다.
게다가 굳이 말하기 입아프지만...
한국에는 예리엘 프로스트가 있었다.
그러니 강력한 몬스터들이 한국으로 찾아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것이 결코 달갑진 않았다.
"일단 예리엘이 배치된 방향으로 가자. 여차하면 지원한다."
"알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예리엘에게 도움이 필요할까 싶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하지만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던 김정태를 차에 태우고 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앨리스에게 머쓱한 얼굴로 인사하던 그가 장비를 챙기던 중 이어폰에서 오라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마스터. 몬스터 웨이브의 진행경로를 표시했습니다. 위성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한 번 볼까."
이거야 원 빠르기도 하지.
역시 인공지능으로 전환한 보람이 아예 없진 않다.
나는 매튜가 이어폰 너머에서 잘난 체 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체 하며 황급히 몬스터들의 경로를 살폈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자마자 억, 하는 신음부터 새어나왔다.
"이게 뭐야... 양쪽에서 동시에 칠 생각인가?"
[레이드 보스는 예리엘 프로스트 씨가 배치된 인천으로 향하고 있지만 군단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예 병력을 둘로 나눴군요.]
"이동 속도는 또 왜 이렇게 빨라? 이대로 가면 저녁이 되기 전에 서울에 닿는데?"
[동쪽으로 오는 군대는 대부분 비행형입니다. 확인 결과 티아마트 군단의 잔당들도 섞여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협회 지휘본부에 이 사실을 알려줘. 익명으로!"
[이미 전달했습니다.]
확실히 일은 알아서 척척 잘 한다.
하지만 막상 몬스터들이 들이닥치면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차의 방향을 바꿨다.
"창고로 가자! 전투장비를 보관해둔 곳으로."
"네!"
한예진은 주저없이 교외로 차를 몰고나갔다.
무슨 회장님의 운전기사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속도를 높이며 신호위반까지 저질러대는 모습.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런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조금 있으면 도로가 꽉 막혀버릴 것이다.
부우우웅!
가까스로 시내를 빠져나온 차량은 인적이 드문 교외의 창고로 향했다.
세계 최고수준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한국의 수도권이라 해도, 휑한 곳은 정말로 휑하다.
거침없이 창고로 들어간 나는 먼저 도착해있던 서번트들의 인사를 받으며 조금 더 본격적인 장비를 챙겼다.
나를 따라들어온 앨리스는 창고의 내부를 보곤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회사 소유의 창고들 중에서도 가장 살벌한 축에 속한다.
"뭐, 뭐야 이게... 이 장갑차 진짜 굴러가는 거야?"
"그럼 가짜겠냐? 앨리스, 너 총 쓸 줄 알지?"
"응? 그야 저격소총이나 기관총 같은 것만 아니면..."
"그럼 이거 받아."
나는 특제 그린 더스트 탄환을 가득 채운 탄창과 권총을 앨리스에게 넘겨줬다.
그녀는 좀처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억지로 떠넘겼다.
"야, 이거 막상 써보면 편해. 사무실에 있던 거랑은 그린 더스트 함량부터 달라."
"... 그래?"
결국 내 말에 혹한 앨리스가 총을 챙겼다.
예리엘은 이미 결혼반지를 가지고 있으니 따로 챙겨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의상 아래에 입고있던 전투복을 벗곤 아예 후드와 일체화된 중장갑형 전투복을 걸쳤다.
앨리스는 이번에도 딴지를 잊지 않았다.
솔직히 이 녀석은 반응이 너무 솔직하고 빨라서 은근히 보는 맛이 있을 정도다.
"너 그런 것도 가지고 있었어?"
"나도 실전에서 써보는 건 처음이야."
"그건 또 언제 만든 건데..."
"사무실에 있던 거랑 큰 차이는 없어. 다만 이쪽은 비용을 아끼지 않았지."
마스터는 오라클의 존속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그래서 이 전투복 같은 경우에는 매튜가 직접 설계 및 제작해줬다.
제작자가 제작자인만큼, 오라클과 연동도 된다.
나는 전투복을 다시 벗곤 냉큼 배를 채웠다.
착용감보단 성능에 중점을 둔 물건이라서 오랫동안 입고싶은 물건은 아니다.
"앨리스 너는 어디 안 가도 돼?"
"언니가 이미 빼준 거 같아."
앨리스는 침착한 분위기의 창고를 돌아보며 설명해줬다.
에스콰이어인 김정태와 한예진은 물론, 서번트들도 묵묵히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솔직히 좀 부럽지?'
내가 씨익 웃고있자 눈이 마주쳐버린 앨리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자...
마침내 오라클에게서 연락이 왔다.
[황해 방어 부대와 몬스터 웨이브, 격돌 10분 전입니다.]
"동쪽은?"
[몬스터 웨이브 해안선 돌파. 현재 강원도입니다.]
동해안이 뚫렸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애초에 거기서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헌터들이 수도권에 몰려있기 때문에, 수도권 인근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빠르고 편하다.
애초에 놈들은 날아다닌다니까 상륙을 저지하는 것도 힘들다.
나는 다시 중장갑 전투복에 몸을 넣으며 명령했다.
"드론 출격시켜."
위이잉...
창고 아래에서 무수한 프로펠러들이 솟아올랐다.
소구경 기관포를 탑재한 군사용 드론.
앨리스는 이제 부끄럼도 잊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창고를 떠나기도 전에 속보가 들어왔다.
[몬스터 웨이브 하강 중... 착륙했습니다.]
"어? 날아서 오는 게 아니라고?"
[전선에 배치된 자주대공포와 교전 직후 작전을 전환한 것 같습니다.]
"아하. 몇 대 맞아보고 생각을 바꾼 건가."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비행형 몬스터들이 날아와봤자 대부분은 현용 항공기보다 훨씬 저고도로 침투하게 될텐데...
그래봤자 대공포 맞고 다 떨어진다.
물론 추락으로 인해서 도시의 피해는 늘어나겠지만, 군단의 입장에선 군단원들이 다 죽어버리니까 의미가 없다.
나도 소식을 듣곤 즉시 명령을 정정했다.
"드론 출격 중지."
"어? 뭐야, 안 보내줄 거야?"
"어차피 대공 전투가 아니면 씨알도 안 먹힐걸."
이런 류의 드론들이 다 그렇지만, 군사용이라곤 해도 어차피 소형이라서 화력은 매우 부족한 편이다.
지상의 몬스터 군단이 상대라면 거의 있으나마나한 물건.
까놓고 말해서 화력 자체는 일반 보병과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못하다.
나는 중장갑 전투복의 착용을 완료하며 오라클에게 물었다.
"시가전으로 해볼 생각인가? 아무리 그래도 기갑 부대는 좀 부담스러울테니..."
[그렇습니다.]
반면 대한민국 육군의 포병 화력은 변태 수준이다.
나는 대충 예상했던 전략에 주저없이 출동했다.
"오라클, 네가 임의로 지휘해. 아군 병력이 손실되지 않을만한 선에서 조금씩만 도와주자고."
[에이미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싫어. 솔직히 좀 소름돋아. 매튜, 인간적으로 이름 좀 바꾸자."
[그럴까?]
다행히, 매튜에겐 딸아이를 추억하고 싶다는 인간적인 감정 따윈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오라클은 본인의 초월적인 연산능력을 총동원하여 스스로의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중장전투복 때문에 밤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입는다기 보단 탑승한다고 하는 것이 어울리는 물건이다.
[그럼 블랑쉬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불어? '순백'이라니... 우리가 너를 물들이는 입장이라는 걸 기억하라는 뜻인가?"
[아시는 건가요?]
앨리스가 웬일로 지식을 피로하자 깜짝 놀라는 오라클.
솔직히 나도 녀석에게 이런 박식함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앨리스는 아주 떳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품 브랜드 이름이잖아."
[아하!]
"..."
확실히 그쪽이라면 훤히 꿰고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덕분에 키득키득 웃으며 전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저 멀리에선 벌써 폭발음과 비명 등 전투의 소음이 가득했다.
시민들은 이미 도시의 중심부로 피난을 마쳤을테니, 헌터들이 간만에 분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 너희도 가끔은 일 좀 해야지. 맨날 나쁜짓만 하지 말고."
"이제현. 진짜로 괜찮겠어? 너는 대인전 전문이잖아. 웬만하면 그냥 뒤로 빠져있지?"
웬일로 나를 진지하게 걱정해주는 앨리스.
나는 그래도 얘가 기본은 되어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예전에 전 세계 헌터를 죽이니 마니 했는데, 이 정도로 쫄겠냐?"
"엑... 그거 언니한테 업혀갈 생각이었잖아? 아니었어?"
"물론 업혀갈 생각이었지."
콰앙! 콰드득...
순식간에 전장으로 바뀐 도시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오라클이 짚어준 곳으로 향하며 대꾸했다.
"그래도 발목 잡을 생각은 없었어."
앨리스가 평소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나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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