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큰바다(3)
* * *
앨리스와 함께 아침 일찍 출근한 나는 주저없이 업무 지시를 내렸다.
팀원들은 큰바다 이재한의 진짜 모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큰바다가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미 이긴 거나 마찬가지네요. 이런 증거 영상을 남겨뒀다면 게임 끝이잖아요."
신이 나서 멋대로 지껄여대는 서지유.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범죄가 발생한 시점에서 이미 패배야. 남은 건 패전처리를 얼마나 잘 하느냐 뿐이지."
"아... 죄,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게다가 이번 사건은 그녀의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웬일로 진지하게 반성하는 서지유의 옆에서 이서우가 그 사실을 눈치챘다.
이건 그의 전문분야라고 볼 수도 있었다.
"증거 영상만 가지곤 모자랄 거에요."
"네? 어째서..."
"나는 퇴근한 뒤에 참고인을 만나러 갈거야. 정태야, 너는 이제부터 팀원들과 함께 24시간 교대로 이재한을 감시해. 최대한 빨리 결판 낼테니까 그동안 그 새끼 잘 보고있어."
"알겠습니다 팀장님. 가죠, 서우 씨."
"아, 예!"
팀원들 중 일부와 이서우가 우르르 일어나자 서지유가 내게 물었다.
"저는 할 일 없나요?"
"지유 씨는 커피나 돌려."
"저 진지해요!"
"아니, 소 잡는데 닭 잡는 칼을 쓰면 망하잖아. 이번에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그거 원래 이럴 때 쓰는 말 아니잖아요..."
하지만 퇴근 직후 '소 잡는 칼'을 보게 된 서지유는 군말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서지유도 미인이지만, 예리엘은 볼륨감부터 다르다.
유전자 단계에서 반칙을 저지르는 생태계 교란종!
오늘따라 조금 더 힘을 줘서 차려입고 온 그녀가 나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앨리스, 같이 갈래?"
"당연하지."
"너는 좀 사양해라."
작게 툴툴거리긴 했지만, 앨리스는 내 호위역이라서 같이 가는 것이 맞다.
간단히 식사를 해결한 우리는 시간에 맞춰 영화관에 들어갔다.
올 상반기 최대 기대작의 시사회.
그것도 주조연 배우들이 참가하는 시사회였다.
우리들의 목표는 영화의 주연 배우인 신소이.
10여년 전에는 무명이었지만, 지금은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다.
"하루 전에 용케도 표를 얻어냈네."
"그 정도야 쉽죠."
신소이를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해선 이번 시사회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당연하지만 참석권은 예리엘이 구해줬다.
처음 결혼했을 때만 해도 걱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내가 그녀를 아주 요긴하게 써먹고 있어서 살짝 미안할 정도다.
그런데, 시간에 거의 딱 맞춰서 극장에 들어간 우리는 난데없는 기립박수를 받게 됐다.
"그럼 오늘의 시사회에 특별히 참석해주신 예리엘 프로스트 님과 이제현 특별 수사관님께 감사를 표하며..."
'세상에.'
예리엘과 함께 다니면 이런 낯뜨거운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 건가?
나는 주연 배우인 신소이를 힐끔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우리가 왜 왔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면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괜히 미안한 기분도 잠시.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자, 기묘한 죄책감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대한민국 톱 배우니 뭐니 해봤자 영화 고르는 안목은 영 별로인 것 같다.
'이건... 각본부터 답이 없군.'
배우들이 열연을 해봤자 각본 문제는 어쩔 수가 없다.
옆자리의 예리엘도 쓴웃음을 보이고, 앨리스는 아예 표정 관리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대로 배우들의 인터뷰 등 간만에 문화생활을 즐기던 우리는 너무 늦지 않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나와 예리엘이 개인실이 있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기다리자 이윽고 앨리스가 신소이를 데리고왔다.
같은 길드나 연예계는 아니라지만, 예리엘이 부른다는데 거부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예, 예리엘 선배님. 시사회에 참석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라뇨. 저희 같은 년도에 활동 시작하지 않았던가요?"
엷게 웃은 예리엘이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신소이는 본인이 왜 불렸나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시간을 끌지 말고, 단숨에 괴로운 부분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자고로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사실 신소이 씨에게 몇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수, 수사관 님이... 제게요?"
내가 본인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자 대뜸 얼굴을 굳히는 신소이.
나는 S랭크 헌터 한 명에 길드 하나를 통째로 장사지냈으니 그럴만도 하다.
멋모르고 설쳐대던 헌터들에게 특별 수사관은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큰바다 이재한 씨,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죠?"
"!"
이재한의 이름을 듣게 된 신소이의 눈썹이 불쌍할 정도로 크게 떨렸다.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하건만, 그녀는 유명한 배우답게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재한 씨요?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는데요..."
호칭만 봐도 이상하다.
보통 헌터들이 이재한을 지칭할 때엔 이재한 선배님이라고 한다.
그는 헌터들의 여명기부터 줄곧 활약해온 대선배인 것이다.
당시에는 사망률의 자릿수가 달랐기에, 현역 헌터들은 모두 이재한에게 크고 작은 경의를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성상납을 강제당한 신소이로선 도저히 경어를 쓸만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리라.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다 알고 있습니다. 큰바다 이재한의 소름끼치는 정체도, 그에 휘말린 피해자들의 명단도."
"..."
"특별 수사대는 현역 S랭크 헌터인 유시현도 잡아들여서 처벌했습니다. 부디 저희를 믿고 사실대로 말씀해주세요."
신소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나에 대한 원망이 깃들었다.
"몰라요,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구요."
그녀가 이러는 것도 당연하다.
안 그래도 추문... 특히 이런 성 관련 추문에 극도로 취약한 것이 연예인들이다.
그런데 겨우 최정상에 도달한 그녀가 성상납 사건 같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것이 바로 성 관련 사건의 난점이다.
'기껏 범인을 붙잡아도, 정작 증언을 해줘야 할 피해자들이 숨어버린단 말이지...'
예전에 비슷한 사례를 경험했던 이서우도 이 사태를 짐작하곤 불안해하던 것이었다.
신소이의 얼굴에 드러난 생각은 명확했다.
이제야 겨우 잊어버렸는데. 나는 이미 상관없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그렇게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말이냐!
너무도 역겹고 고통스러운 기억이기에 괜히 나까지 원망하는 모습.
하지만 나는 쉽게 물러날 수가 없었다.
비록 영상 증거물이 있다 해도, 피해자들의 증언은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피고인 측에서 화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형량이 극도로 낮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불법 촬영에 채용비리 정도로 엮어봤자 어림도 없어. 그 정도론 변호사 써서 무조건 빠져나온다.'
이재한 정도의 거물이라면 강제추행으로 고발해야 승산이 있다.
그리고 이런 류의 범죄는 '개인적 법익에 대한 죄'로 분류되기 때문에, 반드시 피해자의 처벌 의사가 필요하다.
사람을 죽이거나 공무 집행을 방해하는 등의 범죄와는 결이 좀 다르다.
"왜... 왜 하필 저인가요... 다른 사람들도 많잖아요."
이제 신소이는 아예 흐느끼고 있었다.
내가 하필이면 신소이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는 간단했다.
'당신이 피해자들 중에서 가장 잘 나가고 있으니까.'
정상급의 영화 배우인 신소이가 먼저 포문을 연다면 다른 피해자들도 기꺼이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게다가 다른 피해자들은 이재한이 손을 쓸 수도 있다.
놈은 비열한 방법으로 성상납을 받았으니, 똑같은 방법으로 증인들의 입을 막아버릴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신소이는 급이 굉장히 높은 연예인이니 승산이 충분하다.
예리엘이 그녀를 토닥여주는 사이.
나는 신소이에게 미안한 소리를 했다.
"당신 왜 피해자 행세야?"
"... 예?"
"자, 잠깐. 뭐라고?"
신소이는 물론이고 앨리스도 화들짝 놀라며 나를 질타했으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끝까지 간다.
"신소이 씨. 이재한이랑 한두 번 만났던 거 아니죠? 그리고 만날 때마다 공중파 프로그램에 출연했잖아요. 덕분에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구요."
"그, 그건..."
그럼 그와중에 챙길 거 다 챙겼네요? 그래서 증언을 거부하는 겁니까?"
"이제현!"
버럭 고함을 지른 앨리스가 나를 죽일 듯 노려봤으나, 예리엘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는 수치심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있는 신소이를 몰아붙였다.
"이재한이 다른 피해자들에게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자기가 바닥에 있던 신소이를 끌어올려줬다고, 자기 좆만 잘 빨아주면 너도 신소이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단 말입니다!"
"흑... 흐윽..."
이것은 영상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이재한은 진짜로 그딴 소리를 지껄여댔다.
"억울하지도 않아요? 그런 식으로 이용당한 후배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그, 그만! 제발 그만하세요!"
"..."
"소이 씨. 그 때의 소이 씨는 어리고 힘도 없었지만, 이젠 아니에요. 그 누구도 소이 씨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나는 흐느끼는 신소이를 예리엘과 단둘이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나를 따라나온 앨리스가 대뜸 내 멱살을 쥐고 벽으로 몰아붙였다.
"야, 너 미쳤어? 그게 피해자한테 할 소리야?"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이딴 게 네 방식이라면 나는..."
"앨리스, 진정하렴."
뒤늦게 나를 따라나온 예리엘이 앨리스를 말렸다.
앨리스는 무척 억울한 얼굴로 그녀에게 항의했다.
"언니!"
"더 잔인하게 할 수도 있었어."
"... 뭐라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하는 예리엘.
"제현 씨는 이미 영상을 가지고 있었어. 그걸 보여줬다면 쉽게 협력을 약속받을 수 있었을 거야. 신소이 씨가 부정해봤자, 어차피 재판 때 증거물로 제출될테니까. 여차할 때엔 언론에 뿌린다고 할 수도 있고."
"그, 그럼 왜 굳이 저딴 짓을..."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신소이 씨의 선택권은 사라져. 그렇게 강제적으로 증언해주는 게 아니라, 본인의 선택으로 증언해주는 게 최고야. 그래야 10년 전의 악몽같은 경험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어."
"..."
앨리스는 한참동안 나를 노려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침묵을 깨뜨린 것은 드르륵, 하는 미닫이문의 소음이었다.
"... 할게요?"
"네에?"
"증언... 할게요. 내일 공식적으로 발표하겠습니다."
방에서 나온 신소이는 눈물 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전에 없던 독기가 서려있었다.
그녀는 현역 연예인이었으나, 동시에 현역 헌터이기도 했다.
나는 헌터들 특유의 자존심을 믿고 있었다.
"대신 놈을 완전히 끝장내주세요."
"물론입니다."
다음 날 저녁.
신소이는 약속을 지켰다.
이젠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