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회사(2)
* * *
편안한 기분으로 호캉스를 즐기던 우리는 사흘째에 회사로 향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소집된 정기 회의.
이번의 의제는 대충 짐작이 간다.
창문이 완전히 가려진 승합차에 몸을 싣자 오래지 않아 회사에 도착했다.
넓고 휑한 지하 주차장에 마중을 나온 것은 회사의 수석 에스콰이어였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그는 3인의 마스터 다음가는 실세라고 봐도 될 정도다.
그래도, 마스터와 에스콰이어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는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먼 길 오시는데 불편은 없으셨을지... 정기 회의에 참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편했어. 준비가 워낙 잘 되어있어서."
"영광입니다. 그럼 바로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래. 아, 이건 선물."
한예진이 내 신호에 맞춰서 묵직한 케이스를 건네자 수석 에스콰이어가 활짝 웃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다른 마스터들께선 먼저 도착해계십니다."
"기다리게 만들었네."
바짝 긴장한 채 지하 시설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앨리스는 오래지 않아 대기실에 남겨졌다.
사실 예리엘이 회의에 같이 참석하는 것도 파격 중의 파격이다.
쓸데없이 넓은 느낌의 회의실에는 다른 두 명의 마스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먼저 인사부터 건넸다.
사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친한 체라도 해야하는 관계다.
"늦어서 미안하다. 다들 잘 지냈나?"
"예리엘 프로스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기다려야지."
둘 중 먼저 대꾸한 것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일레네 윌슨.
회사의 조직 구성을 거의 전담하다시피한 마스터다.
에스콰이어들과 서번트들의 채용은 그녀가 전담하고 있다.
이번에 예리엘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일레네의 찬성이 있었던 덕분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어서 발언한 초로의 사내는 그녀보다 조금 더 오래된 관계였다.
백의를 걸친 오라클의 개발 담당, 매튜 마누엘은 시작부터 나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좀 급히 부른 감이 있는데 와줘서 고맙네."
"1년에 한 번 모이는건데 뭘."
나는 매튜 마누엘의 정중한 인사에 주먹을 꽉 쥐었다.
원래 저 매드사이언티스트가 저렇게 예의바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안건이 실제로 올라올 것 같다.
"그나저나 결혼 축하해 그린 더스트. 도대체 어떻게 예리엘 프로스트를 꼬셨대?"
일레네 윌슨은 예리엘을 보고 탐욕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인재 욕심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예리엘은 엷게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사실 제가 꼬셨어요."
"아앗, 보기보다 순정이 있으셨구나?"
"그럼... 슬슬 회의를 시작하지."
매튜 마누엘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주저없이 회의를 개시했다.
그는 오라클의 개발과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있는만큼, 마스터들 중에서도 발언권이 가장 강력했다.
조직을 총괄하는 일레네는 그보다 좀 아래고... 나는 한국에 체류하느라 마스터들 중 발언권이 가장 약하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1인분 정도는 된다.
"오라클의 사용 실적은 전년도 대비 300% 가량 증가했다. 드디어 너희들이 내 위대한 발명품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겠지."
"지당하신 말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매튜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오라클은 실제로 위대한 발명품이었으며, 우리들은 지금껏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라클을 만들어낸 매튜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신감을 조금 잃어버린 목소리가 됐다.
"하지만 오라클의 개발은 전년에 비해서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사실상 핵심 기능 쪽은 작년과 똑같다고 봐도 된다."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
일레네가 최대한 부드럽게 묻자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하는 매튜.
"부품의 호환성이 너무 낮아. 그래서 4번째 능력을 추가하는 작업이 끝없이 지연되고 있다."
"해결 방법은? 연구 및 개발 부서의 지원을 늘릴까?"
"아니.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부품을 무작정 끼워맞춰보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는 방법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시. 내가 우려했던 방향으로 차츰차츰 나아가고 있다.
나는 매튜에게 다급히 질문했다.
"질문이 있다."
"뭐지?"
"4번째 능력을 추가하는 작업에서 이렇게 지연되고 있다면, 5번째나 6번째 능력은 추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건 아니다. 지금 시도중인 4번째 능력의 추가야말로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일단 오라클이 4번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면, 5번째와 6번째는 쉽다. 그 때부터는 일종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예상하고 있다."
"그렇군."
좀 애매모호한 설명이었지만 나는 납득했다.
오라클의 완성이야말로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니까, 개발에 관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예리엘이 무척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매튜가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방법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오라클에게 일일이 부품을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라클 본인이 스스로를 완성하도록 허락해줘야 한다."
"스스로를 완성시킨다고?"
"그래. 나는 오라클을 인공지능 컴퓨터로 전환하고싶다."
"..."
여기까지 와서 오라클에게 지성과 자유를 부여하겠다니.
SF장르에서 인공지능의 반란이 얼마나 진부한 소재인지 모르지도 않을텐데?
나는 역시 가장 먼저 오라클의 폭주 가능성부터 걱정하게 됐다.
"만약 인공지능을 부여한다고 치면, 통제는 가능한 건가?"
"그린 더스트가 있으면 큰 문제는 없다. 지금도 능력 조절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물론 관련 설비는 증축해야겠지."
하긴. 매튜가 그리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분명 본인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써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겠지.
오라클은 그의 역작이지만... 그 역작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반기를 들도록 허락하진 않을 것이다.
그 때 멀찍이 앉아있던 일레네가 질문했다.
"정상적으로 전환에 성공한다고 치면, 완성일이 많이 당겨질까?"
"오라클이 직접 부품을 골라준다면 작업 속도는 수십배 이상 빨라진다. 나는 완성까지 약 6개월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6개월..."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특별 수사대는 플랜 A에 불과하다.
플랜 B인 오라클의 완성은 성공 확률도 훨씬 높고, 효과도 더욱 좋다. 게다가 이쪽 플랜이 훨씬 오래 됐다.
매튜도 그것을 잘 아는지라 열심히 나를 설득했다.
"네 보고가 사실이란 것은 확인했다. 앞으로 약 10개월 뒤에 게이트가 완전히 닫힌다면, 더더욱 오라클의 완성을 서둘러야 한다."
"재료와 동력원은 이미 넘치도록 사재기를 해뒀을텐데?"
내가 그렇게 대꾸하자 슬쩍 웃는 일레네.
매튜는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정말로 헌터들의 폭주를 막고싶다면 오라클이야말로 완벽한 정답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라클의 폭주를 막아야 할지도 몰라."
"나를 믿어라.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매튜. 네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그럼 이쯤에서 표결에 들어가지."
표가 단 3개 뿐인 투표!
매튜는 제안자니까 당연히 찬성이다.
일레네는 내 예상대로 중립을 선언했다.
그녀는 이미 오라클을 이용해서 충분한 이득을 거두고 있었다.
이대로 현상유지가 되어도 좋고, 발전이 되면 더더욱 좋다는 입장이다.
나는 마음 같아서는 반대를 하고 싶었으나...
매튜의 한 표와 내 한 표는 똑같은 한 표가 아니다.
같은 마스터라도 발언권이 다르다.
결국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결단을 내렸다.
"나는... 보류를 제안할게."
"보류? 얼마나?"
"9개월! 지금부터 9개월만 더 기존의 방식대로 해보고, 그래도 개발에 진전이 없으면 나도 찬성하겠어."
매튜가 제안한대로 하려면 그린 더스트가 더 많이 공급되어야 한다.
그러니 내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작게 침음을 삼켰으나, 냉큼 납득하진 못했다.
"9개월은 너무 길어. 게이트가 완전히 닫히는 게 앞으로 10개월 이내라고 하지 않나. 오라클의 완성이 너무 지연되는 것은 네게도 좋지 않을텐데?"
"그럼 6개월."
나는 망설임 없이 기간을 줄였다.
애초에 이럴 줄 알고 좀 길게 불러봤다.
일레네도 이쯤에서 의견을 표했다.
"나도 6개월 보류에 찬성."
"여전히 너무 길어. 6개월 동안 부품들과 씨름해야 하는 것은 나란 말이다... 4개월로 하지."
"좋소. 4개월!"
게이트가 닫힐 때까지 남은 시간이 약 10개월.
그런데 4개월 째에 개조를 실행한다고 치면,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 즈음에 오라클이 완성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미루고 싶었지만 어쨌든 시간을 벌었다.
합의를 마친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나누곤 훨씬 덜 중요한 사안들을 논의했다.
오래지 않아 회의가 끝나자, 나와 함께 오라클의 본체를 보러 가게 된 예리엘이 엷게 웃었다.
지하 시설의 끝에서 수많은 파이프에 둘러싸인 기계를 목도한 그녀는 이미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몇 겹이나 되는 장갑과 냉각 장치로 중무장한 오라클은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다.
"이게 오라클...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뭐가?"
"인공지능 컴퓨터는 일반적인 컴퓨터와 굉장히 많은 부분이 다를텐데, 서방님과 마스터들은 그걸 아주 쉽게 취급하셨어요.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기능을 해금하는 것처럼요."
"..."
역시 예리엘은 보통이 아니다.
곁에 있던 일레네와 매튜도 명불허전이라는 듯 쓴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우리들의 앞에서 오라클의 정체를 밝혔다.
"오라클은... 생체 컴퓨터인 거죠? 앞서 말한 '부품'은 헌터나 몬스터들의 시체겠군요."
"맞네."
예리엘이 당장 오라클을 부수기라도 할까봐, 허둥지둥 나서는 매튜.
그는 예리엘의 눈치에 감탄하면서도 자랑스레 설명했다.
"하지만 문제가 될만한 부품은 사용하지 않았어! 천리안과 투시 능력을 부여하는데에 쓰인 안구는 전투 중 사망한 헌터의 시체에서 적출했지. 사망 이후에도 안구에 능력이 남아있었어."
"그럼 원격 간섭 능력은요? 오라클은 분명 전원이 없는 전자기기에도 엑세스 할 수 있었죠?"
오라클이 지닌 능력의 종류까지 맞춰버리는 예리엘.
매튜는 헛웃음을 보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S랭크 레이드 보스, '보이지 않는 손'의 팔이다."
"아하. 저도 그 레이드에 참여했죠."
"그래. 네겐 감사하고 있어.
"별 말씀을요. 마지막으로 핵심 중의 핵심. 전자 정보를 자유롭게 조작하는 딥 다이브 기능은 어디서 얻었죠?"
"내 딸이다."
새삼 등 뒤의 오라클을 돌아본 매튜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10년 이상 병을 앓다가 죽은 내 딸... 에이미의 두뇌가 오라클의 기반이다. 부품들의 거부 반응은 보통 에이미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서방님을 통해서 말씀하셔도 돼요."
"그건 정말 든든하군."
오라클의 냉각 장치를 손으로 짚어보던 예리엘은 정중히 인사하곤 나와 함께 몸을 돌려서 방을 나섰다.
그녀의 옆모습은 평소보다 조금 더 슬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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