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서장(7)
* * *
멸망까지 354일.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다.
예리엘과 결혼한 이후로, 나는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시민과 언론들의 불필요한 관심은 이제 겨우 진정이 되어가는 추세.
그런 와중에 얼굴을 비추는 것은 역효과만 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외출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예리엘과 나는 오늘 헌터 협회에 방문하여 협회장에게 특별 수사관의 임명을 요청할 생각이다.
덕분에 나의 에스콰이어인 한예진은 아침부터 정장을 배달해줬다.
"마스터. 이거면 될까요?"
"좋아."
적당한 상표의 적당한 기성품.
다행히 사이즈는 딱 맞았다.
한예진은 나를 보좌하는 에스콰이어인만큼, 내 치수 정도는 당연히 파악하고 있었다.
예리엘은 그런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며 흐음, 하고 침음을 삼켰다.
사자앞에 선 토끼처럼 벌벌 떨던 한예진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물었다.
"저, 무슨 문제라도..."
"아뇨, 그냥. 너무 당연하다는 듯 치수를 맞춰오셔서요. 혹시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미 같은 것도 알고 계신가요?"
"... 음식은 특별히 가리시는 게 없지만, 부담이 적고 가벼운 걸 선호하셔요. 취미는..."
"뭘 태연하게 가르쳐주고 앉았냐."
내가 넥타이를 만지며 꾸중하자 깨갱, 하고 움츠러드는 한예진.
예리엘은 냉큼 내쪽으로 다가와서 넥타이를 매줬다.
좀 부담스럽지만 남이 해주는 것이 편하긴 하다.
그녀는 타이를 적당히 풀어주며 내게 물었다.
"남편에 대해서 알면 안 되나요?"
"차라리 나한테 물어봐."
"아앗. 알겠어요. 앞으로는 마구 질문해드릴게요."
"... 예진 씨, 수고했어. 이만 가봐."
"예, 마스터."
한예진이 떠난 직후, 나는 새삼 예리엘의 복장을 살펴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외출하게 된 그녀는 가벼운 사복 차림이었다.
원래는 협회에 방문하는 것이니 그녀도 정장을 입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래도 은퇴한 직후라서 일부러 다르게 선택한 것 같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장난스레 물었다.
"그냥 제복 입을까요? 하지만 이쪽이 더 신혼 같아서 좋죠?"
"마음대로 해."
"그러지 말고 확실하게 선택해주세요."
"그럼 이대로 가자."
기껏 은퇴했는데 제복은 좀 아니다.
정장도 너무 딱딱하다.
자칫하면 그녀가 협회에서 일하거나, 현역으로 복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대충 준비를 마친 예리엘은 주저없이 나와 팔짱을 꼈다.
이번에는 나도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예리엘의 남편이라는 자격으로 특별 수사관의 자리를 따내려는 것이다.
기왕 결혼을 해버렸으니,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켁."
거실에서 대기하던 앨리스는 사이 좋은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곤 대놓고 혀를 찼다.
오늘의 그녀는 나와 예리엘의 호위 역할이다.
내게도 호위 역할의 에스콰이어가 붙어있긴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회사의 존재는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된다.
"그럼 출발하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한 나는 힘든 설전을 예감했다.
헌터 협회의 특별 수사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임명된 적이 없는 직위다.
사실상 협회법상에만 존재하는, 사문화된 법령!
그런 직위를 이제와서 임명하는 것은 협회장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다른 헌터들이 알게 되면 굉장히 싫어하겠지. 협회가 헌터들에게 목줄을 채우려는 것처럼 보일 거야.'
실제로도 그게 맞다.
우리는 지금 헌터들의 목에 목줄을 채우려는 것이다.
놈들은 목줄과 입마개 없이는 밖에 풀어놓아선 안 되는 맹견들이다.
그것을 지금까지 방치한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내 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협회장을 설득해야할 예리엘은 그저 즐거운 얼굴이었다.
간만의 외출에 어지간히도 신이 난 모습이다.
'많이 답답했나? 이 여자 현역 시절에도 이런 얼굴은 거의 본 적 없었는데...'
우리를 태운 차량은 금방 협회에 도착했다.
이번 외출은 홍보성 목적도 있어서, 굳이 지하주차장으로 가지 않고 지상에서 입장.
따로 기자들을 불러모으거나 하진 않았지만 금세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협회의 안쪽은 제법 한산한 느낌이었다.
"엇, 저기 설마..."
"예리엘 씨다!"
"은퇴하신 것 아니었어?"
안쪽에서 협회원들이 2열 종대로 정렬해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내가 그런 감상을 전하자 예리엘이 피식 웃었다.
"예전에 진짜로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몸을 돌려서 돌아가버렸죠. 그 뒤로는 안 그러더라구요."
"아, 그래? 잘했네."
우리는 사람들이 너무 모여들기 전에 협회장실로 올라갔다.
앞선 내 걱정이 무색하도록.
협회장은 예리엘의 이야기를 들은지 1분도 되지 않아서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
"좋아, 통과."
"네?"
"예리엘의 추천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제현 씨는 북두칠성 길드를 해체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하겠네."
그대로 임명장에 도장까지 찍어주는 협회장.
흰머리가 지긋한 아저씨치곤 많이 시원시원하다.
내가 이렇게 쉬워도 되는가 싶어서 의심하고 있자 그가 솔직한 속내를 조금 털어놓았다.
"어차피 내겐 뾰족한 대안도 없고, 임기도 거의 끝나간다네. 앞으로 길어봤자 1년이라고 했나? 그 정도는 충분히 버텨줄 수 있어."
"그, 그러시군요."
"역시 협회장님 밖에 없네요."
예리엘이 서비스로 몇 마디 해주자 협회장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이제 보니 예리엘의 사생팬 같은 느낌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덧붙였다.
"다만 민간인들은 건드리지 말아주게. 우리가 커버할 수 있는 건 협회원들 뿐이니까..."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
"세상에 절대는 없죠. 절대라는 말을 애용하는 놈들은 보통 사기꾼입니다."
"그것도 그렇군."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나누곤 함께 점심을 먹은 뒤 헤어졌다.
이미 신임 특별 수사관에 대한 소문이 퍼진 듯, 협회 주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제현 씨! 이번에 헌터 협회 특별 수사관으로 임명되신 소감을..."
"이번 임명은 검찰과 합의가 된 사항인가요?"
냉큼 차를 타고 그들에게서 도망친 우리는 프로스트 자선 재단으로 향했다.
기왕 외출을 나온 김에 이것저것 한꺼번에 처리할 작정인 것이다.
그녀는 내게도 자선 재단을 보여주고 싶어했으나...
나는 그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당신도 같이 가실래요?"
"미안. 나는 빨리 돌아가보는 게 좋겠어."
"하긴. 쌓인 일이 많긴 하죠."
특별 수사관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수사관이라곤 해도 혼자서 일하는 것은 아니라서, 조금이라도 빨리 팀원들을 선별할 필요가 있었다.
내 눈은 제법 높으니까 팀을 조직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어쩔 수 없네요. 먼저 돌아가세요. 앨리스, 호위를 부탁할게."
"알겠어, 언니."
이번에는 앨리스도 군말없이 동의했다.
아까 협회 앞에 죽치고 있었던 헌터부 기자들은 정치부 기자들과 버금가는 엘리트들이다.
물론 이 엘리트라는 것이 별로 좋은 뜻은 아니고... 그냥 기득권과 결탁하여 루머성 기사들을 쏟아낸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악명높은 연예부 기자들보다 훨씬 더럽고 치사한 놈들이바로 헌터부 기자들인 것이다.
'그놈들이라면 차를 가로막는 짓 정도는 얼마든지 하겠지.'
그대로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우리를 태운 세단이 마포대교에 도달했다.
앨리스와는 도통 대화가 없어서 조금 괴롭다고 생각하는데...
돌연, 내 스마트폰이 작게 울었다.
삐빅!
"음?"
짧게 울리다가 곧바로 끊기는 신호.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며 운전석의 앨리스에게 말했다.
조막만한 그녀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모는 것은 꽤 묘한 느낌이었다.
"적이다."
"뭐라고? 적?"
"그래."
조금 전의 신호는 내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에스콰이어가 보낸 신호다.
그런 내 말에 호응하듯.
정체불명의 차량들이 곧바로 우리 차량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앨리스는 그냥 속도를 높여서 돌파할까 싶다가 그만뒀다.
"뭐야 이것들? 이런 대낮에 습격이라니..."
"야, 얼른 나와!"
무슨 조폭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에서 우르르 내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녀들.
두꺼운 복면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나는 목소리만 듣고도 놈들을 알아봤다.
지난번에 호텔 로비에서 마주쳤던 북두칠성 길드의 잔당들! 그놈들이 틀림없다.
"아... 북두칠성이네."
"북두칠성이라고? 야, 너 얌전히 있어. 언니의 부탁이니까 지켜줄게."
"수고해."
감히 북두칠성의 잔당들 따위가 본인을 습격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까?
앨리스는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설마 그녀가 운전대를 잡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 크게 당황하는 습격자들.
확실히 운전이 어울리는 인상은 아니다.
언뜻보면 면허도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십수명은 되어보이는 습격자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비켜, 씹새들아!"
"잠깐. 왜 앨리스 윈터가 여기에..."
"야, 쫄지마. 그래봤자 한 명이야. 상대가 무슨 예리엘 프로스트도 아니고!"
놀랍게도. 놈들은 앨리스를 보고도 전의가 꺾이지 않았다.
덕분에 앨리스는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사실 북두칠성 길드가 저럴만한 것이...
어차피 급소를 잘못 맞으면 S랭크 헌터든 뭐든 꼼짝없이 죽는다.
몬스터를 조지는 솜씨가 꼭 사람을 조지는 솜씨와 일맥상통하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고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두 감안해도.
앨리스는 무척 불쾌했다.
그녀와 북두칠성의 잔당들 사이에는 상성이나 머릿수 따위론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격차가 있었으니까.
그녀는 예리엘 프로스트의 옆에 서는 것을 허락받은 헌터였다.
"내가 만만하다 이거지?"
"가자! 어차피 저 새끼 가만히 놔두면 우린 끝장이야!"
아, 그렇게 된 건가?
나는 의외로 물러서지 않는 놈들을 보곤 전후사정을 대충 눈치챘다.
저놈들은 내가 협회의 특별 수사관이 됐다는 소식을 접하곤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내가 특별 수사관의 직위를 이용해서 자기들에게 복수라도 할 줄 알았나?'
말도 안 되는 착각이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두칠성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북두칠성의 수뇌부들은 이미 다 죽거나 수용 시설에 처박혀있다.
저것들은 굳이 건드릴 가치도 없는 잔챙이들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인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곤 하는, 나쁜 버릇을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앨리스가 회중시계를 꺼내들며 사납게 외쳤다.
"나와!"
회중시계가 한 번 흔들리자 그녀의 등 뒤에서 거대한 흰토끼가 소환되었다.
토끼라곤 해도 귀여운 느낌은 전혀 없고, 심각한 과로의 스트레스로 일그러진 살인토끼였다.
동화가 아니라 악몽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몰골!
마술사 모자를 쓰고 식칼과 회중시계를 든 토끼가 앨리스의 뒤에 수호신처럼 버텨섰다.
북두칠성의 잔당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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