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기나긴 하루(1)
* * *
화창한 토요일 아침.
나는 예리엘과 함께 프로스트 재단에서 운영하는 보육 시설에 방문했다.
깔끔한 디자인의 시설에는 좀 과하게 생기가 넘치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예리엘을 보고 잔뜩 흥분한 녀석들은 그녀 몰래 나를 열심히 때리거나 꼬집어댔다.
분명 예리엘과 결혼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리라.
"얘들아, 좀 떨어져봐..."
"큰언니를 돌려줘!"
예리엘은 그런 것도 모르고 화사하게 웃으며 나와 함께 시설을 돌아봤다.
확실히 내가 있었던 곳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겁도 없이 손님을 패는 것을 보니까 정말 자유분방한 환경에서 키우는 것 같다.
"서방님. 어떤가요?"
"좋은 시설이네."
나는 적당히 때가 묻어있지만, 결코 낡진 않은 시설을 보며 이야기했다.
시설이 무작정 새 것 같다고능사가 아닌 게... 그런 시설들은 기부금 사기를 저지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최소한 아이들이 시설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리엘은 오늘따라 조금 집요하게 물어왔다.
"간만에 아이들을 보니까 좋죠?"
"아, 나 사실 애들은 별로 안 좋아해. 여기 오니까 어릴적 트라우마도 생각나고."
"그렇군요. 그래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나요?"
"엑..."
내가 범죄자 헌터들을 상대할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에 몸을 떨고있자 때마침 다른 손님들이 왔다.
이름만 대면 알법한 정치인들에, 기업인들... 당연히 헌터 길드 운영자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지난번 비공식 청문회 때 만났던 놈들도 있었다.
"이야, 정말 좋은 시설이군요."
"어서오세요."
예리엘은 그들을 환영하면서도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맞춰서 얇은 허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게 된 그들은 얼굴이 무척 심란해졌다.
우리는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조금 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왜 갑자기 나를 불렀는가 싶었는데...
이제보니 이 모임 자체가 무슨 비공식 국무회의 같은 느낌이다.
예리엘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들에게 물었다.
썩 권위적이진 않았지만 도저히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말투였다.
"마석과 헌터 관련 물품의 매수는 잘 되고 있나요?"
"그게, 조금 지체되고 있습니다. 아직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대로 1년을 버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1년까지 버틸 필요도 없어요. 앞으로 4개월 정도만 지나면 다들 상황을 눈치챌테고, 가격이 폭등할테니까요."
예리엘은 무감정하게 웃으며 그들을 다그쳤다.
처음에는 다 똑같이 웃는 것 같았는데, 보다 보니까 적응이 된다.
"그 때부터는 사고 싶어도 못 사요. 자꾸 일정이 지체되면 정보를 조금 더 빨리 공개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기한에 맞춰서 물량을 확보하겠습니다."
"잘 됐군요."
나는 예리엘의 말에 고분고분 대꾸하는 놈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 보니 예리엘이야말로 비선실세다.
'이놈들 다 탄핵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정치인이라는 감투에 굳이 연연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놈들은 예리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나라는 헌터 죄수들의 수용에 인당 1천만원 이상의 돈을 매달 사용하고 있지만...
외국은 인당 3천만, 5천만을 사용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그러니 헌터 범죄자들의 처벌을 사실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운영중인 유일한 헌터 전문 교도소와 협회 본부의 구속실에는 예리엘의 정지 능력이 걸려있다.
예리엘이 그것을 풀어버리면 그 때부터 한국은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참고로 그린 더스트는 무척 희귀하고 비싼데다 공급도 불안정해서 수갑 같은 구속 도구에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다.
국가 정책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은 물론, 기부금까지 왕창 뜯어내던 예리엘은 볼 일이 끝나자마자 그들을 쫓아냈다.
나는 호위역으로 따라온 앨리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넌 이거 알고 있었어?"
"언니가 쟤네들 부려먹는 거? 당연하지. 아, 근데 저렇게까지 고분고분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앨리스의 감상에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쪽을 쳐다보는 예리엘.
나는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 때문인가.'
원래부터 살아있는 여신 취급을 받던 예리엘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전문 암살자인 나까지 품었으니...
이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서방님. 아까 맞춰주셨던 거 좋았어요."
"에이, 내가 뭘 했다고..."
열심히 손사래를 치고있자,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딱 치는 예리엘.
다음 순간. 그녀는 어디선가 익숙한 모양의 목줄을 꺼내들었다.
나와 앨리스는 그것을 보고 완전히 얼어붙었다.
회의실에 다른 사람들이 남아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봤자 회의실인데다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된 것이다.
"엇?"
"우리끼리만 있을 때엔 목줄 차고 있기로 했는데, 깜빡했네요. 이제 앨리스도 '우리'에 포함되는 거 맞죠?"
"아, 아니. 예리엘..."
"치마도 너무 긴 걸로 입고있어서 죄송해요. 이참에 찢어버릴까요?"
"아뇨. 한 번만 봐줄게요."
내가 거의 빌 듯이 말하자 예리엘이 주저없이 탈의를 감행했다.
앨리스는 얼굴을 화악 붉히며 내게 항의했다.
"저게 무슨 소리야?"
"저 목줄, 예리엘이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게 도대체 왜 거짓말이 아닌 건데? 언니, 정말 여기서 할 생각이야?"
"어쩔 수 없잖아."
순식간에 알몸이 된 예리엘이 가시가 가득 돋힌 말투로 앨리스에게 조곤조곤 설명했다.
나와 앨리스는 그 내용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서방님의 성욕을 제대로 처리해드리지 못해서 결국 네게도 손을 댄 걸?"
"으윽..."
"처음에는 좀 억울했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결국 내 잘못이더라고. 서방님께서 언제 어디서든 부담없이 사용해주실 수 있도록 배려를 했어야 하는데."
"그, 그만... 그만해."
내가 진심으로 애원하거나 말거나, 예리엘은 아예 목줄을 잠궈버렸으나...
직후. 우리들의 스마트폰이 삐익! 하고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회의 때문에 매너 모드로 전환해뒀는데도 울어대는 것을 보니 재난 경보인 것 같다.
"아앗! 이건..."
"몬스터 출현 경보네요!"
"젠장!"
나는 서둘러 열쇠뭉치를 뒤져서 예리엘의 목줄을 벗겨줬다.
앨리스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그 와중에도 딴지를 걸었다.
"그거 열쇠도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당연하지."
"언니는 왜 그걸 또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건데..."
앨리스도 묘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예리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옷을 안겨준 뒤에야 경보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저 게이트에서 발견... 초대형 몬스터 웨이브가 온다!"
"초대형? 확실해?"
"확실하니까 예리엘에게 연락이 왔겠지."
예리엘은 일단 은퇴한 사람이다.
물론 실력 면에서는 조금도 문제가 없다지만...
정부와 협회로선 그녀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더욱 커지는 것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리엘을 부른 것을 보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내 마음가짐이 많이 안이했군.'
게이트가 완전히 닫힐 때까지 약 10개월 남았다.
그 때문에 이런 대공세는 끝났을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다행히 예리엘은 놀란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차분히 출동을 준비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최악의 타이밍이네요. 지금이라면 평소보다 조금 더 고통스럽게 죽일 것 같아요."
"..."
"앨리스, 너는 호위 담당이야. 따라오지 마."
"응, 알겠어."
앨리스는 의외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떤 몬스터든, 빌런이든... 예리엘이 진심으로 싸우면 그녀를 건드릴 수나 있겠는가.
여기선 약하고 소중한 나를 지켜주는 것이 맞다.
예리엘은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서 휙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마이크가 달린 소형 이어폰을 착용했다.
"오라클."
"엑..."
앨리스가 옆에서 놀라거나 말거나, 나는 우선 에스콰이어들부터 찾았다.
"예진아?"
[네, 마스터!]
"당장 나랑 정태 장비 챙겨와."
[알겠습니다.]
한예진은 언제나 내 근처에서 대기중이고, 오늘은 휴일이라서 김정태도 가깝다.
앨리스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잠깐, 너도 싸울 생각이야?"
"준비 정도는 해도 나쁠 것 없잖아. 어지간히도 대공세인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만..."
"나도 여기서 실력발휘 하고싶진 않아."
나는 그대로 오라클을 사용하여 경보의 내용을 훔쳐봤다.
오라클의 할당량은 바로 이런 때를 위하여 아껴둔 것이다.
과연.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척 봐도 심상찮았다.
앨리스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옆에서 내 스마트폰을 훔쳐봤다.
"상황이 많이 나빠?"
"최악이야. 티아마트 때 보다도 마력 반응이 강하대."
"뭣?"
티아마트라면 옛날에 예리엘이 격퇴시켰던 SS랭크의 레이드 보스다.
심지어 '격퇴'라는 표현만 봐도 알 수 있듯, 완전히 죽이지도 못했다.
어쩌면 놈이 복수를 위해서 다시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티아마트에 비견되는 레이드 보스는 거의 없었으니까.
"몬스터 웨이브의 마력 반응은 졸병들까지 다 합쳐서 계산한 거긴 한데, 그래도 티아마트 군단 이상이라니..."
"티아마트 때는 잡졸들도 장난이 아니었지?"
"당연하지. 용족 몬스터들은 잡일이랑 보급 담당도 B랭크 이상이야. 전투병은 죄다 A랭크고."
내가 자리를 옮기자 한예진이 호다닥 차를 몰고 미끄러져왔다.
나는 뒷좌석에 몸을 던져넣으면서도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오라클의 기능 제한을 해제한다. 할당량을 다 써도 상관없어. 일단 내 동선 지우고, 협회측 움직임과 보고사항 계속 전달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번 대답은 서번트나 에스콰이어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목소리와는 명백히 이질적인 기계음.
누가 목소리 변조라도 돌렸나 싶어서 당황하고 있자 자세한 설명이 뒤따랐다.
[오라클 전용 인공지능 에이미, 시범 작동을 개시합니다.]
"..."
설마, 회사 측에서 벌써 인공지능 기능을 해금한 건가?
나는 순간 열이 확 올라서 마이크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매튜 이 새끼, 4개월 미룬다면서? 관련 시설도 증축해야 한다고 했잖아!"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일정을 크게 앞당길 수 있었다.]
개발 담당 마스터 매튜 마누엘은 미안한 기색조차 없이 담담히 대꾸했다.
[실전 테스트 하기 딱 좋은 상황이군. 그러지 말고 한 번 써봐라. 편할 거다.]
"야, 이번이 사상 최대 몬스터 웨이브인 거 몰라?"
[알고있어. 대신 이번 작전에 한해서 오라클의 할당량을 무제한으로 설정해주겠다. 현재 지원 가능한 에스콰이어들과 서번트들도 급파했다.]
그래도 매튜가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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