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서장(8)
* * *
콰득!
앨리스가 비어있던 오른손을 움직이자, 등 뒤의 살인토끼도 식칼을 든 오른손을 움직였다.
마치 그녀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은 행동.
앨리스 윈터는 소환사라기 보다는 인형사라고 부르는 게 훨씬 더 적절한 헌터였다.
앨리스의 오른손을 허공을 허무하게 갈랐으나...
식칼을 든 토끼의 오른손은 그렇지 않았다.
경쾌하게 호선을 그린 칼날이 북두칠성 길드원 둘을 순식간에 양단했다.
다 큰 남자들의 몸통이 무슨 장난감처럼 손쉽게 잘려나갔다.
"끄아아악!"
"멈추지 마! 한꺼번에 덮쳐!"
그래도 꼴에 일류 길드 소속의 헌터였다는 것일까.
북두칠성 길드의 잔당들은 제법 조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차를 두고 차륜전을 유도하는 것은 전형적인 헌터들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앨리스는 그들을 가차없이 베고 찌르고 박살내버렸다.
서로의 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딴 게 통하겠냐 쓰레기들아!"
촤악! 콰직!
눈 깜짝할 사이에 헌터 다섯의 생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버렸다.
비로소 본인들의 격차를 실감한 헌터들이 뒤늦게 몸을 빼내려 했으나, 앨리스는 놈들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얄미운 모습만 보여주긴 했으나, 녀석은 나와 제대로 한 판 붙어볼 수 있는 톱급 헌터다.
전성기에도 일개 길드원들이었던 놈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죽어, 죽어, 죽어!"
앨리스가 외칠 때마다 악몽에서 기어나온 것 같은 괴물들의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솔직히, 나는 그녀를 조금 얕보고 있었으나...
과연 그녀는 프로 헌터였다.
앨리스는 도망치는 헌터들도 남김없이 도살해버리고 있었다.
상대를 얕보지 않고 확실히 끝장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선 안 됐다.
그녀가 내게 등을 보인 사이, 일단의 무리들이 내가 타고있는 차량을 향해서 빠르게 접근했다.
나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에 속으로 혀를 찼다.
저건 아군도, 북두칠성의 잔당들도 아닌 제3의 세력이었다.
'북두칠성의 잔당들 따위가 덤벼들었을 때부터 예상했어야지.'
대한민국은 범죄를 저지르기에 결코 좋은 나라가 아니다.
특히 도심에서의 범죄 검거율은 100%에 한없이 가깝다.
전국 어디에나 CCTV와 블랙박스가 깔려있고, 전 국민의 주민등록이 완료되어있는 빡빡한 환경.
이런 곳에서 일을 저지르면 무조건 검거된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놈들은 백주대낮 마포대교의 한복판에서 일을 벌였다.
즉... 놈들은 일을 저지른 뒤에 한국에 남아있을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기로 합의가 되어있었겠지.
'나는 지금 예리엘 프로스트의 남편이니까... 선물로 가져가면 망명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주겠지.'
그들과 합의한 제3의 세력이 바로 지금 다가오고 있는 괴한들이다.
북두칠성의 잔당들 정도로는 작전을 완수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친히 공작원을 보냈으리라.
앨리스도 뒤늦게 놈들의 존재를 눈치채곤 왼손을 휘둘렀다.
"너희들은 또 뭐야?"
"크윽!"
콰앙!
회중시계를 쥔 흰토끼의 손이 복면의 괴한 중 하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그것을 어렵사리 버텨내곤 내쪽으로 몸을 날렸다.
앨리스는 연이어서 식칼을 휘둘렀으나... 그녀의 적은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도로변에서는 총격까지 시작됐다.
아까전의 놈들보다 개개인의 실력도 훨씬 낫다.
타다다당!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와!"
"윽!"
세단의 뒷문을 거칠게 뜯어내곤, 나를 억지로 들쳐업는 괴한.
나는 열심히 겁에 질린 체를 하며 한숨을 삼켰다.
예리엘 덕분에 납치도 한 번 당해보다니.
"그거 놔!"
촤아악!
앨리스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덤벼들었으나, 괴한들은 그리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혼자서 그들을 밀어붙이는 모습은 대단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특공대 몇 명이 간신히 그녀의 발목을 잡는 사이. 나를 업은 괴한이 건너편 차선으로 향했다.
마표대교는 5차선짜리 다리 2개를 나란히 세워놓은 것이라서, 두 다리 사이에는 상당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 한 명을 업은 채 그것을 가뿐히 뛰어넘은 것이다.
건너편에는 아예 도주용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일솜씨가 괜찮군.'
만약 내가 납치당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을만큼 괜찮았다.
그들은 나를 SUV의 뒷좌석에 냉큼 던져넣더니 곧바로 도주를 시작했다.
앨리스가 성대하게 일을 저질러놓은지라, 저쪽 도로는 물론이고 이쪽도 차들이 쫙 빠져나간 상태였다.
"멈춰!"
앨리스의 노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납치범들은 내게 냉큼 눈가리개를 씌웠다.
그러나 앞서 언뜻 본 것으로 충분했다.
케이블타이로 손목까지 묶여버린 나는 차가 급가속하는 것을 느끼며 필요한 정보를 정리했다.
'차종은 신형 쏘렌토. 범죄용이니까 블랙박스는 당연히 없고, 모든 유리에 엄청나게 짙은 선팅... 당연히 불법이겠지. 왼쪽 놈 다리에 권총 한 자루. 10mm 글록에 안전장치는 없음. 오른쪽 놈은 틀림없는 육체강화계 능력자다.'
아까 얻어낸 정보들을 복기하고 있자 앞쪽에서 어눌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이제현 씨. 얌전히 있으면 다치지 않을 겁니다. 저희는 이제현 씨를 해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
끄덕.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차량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꺾였다.
이놈들, 여의도를 거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마포대교에서 김포공항까진 거리가 꽤 있지만, 중간에 차량을 교체하거나 하면 꼭 실패하리란 보장도 없다.
역시 나를 납치해서 외국으로 떠날 생각이다.
'나를 미끼로 예리엘을 낚으려는 거겠지.'
예리엘의 남편은 고생할 수밖에 없는 팔자다.
나는 자꾸만 흔들리는 차량 안에서 마음을 정했다.
조금 더 있으면 나를 호위하는 에스콰이어와 서번트들이 나설 것이다.
부하들을 쓸데없이 고생시키는 것도 상사가 할 짓이 아니다.
그뿐이랴. 시간을 너무 끌면 예리엘이 직접 올지도 모른다.
'주변이 조금 잠잠해졌네. 슬슬 시작해볼까.'
나는 겁을 먹은 체 몸을 떨며 타이밍을 가늠했다.
그 사이 납치범들은 긴장이 조금 풀린 듯 러시아어로 떠들어댔다.
굳이 러시아어를 쓰는 것은 위장인 것 같지만...
아직 작전이 끝난 것도 아닌데, 프로답지 못하다.
"너무 얌전한데? 예리엘 프로스트가 이런 남자에게 반했다니..."
"왜, 얌전해서 좋구만."
"진짜로 그 여자가 이 남자를 위해서 망명할 것 같습니까?"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성공하면 초대박 아니냐."
안쪽의 분위기는 평온했지만, 정작 차량은 미친 듯 폭주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국을 떠날 작정이니 속도위반 따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덕분에 차량은 쉴새없이 덜컹거렸다.
올림픽대로를 내달리고 있는지라 과속 방지턱 따위가 있을리도 없는데 미친 듯 통통 튀고 있다.
'지금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차가 유독 크게 흔들린 순간.
나는 일부러 왼쪽으로 살짝 쓰러졌다.
왼쪽의 사내는 쓰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승차감이 엉망이라서 죄송합니다."
탕탕!
나는 시시한 농담에 총성으로 대꾸했다.
10mm 탄환 두 발은 방탄복이 없는 하반신에 정확히 명중했다.
"끄억!"
"어, 어떻게!"
납치범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눈가리개를 뒤집어쓰고 있는데다, 권총의 홀스터에는 안전장치 역할의 버클까지 걸려있었던 것이다.
놈의 상반신을 더듬은 나는 목에도 한 방을 먹여서 숨통을 끊어버린 다음, 상체를 숙여서 오른쪽 사내의 팔꿈치를 피했다.
"헉?"
그럴 줄 알았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상대에겐 팔꿈치가 가장 빠르고 편하다.
팔꿈치로 허공을 가른 놈은 본인의 능력을 믿는 듯, 방어를 준비했으나...
나는 권총이 아니라 팔꿈치로 직접 놈의 옆구리를 찍어버렸다.
콰득!
방탄복으로 보호받는 육체강화 능력자의 옆구리가 무슨 망치에 맞은 것처럼 함몰됐다.
왼손의 권총으로 앞좌석의 놈들을 견제하며, 손목을 묶고있던 케이블타이를 힘으로 찢었다.
"이, 이 자식 헌터... 커헉!"
"너희는 예리엘 프로스트의 남편이 보통 남자일 줄 알았냐?"
그대로 눈가리개까지 벗어던진 나는 앞쪽의 두 놈도 마저 정리했다.
미친 듯 달리던 쏘렌토가 그대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며 옆으로 넘어졌다.
콰광!
차가 전복되기 직전, 안전띠를 착용한 덕분에 나는 비교적 멀쩡했다.
반면 납치범들의 시체는 차 안에서 엉망으로 굴러다니거나 아예 차 밖으로 튕겨나가버렸다.
콰드드득!
진동이 조금 잦아든 뒤 깨진 창문으로 기어나온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내가 서둘러 거리를 벌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서 차량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대기하던 호위팀이 발화 능력으로 차에 불을 붙였다.
"와, 와앗! 불이다! 모두 물러나요!"
"으아악!"
뛰어난 시민정신을 발휘하며 다가오던 시민들이 그것을 보곤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온몸이 너덜너덜한 와중, 예리엘이 아침에 묶어준 넥타이만 멀쩡했다.
'잘 묶었네.'
콰아앙!
나는 등 뒤에서 폭발음을 들으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납치용 차량을 줄곧 뒤따르고 있었던 한예진이 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마스터! 괜찮으신가요?"
"내 짬에 직접 뛰어야겠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얼른 처리해. 배후도 알아보고."
"네, 마스터. 납치의 배후는 영국으로 확인됐습니다. 러시아인 용병들을 써서..."
아스팔트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으니까 너무 편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구급차가 올 때까지 시체처럼 늘어져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