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9화 (9/131)

〈 9화 〉 서장(9)

* * *

납치 사건 직후. 나는 가까운 대형 병원으로 이송됐다.

한예진 덕분에 상처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나, 찰과상이나 베인 상처 등은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서 놔뒀다.

호화로운 1인실을 쓰게 된 보람도 없이 정신없이 밀려드는 기자들.

나는 피투성이 옷차림 그대로 그들의 앞에서 짧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헌터 협회의 특별 수사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제현 특별 수사관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헌터 범죄에 맞서시겠다는..."

"이제 다들 나가주시죠! 여긴 병원입니다!"

병원 직원들이 그들을 물리쳐주자 겨우 병실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잽싸게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 남은 상처들도 치료를 받았다.

내가 마지막 단추를 채우자마자 앨리스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괜찮아?"

"네 호위 실력이 너무 개판이라서 죽을 것 같아."

"으읏..."

앨리스는 도끼눈을 떴으나 이번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잽싸게 상황을 확인했다.

"현장에 생존자는?"

"습격범들은 다 죽었어. 생존자가 법정에서 증언이라도 하면 귀찮아지니까..."

"오, 확실히 처리했네? 솔직히 좀 다시봤는데?"

앨리스에게 이 정도의 지능이 있었을 줄이야.

하긴, 발이 느려서 쫓아오지 못했으니 그쪽이라도 잘 정리했어야겠지.

내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앨리스가 역으로 물었다.

"네 쪽은 괜찮은 거 맞아? 몸상태 말고, 증거 쪽으로."

"당연히 괜찮지."

납치범들의 차량은 올림픽 대로를 미친 듯 내달리고 있었으나, 모든 유리에 진한 선팅이 되어있었다.

그러니 주변 차량들의 블랙박스나 단속 카메라 따위를 조사해도 제대로 나오는 건 없을 것이다.

납치용 차량에는 블랙박스가 없었고, 나는 그린 더스트를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탈출한 뒤에는 불까지 크게 질러버렸으니... 증거가 제대로 남아있을 리가 없다.

내가 사용했던 총기와 총탄도 부하들이 모두 회수했다.

"납치범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화기까지 사용했으니까, 너는 100% 정당방위 나온다. 걱정할 필요 없어. 민간인 피해는?"

"없어."

"다행이군."

드르륵!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경찰측에 뭐라고 할지 궁리하던 찰나.

매우 화가 난 얼굴의 예리엘이 싸늘한 냉기를 흩뿌리며 나타났다.

이제야 좀 내가 알던 예리엘 프로스트같다.

그녀는 가장 먼저 내쪽을 살피더니, 앨리스에게 쏘아붙였다.

"나가."

"어, 언니?"

"내가 호위를 부탁했잖아. 그런데도 놈들이 제현 씨를 데려가도록 내버려둬?"

사실 예리엘이 저러는 것도 당연하다.

만약 앨리스가 내게서 적정거리를 유지했다면, 아무리 놈들이라도 나를 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북두칠성 길드원들의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섣불리 자리를 이탈했다.

헌터로선 몰라도 경호원으로선 완전히 실격이다.

그러나 나는 웬일로 앨리스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일단 민간인 피해가 없다는 것만 봐도 그녀가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상대가 무척 기민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예리엘, 괜찮아. 원래 이건 내가 자주 하던 짓인데 뭐. 나한테는 따로 회사의 경호팀까지 붙어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괜찮다니까. 진짜 욕을 먹어야 하는 건 앨리스가 아니라 납치범들이지. 쟤는 할만큼 했어."

"...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앨리스를 용서한 예리엘이 내게 다가와서 뒤늦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외국에서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어요."

"그거 영국 놈들이래. 하여간 나쁜짓 하는데엔 도가 텄어."

"자, 잠깐만... 벌써 배후 세력을 조사한 거야? 그거 확실해?"

앨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더듬 묻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클로 조사했으니까 확실해."

"오라클?"

"그래."

예리엘이 결혼 상대로 나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

우리 회사의 존재 의의가 바로 오라클이다.

앨리스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듯 했으나, 예리엘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병원에는 얼마나 계실 건가요?"

"오래 있을 필요는 없어. 적당히 놀다가 집에 가지 뭐."

"알겠어요. 그럼 저도 여기서 있을게요."

"제발 그러지 말아줄래?"

예리엘이 병원에 오래 머문다면 직원들이 너무 고생할 것이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납득하며 앨리스를 데리고 나가려했다.

그런데, 앨리스가 웬일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앨리스, 나랑 같이 나가자."

"아냐 언니. 나는 여기에 남아있을게."

"그래?"

아무래도 아까전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모양.

예리엘은 그제야 엷게 웃으며 그것을 허락했다.

"이번엔 실수하면 안 돼?"

"확실하게 경호할거야."

"좋아. 필요하신 게 있으면 뭐든 앨리스에게 말씀해주세요. 되도록 빨리 퇴원하시구요."

"그래."

겨우 예리엘을 내보낸 나는 다시 태블릿 PC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간병인용 의자에 앉은 앨리스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다.

"고마워."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야. 근데 너 경찰에서 출석 요청 안 왔냐?"

"아까 간단하게 사정청취만 하고왔어."

"대단하시네."

역시 법 위에 군림하는 헌터들인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앨리스는 내 작업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거야?"

"특별 수사대 팀원 뽑는다."

"아하. 팀원을 어디서 뽑는데? 공개 채용 같은 거 하는 건가?"

"아니. 협회의 특별 수사관은 현직 공무원 중 대부분을 팀원으로 징집할 수 있어."

"지, 징집?"

조금 이색적인 표현에 당황하는 앨리스.

나는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헌터 협회가 막 창설됐을 때부터 있었던 협회법의 조항이지. 과거의 사람들은 헌터들이 제멋대로 날뛸 경우에 대비했는데, 정작 현대의 사람들은 써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니."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어?"

"이제 막 찾기 시작한 참이야. 너 혹시 대한민국 공무원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어림짐작으로 대꾸하는 앨리스.

"글쎄. 한 100만 명 정도?"

"오, 의외로 비슷하게 맞췄네."

내가 칭찬하자 살짝 우쭐거리는 앨리스.

나는 곧바로 말을 덧붙이며 그녀를 놀렸다.

"한 20년 전의 수치지만."

"자, 잠깐만. 한국에 공무원이 그렇게 많아?"

"게이트 사태 발발 이전에 한국 공무원 총원이 약 100만 명이었어. 참고로 비정규직은 뺀거다."

그런데, 게이트 사태가 터지면서 공무원의 수요도 폭증했다.

헌터와 던전에 관련된 정부 기관들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재 정규직 공무원의 숫자는 약 150만 명.

한국 전체 인구의 3% 정도 된다.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인구의 비율로 따지면 그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후보군이 150만명이나 있는데, 팀 하나 정도는 채울 수 있겠지."

"흐음."

나는 여러가지 조건으로 옥석을 가리기 시작했다.

일단 징계 기록이 있는 인원은 당연히 제외.

그 다음에는 능력순으로 정렬해봤다.

물론 애초부터 빼올 수 없는 인원들도 일찌감치 제외시켰다.

앨리스는 가만히 있기 심심한지 옆에서 자꾸만 말을 걸었다.

"설마 언니도 팀에 넣을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예리엘은 은퇴 상태로 있어주는 게 훨씬 좋아. 그렇게 든든한 빽이 또 어디있다고."

"헌터들은?"

"헌터는 안 돼. 믿을 수가 없어. 애초에 공무원도 아니고."

현직 헌터들은 좋든 싫든 헌터 길드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헌터들은 써먹을 수가 없다.

만약 친분이 있는 길드가 수사 대상이 되면 부정을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당연히 예리엘과 앨리스가 속한 윈터킹덤의 길드원들도 제외됐다.

그렇게 밤새도록 추려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마음에 드는 인원을 찾아낼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뽑아낸 인원은 딱 한 명이었다.

옆에서 한 숨 자고 일어난 앨리스가 그의 자료를 보곤 작게 감탄했다.

"이쪽은 팀원확정이야?"

"맞아."

"김정태. 전 대통령 경호팀원... 오, 경력 괜찮은데?"

현재 대통령 경호팀은 전원 헌터들로 교체된 상태다.

덕분에 한직으로 밀려난 비운의 사나이가 바로 김정태였다.

"마음에 드냐? 잘 됐네. 걔는 내 호위 담당 에스콰이어거든."

"뭐, 뭐라고? 그럼 경력은?"

"경력은 모두 진짜야. 애초에 위조가 되는 경력이 아니잖아. 대통령 경호팀에서 쫓겨난 다음에 각성했어."

앨리스는 이런 곳에 조직원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떨다가...

이내 더욱 심각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사실상 팀원을 한 명도 못 뽑은 거잖아?"

"... 그렇지."

"너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지옥행을 함께하게 될 동료들이야. 어중이 떠중이는 없는 것만 못해."

사실 국정원 쪽은 조금 기대했는데, 그쪽도 내 기준에는 조금 모자랐다.

그 사이 내가 걸어놓은 필터를 살펴보곤 작게 코웃음을 치는 앨리스.

"징계 기록이 있는 사람들은 왜 제외시킨 거야? 본인도 징계 받았으면서."

"아, 그런가? 확실히 일리가 있군."

공무원들 중 인재가 이렇게까지 없을 줄이야.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나는 앨리스의 비아냥을 받아들여서 징계 기록자들을 찾아봤다.

확실히 조금 전보다는 경력이 훨씬 다채롭고 재미있다.

"이거 능력 위주로 선발한다면 쓸만할지도."

"진심이냐..."

"아, 뻐근하다. 슬슬 퇴원하자. 여기 밥은 맛이 없어."

내가 병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앨리스가 냉큼 짐을 챙겨줬다.

녀석도 빨리 예리엘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대로 퇴원 절차를 마친 우리는 냉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기다리던 예리엘이 양팔을 벌리며 나를 환영해주는 가운데.

나는 어젯밤에 준비해놓았던 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작은 종이 쪽지에는 기나긴 코드가 쓰여있었다.

"앗, 이게 뭔가요?"

"네가 나를 도와줬으니, 나도 너를 도와줘야지. 이게 바로 오라클의 접속 코드야. 아직 이것저것 제한이 걸려있지만 학습용으론 쓸만할걸."

"!"

예리엘은 내 설명에 몸을 크게 떨더니 코드도 제쳐두곤 나를 꽉 끌어안았다.

본인을 믿어줘서 무척 고맙다는 듯한 반응.

옆에서 나를 째려보던 앨리스가 작게 기겁했다.

"언니, 좀 떨어져봐. 오라클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아, 슬슬 설명해줄까? 어차피 곧 알게될테니."

겨우 예리엘의 품에서 탈출한 나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오라클의 정체를 밝혔다.

"오라클은... 쉽게 설명하자면, 헌터 능력이 적용된 컴퓨터야."

"컴퓨터?"

"그래. 컴퓨터가 혼자서 천리안도 쓰고 투시 같은 것도 쓴다고 생각하면 돼. 아직 미완성 상태이지만, 지금 단계로도 현존하는 모든 전자장비를 해킹할 수 있지. 심지어 무선 모듈이 없는 CCTV 같은 것도 해킹할 수 있어."

"그게 미완성 단계라고? 그럼 만약 완성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 되는 것이긴.

"오라클이 완성되면 뭐든지 가능해져. 미래예지, 현실조작, 차원이동..."

"정말로?"

"오라클은 복수의 헌터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서, 인간 헌터들과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 능력의 한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 지금 오라클이 습득한 능력은 고작 3가지 뿐인데도 이 정도야."

"..."

이러니까 회사 정도 되는 조직이 오라클 하나에 목을 메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오라클이 완성되면, 모든 고민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다.

지구상에서 헌터 범죄를 평화적으로 종결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직 완성까진 아직 한참 멀었지만. 지금 완성도가 5%도 안 된대."

"그, 그건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예리엘. 괜히 눈치보지 말고 어서 시험해봐."

"알겠어요."

나와 예리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일을 시작했다.

앨리스가 무척 걱정스런 얼굴로 건너편의 자리에 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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