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큰바다(2)
* * *
여유롭게 저녁식사를 마친 나와 예리엘은 길드의 훈련장 중 한 곳에 입장했다.
예리엘의 개인 훈련장은 길드를 탈퇴한 이후에도 줄곧 그녀의 것으로 남아있었다.
애초에 그녀의 스펙에 맞춰서 건축한 곳이라 다른 사람은 제대로 쓸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런 호화로운 훈련장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천천히 공방을 겨뤘다.
나는 작전 도중 그녀와 마주치면 정신없이도망쳤기 때문에, 서로의 실력을 제대로 겨뤄볼 기회는 없었다.
짧은 대련 결과. 나는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리엘은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제대로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그녀는 빈틈이 없었다.
그녀가 S랭크의 헌터인 것은 단지 그 이상의 등급이 없기 때문이다.
"우와, 못 이기겠네."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한 번 해보실래요? 원래 서방님은 단검 같은 걸 들고 계셨잖아요?"
"아니. 그걸 쓴다고 결과가 바뀔 것 같진 않아."
그린 더스트로 만든 단검이 내 전투력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맞지만...
예리엘과 내 사이에는 아주 큰 벽이 하나 놓여있는 느낌이었다.
예리엘은 뒤늦게 나를 위로해줬다.
"서방님도 S랭크 상위권 정도는 충분하겠는데요?"
"그런 위로 받고싶지 않아. 비참해진단 말야."
"저는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요."
가볍게 농담을 나누며 신혼집으로 돌아가자 머지않아 아까전의 약속 상대가 나타났다.
조심스럽게 현관을 두드린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바, 밤중에 죄송합니다!"
"제가 약속 시간을 잡았는데요 뭘."
"오랜만이에요. 최나현 양이죠? 어서 들어오세요."
"아앗..."
아까 로비에서 나를 붙잡았던 연예인 겸 헌터, 최나현이 감격에 몸을 떨며 거실로 들어왔다.
까마득한 대선배가 본인의 이름을 기억해줬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것이다.
같은 길드 소속이라곤 하지만, 윈터 킹덤은 업계 1위의 초대형 길드답게 워낙 길드원이 많았다.
게다가 예리엘은 헌터로서의 급이 너무 높아서 앨리스를 포함한 몇몇 동료들만 겨우 다가갈 수 있는 존재였다.
먼저 들어와 있었던 앨리스까지 합쳐서 총 네 명이 거실에 앉았다.
최나현은 긴장한 나머지 선뜻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아까 상담할 게 있다고 하셨죠?"
"네. 가능하면 두 분께 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무슨 문제죠? 일단 들어보고 생각하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헌터면서 연예계 활동도 하고 있어요."
왜 모르겠는가.
헌터 걸그룹, 윈터 시스터즈의 리더 최나현이라면 꽤 유명하다.
그쪽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도 들어봤을 정도니까 충분히 톱급이라고 봐도 되겠지.
나는 최나현의 긴장을 풀어줄 겸, 앨리스에게 말했다.
"너희 길드 네이밍 센스 진짜 최악이야."
"길마 언니 센스가 좀 그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북두칠성보단 낫잖아."
앨리스도 이미 반쯤 포기했다는 듯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최나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런데 헌터 연예인 친구 중에 그... 상납을 요구받은 친구가 있어서요."
"사, 상납? 설마 제가 아는 그 상납이 맞아요?"
앨리스가 더듬더듬 묻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최나현.
연예계에서 상납이라면 보통 성상납을 뜻한다.
나는 그제야 대충 견적이 보였다.
"상납을 요구한 쪽이 말도 안 되게 높은 사람인 모양이죠? 아주 강력한 헌터... 그것도 현역에서 은퇴한 사람이군요."
"어, 어떻게 아신 거죠?"
최나현은 자리에서 뛸 듯이 놀랐으나...
사실 이건 추리라고 할 것도 없다.
나는 놀란 얼굴의 최나현과 앨리스에게 그 과정을 설명해줬다.
"현역 헌터면서 연예인 활동을 하는 여성분들은 대부분 여걸들이죠. 남자 불알 정도는 웃으면서 쥐어뜯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연예계가 빡세고 무서워봤자 자길 죽이려고 달려드는 몬스터들보다 무섭겠는가?
그런 그녀들에게 성상납 따위를 요구할 수 있는 작자라면 극히 한정되어 있다.
일단 일반인은 안 된다.
헌터가 작정하고 일반인을 조지려고 들면 방법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고만고만한 수준의 헌터도 안 된다.
요즘은 헌터 연예인들도 포화상태라서, 기본 A랭크 정도는 찍어줘야 데뷔할 수 있다.
시작부터 A랭크를 찍고 들어오는 재능충들에게 성상납 요구 따위를 할 수 있는 건 S랭크 상당의 초고등급 헌터들 뿐인데...
현역 S랭크 헌터들 중 그런 짓을 할만한 작자는 이미 내가 감옥에 처넣었다.
'유시현은 이미 잡혀갔으니까, 은퇴한 S랭크 헌터겠지.'
최나현은 매우 감명받은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상대는 그 큰바다 이재한이라고 들었어요."
"큰바다 이재한? 그 영감님이?"
앨리스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큰바다 이재한이라면 원로 중의 원로 헌터.
오래전에 은퇴해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인격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아서 업계의 큰어른 취급이다.
예리엘에 비하면 그 위상이 한참 모자라긴 하지만, 어쨌거나 예리엘 이전에는 큰바다 이재한이 있었다고들 한다.
최나현은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엔 믿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거짓말을 할만한 친구가 아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조사를 해보죠."
"네에? 정말요?"
"원래 신고가 들어오면 조사 정도는 해봅니다. 친구분께는 섣부른 짓 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상대가 좀 거물이긴 하지만, 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나현이 아무 생각도 없이 우리에게 선뜻 도움을 청했을 리가 없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엔 친구의 이야기가 정말 확실했던 것이다.
"친구분의 신원은 밝힐 수 있습니까? 안 밝히셔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사, 상관없는 건가요?"
"네. 어차피 피해자가 한둘이 아닐테니까요."
큰바다 이재한은 10년도 더 전에 활동했던 헌터.
게다가 지금 나이가 거의 환갑이다.
현역 시절부터 노익장으로 유명했던 것이 이재한이라는 헌터다.
돈과 명예를 모두 갖춘 채 은퇴한 그가 노년에 급격히 타락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 예전부터 신나게 해댔겠지.
나는 떨떠름한 얼굴의 최나현을 돌려보낸 뒤에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한편, 앨리스는 요즘 시대에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이 무슨 20년 전도 아니고..."
"오히려 20년 전이었으면 이런 짓 못했을 걸."
"뭐라고? 어째서?"
내 말에 강하게 반발하는 앨리스.
그녀는 아직 헌터들의 등장이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꿔놓았다고 굳게 믿고있는 듯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그야 조폭들 때문이지. 그 때의 조폭들은 지금보다 훨씬 약했거든."
"조폭?"
연예계와 조폭. 두 가지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다.
최소한 한중일의 동북아 3국에 한해서는 그렇다.
일본 연예계와 야쿠자의 관계는 워낙 유명하니 설명조차 필요하지 않을테고...
중국도 미친 인구로 인한 미친 경쟁률과 꽌시 문화 때문에 조폭이 얽힐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한국 또한 예외는 아니다.
조폭들이 연예계와 엮여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일단, 연예인들은 이미지로 먹고사는 몸이다 보니 사소한 범죄에도 무척 취약하다.
보통은 범죄와 엮이는 것 자체가 몸값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판국이다.
조폭들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만만한 호구인 것이다.
게다가 공중파에 밥 먹듯 출연하는 최상급의 연예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지방 행사를 다니게 되는데...
이 지방행사 쪽을 꽉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조폭들이다.
특히 밤무대에서는 조폭의 말이 곧 법이다.
놈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나이트클럽이나 유흥업소 따위는 수도없이 있다.
"그런데 헌터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지."
원래부터 한국의 조폭들은 굉장히 영세하고, 점조직화된 경향이 강했으나...
헌터들의 등장이 그들을 연예계에서도 완전히 밀어냈다.
헌터들은 기존 조폭들의 완전한 상위호환 격 존재이기 때문이다.
"헌터들은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손봐줄 수 있어. 조폭들이 헌터들에게 대들어봤자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그런데 왜 20년 전이 나았다는..."
"끝까지 들어봐. 내가 앞서 말했지만, 조폭과 연예계의 관계는 구조적인 문제라서 한 번 물갈이가 되는 정도로는 종결되지 않아. 결국 연예인들의 입장에선 착취의 대상이 바뀐 것 뿐이야."
"아앗."
앨리스는 그제야 감을 잡은 듯 탄식을 뱉었다.
그렇다.
헌터 조폭의 등장이다.
놈들은 머지않아 기존의 조폭을 완전히 대체했다.
"하지만 최나현의 친구라면 공중파에도 나오는 연예인일텐데?"
"그쪽에서 곱게 말로만 했겠어? 말이 성상납 요구지,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을 걸."
몬스터와도 맞서싸우는 헌터들이 고작 '요구' 정도로 기가 죽었을 리 없다.
하지만 헌터 조폭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의 목표물에 대한 추문을 뿌리거나, 행사를 방해하거나, 하다못해 교통수단을 고장내는 등등.
연예인들을 엿먹이려고 작정하면 얼마든지 엿먹일 수 있다.
게다가 그 뒤에 버텨서 있는 것은 전설적인 은퇴 헌터인 큰바다 이재한.
이래서야 헌터 연예인들이 기를 펼 수 있을 리가 없다.
몬스터는 무섭지 않지만, 인간의 악의는 무섭다.
최나현의 친구는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대충 설명을 마친 나는 별다른 기대 없이 오라클을 작동시켰다.
현재 이재한의 거주지로 등록되어있는 곳에 전자적으로 침투하여 단서를 모으려는 것이다.
"이재한이 무슨 병신도 아니고 증거를 남겨두진 않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보자고."
"그 인간 메신저 앱 기록은 어때?"
"깨끗해. 그냥 옛날 사람이라서 메신저랑 문자 자체를 잘 안 쓰는 것 같아."
"아... 그래?"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타입의 난적이다.
내가 아예 통화 기록까지 살펴봐야하나 싶던 중.
오라클이 그의 침실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나는 그 정보를 띄우곤 멍하니 읊었다.
"뭐야 이게... 침실에 1테라바이트짜리 외장하드가 있다고? 큰바다 영감은 의외로 컴잘알인가?"
"엑?"
앨리스는 물론이고 예리엘도 이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놀려서 외장 하드에 저장된 파일을 재생시켰다.
그곳에는 이재한이 직접 찍은 듯한 섹스테이프가 가득 들어있었다.
[앙, 아앙...]
[더 열심히 빨아 이 년아. 공중파 출연 하고싶은 거 아니었냐?]
"미친 시발."
이재한은 병신이 맞았다.
애초에 성욕에 미친 놈이라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증거를 남겨뒀다.
내가 차마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자 예리엘이 옆에서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얼굴은 드물게도 상기되어 있었다.
"자, 잠깐만... 이 사람은?"
그와중에 출연자의 얼굴을 대충 알아본 앨리스가 손가락을 짚었다.
나도 그녀를 알아보곤 강한 두통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내뱉었다.
"피해자 쪽도 거물이었냐... 아니, 이건 10년도 더 된 영상이니까 거물이 된 거라고 해야겠군."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내일 만나러 가보자. 예리엘, 같이 외출할 수 있어?"
"좋아요."
흔쾌히 허락을 얻어낸 나는 예리엘의 무릎 위로 뛰어들었다.
앨리스가 못 봐주겠다는 듯 호다닥 신혼집에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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