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큰바다(1)
* * *
일요일 저녁.
우리 부부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앨리스는 쭈삣쭈삣 거실로 걸어들어왔다.
나는 녀석을 초대하고 싶지 않았으나... 보니까 예리엘이 밥 안 주면 굶고 다니는 것 같다.
앨리스는 합방 이후 우리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진 것을 눈치채곤 입을 비죽거렸다.
녀석도 성인이니까 대충 짐작 정도는 하고 있겠지.
애써 눈을 돌린 녀석은 거실의 카펫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응? 언니, 카펫 어디갔어? 그거 언니가 좋아했던 거잖아."
역시 좋아했던 물건인가...
나는 대충 짐작했던 사실에 속으로 혀를 찼다.
예리엘은 미니멀리즘이 아닌가 싶을만큼 소박한 인테리어를 선호했는데, 그런 그녀가 굳이 깔아뒀던 카펫이라면 어지간히도 좋아했던 것이 틀림없다.
어제의 이야기는 그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겠지.
내게 찰싹 달라붙어있던 예리엘은 답지않게 긴장하며 설명했다.
"아, 그거 뭘 좀 쏟아버려서 버리게 됐어."
"그래? 아깝네."
원래 카펫이란 게 물 좀 쏟는다고 바로 못쓰게 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게 보통 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흠뻑 적셔놓은 뒤에 상당한 시간 동안 방치해버려서 재활용이 힘들게 됐다.
나는 예리엘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무릎베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확실히, 거리감이 엄청나게 줄어들었군.'
예리엘도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겠지.
분명 몸을 한 번 섞었을 뿐인데 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포근한 느낌.
사실 한 번도 아니고 좀 많이 했다.
물론 나도 생각없이 즐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그녀의 약점거리는 몇 개 잡아놓았다.
하지만 당장은 그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무슨 서로 보증 선 것도 아니고...'
포근한 느낌에 끝도없이 빠져있자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주말.
나는 날이 밝자마자 사무실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스마트폰의 배경화면은 어느샌가 예리엘의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젠장. 완전히 홀렸어.'
내가 속으로 정신을 다잡고 있자 내 책상으로 호다닥 다가오는 이서우.
이상한 편지 같은 것을 든 그의 얼굴은 유달리 밝았다.
"서우 씨, 무슨 일 있어?"
"제 고소가 취하됐습니다 팀장님."
"아, 그 성폭행 사건? 잘 됐네."
슬슬 약발이 돌기 시작한 건가?
이제 다른놈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우리 특별 수사대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실세다.
그러니까 팀원인 이서우에 대한 고소도 잽싸게 취하한 것이리라.
애초에 증거영상이 나온 시점에서 그쪽엔 승산이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무고죄로 역고소 해볼래?"
"아뇨. 당장은 수사대 업무도 벅차니까요."
"그럼 그 자식 표적수사 한 번 들어가보자."
"에이, 팀장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권했으나, 정작 이서우가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내가 상당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출근한 서지유를 불러서 커피 심부름을 시키려 하자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지유 씨, 슬슬 출근할 때 커피 좀 사오지?"
"왜 자꾸 저만 시켜요?"
"지유 씨가 내 카드 가지고 있잖아."
"후후, 그럴 줄 알고 미리 손을 써뒀죠."
"뭐?"
서지유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자 잠시 뒤에 카페의 직원이 커피를 잔뜩 들고 올라왔다.
이제와서 배달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아닐텐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앨리스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가게를 산 거 아니야?"
"정답!"
"야!"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진심으로 쫄아붙는 서지유.
어차피 돈은 회사에서 받으면 된다지만 뒷목이 뻐근해졌다.
"내 카드는 수사용으로 쓰라고 했잖아!"
"아, 아니. 저도 요즘 일 하고 있으니까... 결국은 수사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
싸늘하게 식은 사무실에서 내 눈치를 살피는 김정태.
이쪽에서 허락만 떨어지면 서지유를 아예 묻어버릴 작정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야, 너 카드 반납해."
"네에..."
그나저나 카드만 줬는데 어떻게 가게를 사버린거지?
역시 횡령 전과범이라서 그런지 노하우가 남다른 것 같다.
'달리 쓸만한 인재가 없어서 참는다.'
나는 서지유에게 업무를 왕창 안겨주곤 일과를 시작했다.
정치인들과 법조인들, 그리고 협회까지 한층 협조적으로 변한 덕분에 업무는 무척 수월했다.
대부분의 범죄는 오라클을 이용하여 처리가 가능하다.
다만 만약 오라클로 해결이 안 되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해당 사건은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강력 범죄라는 뜻이니까.
지루한 얼굴로 내 업무를 구경하던 앨리스는 내가 뭔가를 검색하는 것을 보곤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번에는 오라클이 아니라 평범한 검색 엔진이다.
"영속교 진리회? 이게 뭐야?"
"내가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사이비 교단. 상당한 거물이야."
"사이비 교단? 걔들이 그렇게 강적이야?"
"그래."
한국에선 길을 걷다 보면 발에 채이는 것이 사이비라지만...
이놈들은 특출나다.
교주가 헌터인데다 굉장히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주제에 규모는 상당하다.
"이놈들은 교리 때문에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아서 추적이 매우 힘들어. 아마 내부고발자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겠지만."
"그럼 지금 당장 덮치지 그래?"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현재 특별 수사대의 힘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를 견제해야 할 정부기관들이 모두 내 정체를 눈치챈 탓에 알아서 숨을 죽이고 있다.
원래라면 지금이야말로 영속교를 처리할 타이밍이겠지만...
아쉽게도 회사의 정기 회의가 거슬린다.
"정기 회의까지 3주도 안 남았어. 이놈들과 3주 안에 결판을 내는 건 힘들어."
"아하. 그럼 캘리포니아에 다녀와서 처리하려고?"
"그럴 생각이야."
아까 카페를 사버렸다고 했을 때, 서지유를 여기에 잠입시킬까 생각해봤으나...
내가 미국에 가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대처가 힘들다.
그래서 일단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정기 회의가 끝날 때까지 뭘 하는 건 힘들겠군.'
당분간은 좋든 싫든 얌전히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정태가 내게 다가와서 작게 귓속말을 했다.
"팀장님. 아무래도 감시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아, 그래? 알겠어."
이쪽도 대충 예상했던 일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난하게 업무를 끝낸 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칼퇴할 생각이 없었지만 집에서 예리엘이 기다리고 있다.
"주목. 오늘은 한꺼번에 퇴근한다."
"한꺼번에 퇴근이요?"
"그래. 다들 주차장으로 내려가."
살짝 당황하면서도 일단은 지시에 따르는 팀원들.
나와 김정태는 그들을 모두 잠복용 차량에밀어넣은 뒤 주저없이 출발시켰다.
우리가 주차장을 나오자 건물 주변에 잠복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저마다 스마트폰이나 카메라 따위를 향했다.
이서우가 그것을 눈치채곤 화들짝 놀랐다.
"엇, 저거 뭐죠?"
"우리가 출동했다고 보고하는 거야."
특별 수사대는 헌터 협회 본사를 사무실로 쓰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필연적으로 동선이 노출된다.
게다가 현재로선 달리 헌터들을 대상으로 한 수사기관이 없다.
따라서 헌터 범죄자들의 입장에선 우리들만 예의주시 하고 있으면 된다.
"발족 2주도 안 돼서 S랭크 한 놈에 길드 하나까지 잡아넣었으니 겁먹을 수밖에 없지."
"아, 그럼..."
"우리가 출동하는 게 보이면 일단 숨을 죽이고 있는 거야."
"세상에. 이래서야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거 아니야?"
옆에서 앨리스가 넌더리를 냈지만, 나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우린 지금부터 집에 가서 꿀잠 잘건데 뭘."
"엑..."
"그동안 전국의 헌터범죄가 올스톱되면 그건 그것대로 이득이잖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대단하네요. 저쪽의 행동을 모두 꿰고 계셨다니."
게다가 나는 임시 사무실도 이미 마련해뒀다.
여차할 때엔 가짜로 휴가를 내놓고 그쪽으로 출퇴근하면 된다.
이러한 사태는 특별 수사대를 조직하기 전부터 예상해뒀던 것이다.
"지들이 머리 써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아, 저는 여기에 내려주세요."
"오늘 수고했어. 내일 봐."
"안녕히 들어가세요 팀장님."
서지유와 이서우를 보내준 나는 윈터킹덤의 본사에 닿은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내렸다.
잠복용 차량은 출입 허가를 받아놓지 않아서 주차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앨리스와 함께 정문으로 입장하는데, 주변에서 쉴새없이 시선과 인사가 날아들었다.
"앗, 앨리스. 퇴근하는 거야? 고생하네."
"제현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나는 수사관으로서의 입장 때문에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앨리스의 경우에는 같은 길드원인데도 나보다 더욱 딱딱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우리를 향한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 일정을 대충 알고 있었던 예리엘이 로비로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길드원들은 간만에 재회한 그녀를 열정적으로 환영했다.
"예리엘 언니, 좀 더 자주 내려오세요."
"에이, 모처럼 쉬고 계시는데 왜 그래. 게다가 신혼이잖아."
"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
예리엘이 옛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돌연 앳된 느낌의 여자 헌터 한 명이 내쪽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그녀는 최근 이름을 날리고 있는 헌터 겸 연예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다.
"저, 이제현 수사관 님. 괜찮으시면 잠시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상담이요?"
원래라면 적당히 거절했겠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윈터킹덤 같은 초대형 길드에 소속된 헌터가 다짜고짜 특별 수사관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척 봐도 보통 일은 아니다.
앨리스도 그것을 아는지라 말을 아꼈다.
나는 일단 그녀에게 현관의 카드키를 건네줬다.
저게 없이면 엘리베이터가 우리집에서 멈춰서지 않는다.
"여기서 듣긴 좀 그렇고... 3시간 뒤에 와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그녀가 남들의 눈을 피해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예리엘과 함께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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