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회사(3)
* * *
회사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식사와 애프터눈 티까지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앨리스도 오라클에 대해서 알게 됐지만,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마스터들도 이 정도는 예상했을 것이다.
게다가 앨리스는 달리 친구도 없어서 기밀 유출 걱정도 크게 안 한다.
"그럼... 일단은 미루는데 성공한 거네? 4개월이라..."
"사실 일정이 크게 밀린 건 없을 거야."
나는 예리엘이 먹여주려는 마카롱을 어렵사리 사양하며 본심을 털어놓았다.
요즘 안 그래도 운동량이 부족한데, 과자까지 마구잡이로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앨리스가 냉큼 그것을 빼앗으려 하자, 차라리 살 좀 찌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냉큼 먹었다.
"아앗! 안 먹는다며?"
"남의 와이프한테 수작 걸지마라."
"아아..."
이상한 곳에서 기뻐하는 예리엘을 보고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다시 묻는 앨리스.
"일정이 크게 밀린 게 없다니?"
"어차피 관련 설비를 증축하는데에 시간도 좀 걸릴테고... 그 밖에 다른 밑준비들도 멈춤없이 진행할테니까."
"그, 그럼 뭐하러 보류한 건데?"
"그야 그린 더스트를 더 주기 싫었거든. 어쨌거나 보류로 결판났으니까 당분간은 그쪽에서 더 달라고 못 해."
내 그린 더스트는 체내의 특수한 기관에서 제조되는데, 그것을 혹사시키면 한예진에게 치유를 받아도 컨디션이 크게 하락한다.
특별 수사관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지금으로선 공급량을 늘리고 싶지 않다.
당장 나는 남은 휴가 기간 동안 요양에 들어갈 것이다.
"어차피 그린 더스트가 없으면 오라클의 개발을 진행하는데에도 제한이 걸려. 어디 다른 곳에서 그린 더스트를 구하지 못한다면 말이지만."
"잘 됐네. 어차피 너 말곤 그런 거 만들 수 있는 헌터도 없잖아."
"그렇지."
나는 오라클의 정체를 알게 된 예리엘의 반응을 예의주시 했으나...
다행히 그녀는 별다른 의심이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오라클의 부품은 최대한 합법적인 루트로 구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대로 호텔에서 휴식과 그린 더스트 제조를 반복하던 나는 김정태의 업무 보고를 받게 됐다.
지난번의 큰바다 이재한 사건은 사회 전반에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성접대라는 추악한 타이틀이 붙어버린 만큼, 헌터들이 대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지만...
특수대의 활동을 명백히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원래 헌터들은 인류를 구한 영웅들 취급이었는데 우리가 그들의 범죄행위를 속속 밝혀냈으니 좋을 수가 없다.
[당분간은 조금 조용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상부에서 몇 번이고 주의를 주더군요. 활동은 계속해도 언론 쪽은 좀 주의해달라고...]
"괜찮아. 당분간 좀 조용하게 처리하지 뭐. 뭣하면 보도제한 걸어버리면 그만이야. 다음 상대는 그리 거물도 아니고."
[그럼... 영속교를 건드리는 겁니까?]
"그래. 그 사이비 놈들이 다음 목표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수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줘."
[맡겨주십시오.]
"신소이 씨와 피해자들의 상태는 어떻지?"
[나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함께 지지의사 표명도 해줬고... 요즘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습니까.]
"다행이네. 그럼 수고해."
[예, 몸 조심하십시오.]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멀리서 나를 훔쳐보던 한예진이 조용히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마스터. 찾았습니다!"
"뭘 찾아? 아, 지난번에 네가 태워먹은 주석 모델 제품?"
"아뇨... 그거 역시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그럼 뭔데?"
"그것보다 훨씬 옛날에 찾아보라고 하셨던 거 있잖아요."
아하.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그게 이 타이밍에 나올 줄이야."
"회수할까요?"
"당연하지. 지금 당장 차량이랑 내 장비 준비하고, 현금도 있는대로 가져와. 나도 간다."
김정태가 있었다면 그에게 맡겼겠지만 지금 그는 한국에 있다.
이 건에 한해서는 수석 에스콰이어나 다른 회사원들도 믿을 수 없다.
한예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다닥 달려갔다.
그대로 30분 정도 지났을 즈음.
나는 남들 몰래 주차장으로 향해서 세단의 뒷좌석에 뛰어들었다.
현재 호텔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예진은 뒷좌석에 내 장비와 묵직한 현금 케이스를 준비해줬다.
"물건은 어디야?"
"가까운 블랙마켓입니다. 부인께선 괜찮으신가요?"
"아직 자고있어. 어제 좀 큰 걸 넣어서."
"엣..."
얼굴을 화악 붉히면서도 냉큼 시동을 거는 한예진.
나는 그린 더스트의 장비로 갈아입으며 계획을 설명했다.
"돈으로 살 수 있으면 그냥 사서 나올 거야. 그게 이치에 맞아."
"알겠습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요?"
"언제나 평화가 최고지만, 여차하면 그냥 엎어버리지 뭐. 그건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없어. 특히 이 타이밍에는 더더욱... 너는 옆에서 가만히 구경만 하고있어."
"네!"
그대로 운전을 하던 한예진은 정말 생각외의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알기로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저... 마스터. 정말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뭔데?"
"아, 아닙니다. 그냥 안 할게요."
"왜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그래? 얼른 물어봐."
"그, 그게... 결혼 생활, 괜찮으신가요?"
역시 그쪽이 궁금했던 건가.
한예진은 나를 오랫동안 모셨으니 대답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너무 좋아서 큰일이야. 이젠 여차할 때에도 등 뒤에서 찌를 자신이 없어. 물론 그래봤자 맞아주지도 않겠지만."
"아하하... 그건 그래요."
"다른 건 몰라도 오라클 능력 종류까지 줄줄이 맞추던 건 진짜 소름돋더라. 어후..."
"그, 그래도 행복하시죠?"
"좋아 죽겠다니까. 예리엘이 보기보다 엄청 화끈..."
"와아앗! 도, 도착했습니다 마스터."
"그래, 후딱 끝내자."
인적 드문 골목의 클럽으로 위장하고 있는 암시장.
각종 헌터 관련 물품도 취급하고 있는 그곳에선 내가 찾아헤멨던 물건이 경매되고 있었다.
나는 돈을 아끼지 않고 써서 그것을 낙찰받았다.
예상보다 조금 많이 쓰긴 했지만, 이것을 회수하는 것은 나의 의무였다.
그런데, 케이스를 든 한예진은 차량으로 돌아가다말고 갑자기 몸을 굳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뒷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곤 살짝 놀랐다.
"앨리스? 네가 왜 여기있어?"
"네가 허둥지둥 외출 준비를 하길래 저 여자를 따라와봤지."
차의 트렁크에 숨어있었던 듯한 앨리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물건이란 게 뭐야? 왜 언니 몰래 살금살금 온건데?"
"그야 별로 자랑스러운 게 아니니까."
"뭐?"
나는 차 안에서 기꺼이 케이스를 열어보였다.
묵직한 금속제 케이스가 완전히 개방되기도 전에 밖으로 새어나오는 녹색의 광채!
내가 블랙마켓에서 구매한 것은 다름아닌 그린 더스트였다.
앨리스는 그것을 보곤 무척 혼란스런 얼굴이 됐다.
"이, 이게 왜 암시장에 유통되고 있어?"
"내가 예전에 팔았어."
"뭐라고? 어째서?"
"우리 회사 초창기... 그러니까, 마스터인 일레네 윌슨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여유 자금이 별로 없었거든? 그래서 그린 더스트를 팔아서 당시에 필요했던 자금을 얻었어."
오라클의 개발과 유지보수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갔는데...
그린 더스트는 당시에도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다.
그래서 나는 그린 더스트를 판매하여 매튜 마누엘에게 돈을 대줬다.
내가 마스터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의 투자 덕을 본 것도 있다.
매튜 마누엘은 그래봬도 은혜를 잊지 않는 사나이인 것이다.
"단순 재료 공급자 주제에 마스터가 될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이래봬도 창립 멤버였다는 거지."
"아... 그래서 그걸 뒤늦게 회수하러 오셨다?"
"맞아. 이걸 놔두면 범죄자 헌터들이 요긴하게 써먹거나, 아예 회사 측에서 사들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회사 측 서번트와 에스콰이어들에게 부탁하지 못했다.
수석 에스콰이어는 믿을 수 없을만큼 유능한 사내였으나, 그는 매튜의 전속이다.
앨리스는 눈매를 파르르 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뭐라고 해야하지... 내가 널 좀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신경쓰지 마. 너는 특별 수사대의 감찰위원이야. 나를 의심하는 것이 네 역할이지."
"... 고마워."
내 위로에 들릴 듯 말 듯 작게 대꾸하는 앨리스.
나는 때마침 알리바이가 필요했는데 잘 됐다고 생각하며 운전석의 한예진에게 주문했다.
"여기서 두 번째로 좋은 관광지로 가자. 그 정도는 조사해뒀지?"
"당연합니다 마스터!"
"뭐야, 왜 제일 좋은 관광지가 아니야?"
"제일 좋은 관광지를 뭐하러 너랑 가냐? 나중에 예리엘이랑 가야지."
"..."
앨리스는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녀석은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동안 다른 방식으로 나를 갈궈댔다.
아까전에 트렁크에서 나와 한예진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근데 너 언니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아, 아니. 부부끼리 이것저것 즐길 수도 있지."
"뭘 어떻게 즐기면 S랭크 헌터가 아침에 일어나질 못하는 건데..."
나는 맞받아치고 싶었으나 그러면 성희롱이 될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당하고 있었다.
물론 이 원한을 잊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조금 뒤에 깨어난 예리엘과 합류하여 느긋하게 관광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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