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황금방패(2)
* * *
사소한 사고가 있긴 했지만, 오늘의 근무는 무난하게 끝이 났다.
익숙치 않은 업무에 진땀을 빼던 팀원들은 헌터들이 돌아가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법률적인 지식이 모자란 그들로선 경찰에서 송치해준 사건을 처리하는 것도 상당히 버거웠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끝났군요."
"정말 이 행정 시스템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그렇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스템이 시키는대로 해. 뭐 이상한 짓이라도 시키든?"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돌아가서 놀랐어요."
이서우가 가리킨 행정 시스템이란 다름아닌 오라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라클의 기능 중 일부에 더하여 예리엘이 법률적 지식을 보충해준 결과물.
사실상 재택근무중인 예리엘이 원격으로 업무지시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하지만 이서우와 서지유를 제외하곤 모두 그 정체를 알고있다.
그 완성도는 상당해서, 경찰 출신인 이서우도 딱히 흠을 잡거나 하진 못했다.
'예리엘이 이쪽도 제대로 꿰고 있을 줄이야.'
내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자, 로비의 직원이 돌연 뭔가를 들고 올라왔다.
커다란 종이상자에는 과일이 잔뜩 담겨있었다.
"음? 이게 뭡니까?"
"선물입니다. 지난번 납치 사건 피해자의 동료분들께서 보내주셨어요. 검사 끝난 거니까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나는 난처한 기분으로 선물을 받았다.
사실 유시현 사건에서 납치당했던 피해자들도 마약을 복용했으므로, 완전히 결백하다고 보긴 힘들지만...
조사 결과 속아서 약을 복용하거나 강제적으로 복용한 정황이 아주 강하게 드러났다.
헌터들의 여론도 있어서, 그들은 일단 처벌보다 치료를 우선하게 됐다.
'어차피 마약 중독이면 고생길 확정이지. 잘 극복하길 빈다.'
근무 시간도 진작 끝났겠다, 슬슬 퇴근을 준비하던 중.
외투를 걸치던 서지유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커피 심부름 정도만 했던 그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팀장님은 신혼이시네요? 과연 예리엘 프로스트의 배우자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김정태가 서지유에게 무섭게 눈치를 줬으나... 나는 있을 수 있는 질문이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저런 질문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받게 될 것이다.
"일이 너무 바빠서 아직 잘 모르겠는데... 아직 신혼여행도 못 갔으니까."
"아, 정말이네요? 거의 결혼 발표하자마자 특별 수사대 일을 시작하셨구나?"
"사실 발표한 적 없어. 우리는 혼인신고만 했는데, 언론에서 멋대로 밝혔을 뿐이야."
"엑..."
내가 헌터부 기자들에게 다시 한 번 적의를 불태우고 있자 이서우가 쓰게 웃었다.
다른 팀원들도 은근히 흥미진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서지유는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질문을 계속했다.
"부인과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셨던 건가요?"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은퇴 기념 행사에서 청혼받은 건 좀 놀랐지만..."
그 때 처음 만나서 결혼까지 직행했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되므로, 예전부터 몇 번 만났다는 시나리오로 정했다.
그린 더스트로서의 활동을 감안하면 완전 거짓말도 아니다.
"참고인들에게 출석 요구 통지 다 돌렸으면 슬슬 퇴근하자. 오늘도 다들 수고했어."
"아, 팀장님. 한 가지만 더요!"
"다들 집에 안 갈 거야?"
정말 궁금한 것도 많다.
하긴. 한국에서 예리엘의 위상은 살아있는 여신 수준이니까 그럴만도 하다.
지난번 작전에서 시원하게 질러버린 명품백을 집어든 서지유가 잽싸게 나를 따라나섰다.
"부인과 함께 지내면서 의외였다거나 하는 점 있나요?"
"의외였던 거? 당연히 있지."
"뭔데요?"
"내 생각보다 잘 웃더라고."
"저, 정말요? 그 얼음의 성녀가?"
멀찍이서 불평을 표하던 앨리스도 차마 내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냉큼 주차장으로 내려간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예상보다 질문이 자세한데... 다음부터는 적당히 쳐내야겠네.'
내가 운전대를 잡자, 앨리스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으로 향했다.
운전자의 대각선 뒷자리... 속칭 '회장님 자리'라고 부르는 그곳이다.
나와 나란히 앉고싶지 않은 것도 당연하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시동을 거는데, 녀석이 돌연 내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언니랑 데이트 같은 거 한 적 없지?"
"그런 거 했다간 기겁할만한 사람이 한 명 있어서."
"..."
본인 이야기를 하는 줄은 알아서, 인상을 왈칵 찌푸리는 앨리스.
녀석은 끄응. 하고 침음을 삼키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 말이 맞아."
"뭐?"
"언니가 확실히 잘 웃게 된 것 같다고. 그건 인정할게."
"... 그렇구나. 인정해줘서 고마워. 나한테 정말 큰 힘이 되네."
나는 살짝 빈정거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앨리스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그 때 차량의 라디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오라클을 이용한 기밀 통신이다.
[마스터. 잠시 괜찮으신가요?]
"앨리스가 있긴 한데, 말해."
한예진은 내 대답에 잠시 침묵하며 말을 골랐다.
[그, 이번 년도의 정기 회의 일자가 결정됐습니다. 정확히 30일 뒤입니다.]
"그래? 예상보다 빠르네. 알겠어."
뚝.
앨리스는 통신이 끝나자마자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정기 회의?"
"회사 행사야. 1년에 한 번씩, 3인의 마스터들이 모두 모여서 오라클의 운영과 발전 방향성에 대해서 논의하는 거지."
"흐음... 불참할 수는 없지?"
"절대로 안 돼."
안 그래도 나는 오라클 마스터들 중 발언권이 가장 약한 편인데, 이런 중요한 행사에 불참하면 뒷감당이 안 된다.
오라클은 내 모든 활동의 핵심.
정기 회의는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
앨리스와 함께 신혼집에 들어선 나는 예리엘의 환대를 받았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당신이 다 했지. 혹시 캘리포니아 가본 적 있어?"
"캘리포니아요?"
"그래. 우리 신혼 여행지로 적당할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빠르게 감을 잡은 앨리스.
"정기 회의 장소가 캘리포니아였어?"
"그래."
"저는 좋아요."
예리엘도 대충 뉘앙스를 알아듣곤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한예진에게 전화를 걸어서 통보했다.
"정기 회의에 예리엘도 참석할거야."
[아, 알겠습니다 마스터!]
예리엘은 전부터 오라클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을테니 이게 좋겠지.
그런데, 앨리스는 옆에서 멋대로 한 술 더 떴다.
"아예 언니도 마스터로 추천해주는 건 안 돼?"
"마스터가 되려면 오라클의 운영 및 완성에 필수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해. 예리엘의 경우에는 아니지."
"으음..."
예리엘이 확실히 강력한 헌터인 것은 맞지만, 그쪽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나로선 그녀를 회의에 동석시키는 것만 해도 상당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것이다.
예리엘도 그것을 아는 듯 앨리스를 자제시키곤 주방으로 향했다.
어쨌거나 신혼여행 장소와 일자는 이것으로 확정.
아직 여유가 있으니 당장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앨리스는 우리와 저녁 식사를 식사를 함께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다른 길드원들이랑도 좀 어울리지 그래? 다들 언니 보고싶다고 난리야. 어차피 한 건물에 살면서..."
"미안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가 없어."
"왜?"
"그야 내가 특별 수사관이니까."
나는 난처한 얼굴의 예리엘 대신 대답해줬다.
특별 수사관인 내가 윈터킹덤 길드원들과 어울려다니는 꼴을 보여봐라.
당장 비리를 의심받게 될 것이다.
아무리 주상복합이라지만, 사실 길드 건물에서 거주하는 것도 상당히 아슬아슬하다.
"아, 그러셔... 그럼 나는?"
"말 한 번 잘했다. 이제부터는 너도 거리를 좀 둬야한다고 생각해."
"이익..."
당연하지만 앨리스는 특별 수사대의 감찰위원이므로 제외다.
우리는 적당히 노닥거리다가 내일을 위해서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특별 수사대의 사무실에는 어제 출석 요청을 보내둔 사람들이 잔뜩 찾아왔다.
어제는 대부분 피의자들이었지만, 오늘은 대부분 참고인들이다.
앨리스는 그 차이점을 제대로 모르는 듯 내게 물었다.
"둘이 무슨 차이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피의자는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는 사람. 그리고 참고인은 이름 그대로 참고삼아서 불러낸 사람이야."
"아하."
사실 피의자와 참고인은 내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딱딱 떼어놓을 수는 없는 개념이다.
만약 피의자가 소환에 불응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할 경우...
검사들은 일단 참고인으로 소환해서 피의자로 전환해버리는 방법을 자주 쓰기 때문이다.
그냥 순수하게 참고인으로 불러내도,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로 의심받는 경우 또한 자주 있다.
"나는 그런 방법 잘 안 쓰지만."
"왜?"
"참고인으로 소환됐는데 피의자로 전환된 경우에는 그냥 진술을 거부하면 끝이야. 어차피 참고인 조사에는 강제성이 없거든."
게다가 피의자 소환을 거부해도 나중에 조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참고로 피의자 소환은 멋대로 거부하면 나중에 영장 나온다."
"그렇군. 그래서, 오늘은 무슨 사건이야? 대부분 황금방패 길드 소속 같은데."
현역 헌터답게 참고인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앨리스.
내가 무어라 설명하려 하기도 전에 피해자의 가족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이고 검사님. 우리 아들 꼭 좀 찾아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곳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렇다.
이번 건도 현역 헌터 실종 사건이다.
나는 팀원들에게 참고인들을 분배하며 설명해줬다.
"헌터 업계에는 유독 실종 사건이 많지. 그냥 어디 던전이나 게이트 하나 골라서 시체를 던져넣으면 아무도 못 찾으니까."
"그럼 이번 피해자는..."
"다들 파일 봤겠지만, 이번 피해자는 실종된지 꽤 됐어. 지금까지 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은 거지. 아쉽지만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곳까지 해본다. 다들 알겠지?"
"예, 팀장님!"
"좋아, 모두 움직여."
나도 참고인들 중 한 명을 맡아서 조사를 시작하자 서지유가 쭈삣쭈삣 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지유 씨, 커피."
"네에..."
오늘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커피 심부름을 가는 서지유.
내 앞에 앉은 참고인이 그녀를 보곤 피식 웃었다.
"팀원분이 정말 미인이시군요."
"그러게요. 딱히 얼굴 보고 뽑은 건 아닌데."
"하하. 황금방패 길드 소속, A랭크 헌터 성도율입니다. 북두칠성 사건의 영웅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바쁘실텐데 소환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율 씨."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인사를 받았다.
북두칠성 사건의 영웅이라니, 기가 찬다.
성도율은 내 옆자리의 앨리스에게도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한 뒤 내 질문에 답했다.
"실종자 안태양 씨와는 직장 동료셨죠?"
"예, 같은 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태양이 그 친구가 사라져버려서 저희도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이제라도 수사가 시작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 태양 씨가 실종되기 전에 이상한 행동 같은 걸 보여주진 않았나요?"
"저는 딱히 그런 건 못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은근히 방어적인 말투에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양반... 뭔가 수상하다.
내용에는 별 게 없지만 말투가 너무 전략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참고인 조사에선 위증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피의자 조사나 참고인 조사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위증이 아니라 허위 진술인데... 이것만 가지고 처벌을 받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된다.
설령 거짓말을 해도, '그 때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식으로, 일관적으로 진술하면 허위 진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 양반의 말투가 딱 그런 것이다.
물론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뜬금없이 수사기관에 소환돼서 조사를 받게 되면 사람이 방어적으로 되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런데 지금 내 앞의 성도율은 그런 주제에 말을 더듬거나 고민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현역 헌터라서 남들보다 훨씬 담대하다... 고 쳐도 좀 이상하다.
'좀 의심스럽군. 한 번 떠볼까...'
"그럼 태양 씨가 실종된 날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아, 이건 의례적인 질문이니까 너무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날은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양이가 실종된 날에는 제가 좋아하는 게임이 나왔거든요."
"아, 컴퓨터 게임이요?"
"그렇습니다. 이름을 말해도 아실지 모르겠는데, 워해머 그린 타이드라고..."
"아! 그거 저도 압니다."
워해머... 여기서 나오는 건가!
나는 동지를 만난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이래서야 내가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겠다.
고결한 워해머 팬이 실종사건의 배후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증언은 날뛰던 내 심장을 차갑게 식혀버렸다.
"수사관 님도 아셨군요? 그린 타이드는 정말 갓겜이죠. 저는 그 때 정신없이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특별히 기억나시는 게 더 없으시면 조사는 여기까지 하죠.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 길드원을 찾아주시는데 제가 뭐라도 해야죠.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다시 불러주십시오. 그럼..."
성도율은 나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곤 지체없이 사무실을 떠났다.
나는 서지유가 내준 커피를 받으며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유 씨."
"네 팀장님."
"방금 나간 성도율 씨, 행정 프로그램 써서 뒤 좀 캐봐."
"네에? 뭔가 수상한가요?"
서지유는 물론이고 앨리스도 의아한 얼굴.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 뭔가 있어."
"도대체 어딜봐서?"
"저 사람이 발매일에 붙잡고 정신없이 했다는 그린 타이드... 개똥겜이야. 워해머 프랜차이즈 게임은 대부분 쓰레기라고."
나는 즉석에서 오라클을 이용하여 그의 계정을 캐봤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어설픈 거짓말이 드러났다.
[그린 타이드 플레이 시간 : 103시간]
"뭐야, 제대로 플레이 했는데?"
"아냐. 자세히 봐봐. 도전과제가 하나도 안 깨져있잖아. 이거 그냥 게임을 켜놓기만 했던 거야. 애초에 이런 쓰레기 게임을 100시간 넘게 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돼."
"아... 그래? 그런 걸 잘도 아네."
"지유 씨. 얼른 가서 조사 시작해."
"알겠습니다."
마침내 제대로 된 일을 맡게 된 서지유가 본인의 자리로 호다닥 달려갔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하며 다음 참고인을 불러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