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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6화 (6/131)

〈 6화 〉 서장(6)

* * *

예리엘은 일어나는 것이 빠른 편이었고, 나도 그랬다.

덕분에 우리집의 하루는 제법 일찍 시작됐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손님만 없었다면 이 생활도 제법 마음에들었을 것이다.

"언니,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앨리스? 제현 씨에게도 인사해야지."

"안녕."

앨리스는 예리엘에게 인사할 때와 영 딴판으로 대충 뱉었다.

나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의 소형 달력을 한 장 넘겼다.

휙.

이제 멸망까지 남은 시간은 약 355일.

나는 소파에 앉은 채 에스콰이어인 한예진이 정리해서 보내준 자료를 확인해봤다.

예리엘의 근처를 무슨 위성처럼 맴돌던 앨리스가 내쪽으로 다가와서 뭐 트집잡을 것이라도 없나 훔쳐봤다.

"그건 또 뭐야?"

"20년간의 헌터 범죄 발생률을 정리한 자료."

"암살자 주제에 그런 걸 보는 거야?"

"무턱대고 죽여대는 건 평화에 별로 도움이 안 돼. 조직의 인력도 한정되어있고."

앨리스는 작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자료 자체에는 호기심이 있는 듯 계속해서 흘깃거렸다.

나는 아예 태블릿을 탁자 위에 놔두곤 자료를 설명해줬다.

"그냥 편하게 봐라. 보다시피 헌터 범죄율은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상승했어. 그러다가 약 6년 전에 정점을 찍었지."

"6년 전이라면..."

"북두칠성 길드 사건."

"아하."

내가 검찰에서 쫓겨나 헌터로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초대형 비리.

그 결과 정치인들과 헌터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북두칠성 길드는 완전히 해체됐다.

헌터 범죄 발생률이 비로소 주춤해진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것을 지적하자 맞은편에서 앨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린 더스트의 활동이 헌터 범죄를 억제했다고 말하려는 거야?"

"그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야."

만약 헌터 범죄를 억제하지 못했다면 내가 뭐하러 암살 따윌 했겠는가.

내가 그런 핀잔을 꾹 참고있자 앨리스가 자료의 마지막 부분을 지적했다.

마침내 좋은 트집거리를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잠깐, 작년에는 던전 발생 빈도가 절반 이하로 줄었는데, 범죄율은 크게 변화가 없잖아? 이건 네 이론이 틀린 거 아니야?"

헌터들이 살기 팍팍해지면 범죄의 길로 빠지기 쉽다.

그것이 내 이론이었다.

지금도 그것은 다르지 않다.

"예리엘의 의견도 내 것과 동일한데?"

"아, 방금 건 취소."

무슨 초등학생이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숨겨진 자료를 공개했다.

"사실 내가 그린 더스트로 활동하면서 시행한 암살은 10건도 안 돼."

"10건이면 충분히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연쇄살인마 아닌가?"

"잠깐, 10건 가까이 됐어요? 제가 모르는 암살이 또 있었군요?"

내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호다닥 달려오는 예리엘.

나는 커피잔을 하나 넘겨받으며 쓰게 웃었다.

이건 윈터킹덤의 성녀님께서 보여줘도 되는 모습이 아니다.

"아무튼... 그 중 절반이 바로 작년에 일어났어."

"켁..."

그제야 내 말뜻을 눈치챈 앨리스.

'헌터들이 살기 팍팍해져도 범죄율이 상승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원래는 범죄율이 치솟아야 하는데, 내가 죽어라 뛰어다니면서 막은 거다.

당연히 암살만 했던 것은 아니고, 곱게 말로 하거나 몇 대 쥐어박아서 막은 경우는 훨씬 많다.

나는 어제 저녁의 뉴스를 스크랩해둔 것을 보여주며 말했다.

"헌터들도 슬슬 눈치채고 있어. 던전 발생 빈도가 너무 적어. 그야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 눈치챌 수밖에 없지."

"... 이해가 안 돼. 왜 그렇게까지 범죄율이 치솟는 거야?"

웬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앨리스의 모습에 예리엘이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앨리스가 아니라 예리엘을 위해서 설명해줬다.

어차피 내가 안 하면 그녀가 할 것이다.

"헌터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감각이 일반인들과 달라."

"범죄의 감각?"

"그래.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는 아직 헌터 범죄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만약 A랭크 이상의 헌터들이 작정하고 일을 저지르면 막기 힘들지. 놈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키지 않을 수 있어."

생각해보자.

만약 순간이동 능력자가 슈퍼 밖에 놓여있는 상품을 하나 훔친다면, 그걸 잡을 수 있겠는가?

투명화 능력자는 또 어떻고?

하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그걸 범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본인들이 몬스터들에게서 시민들을 지켜주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가져가도 된다고 생각하겠지. 우리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

"..."

앨리스도 주변의 헌터들을 보고 느낀 것이 있어서 차마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헌터들 사이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굉장히 보편적인 것이다.

미디어와 정부가 영웅 취급을 해준다고 본인들이 진짜 영웅인 줄 안다.

"진짜로 위험한 것은 범죄를 정당화하는 사고방식이야.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건 금방이지. 한 번 선을 넘으면 두 번째는 훨씬 쉬워."

이런 상황에서 헌터들의 주요 수입원... 즉, 던전이 급격히 줄어든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헌터들은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본인들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본인들의 마땅한 권리라고 생각할테니까.

앨리스는 작게 넌더리를 내며 내게 물었다.

"그럼 결론이 뭐야? 뭘 어쩌자는 건데?"

"그러니까, 헌터들을 싹 다 죽여버리면 해결된다니까?"

"..."

말 없이 웃으면서도 내게 눈총을 주는 예리엘.

앨리스도 안 쓰던 머리를 쓰면서 내 의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 애썼다.

"그렇게 해치워봤자 다른 헌터들이 빈자리를 채우면 어떻게 하려고?"

"빈자리 못 채워. 네가 말하는 범죄의 연쇄는 시스템이 그대로일 때의 이야기야."

내게 범죄학을 가르치려는 것이 좀 우습기도 했으나...

애가 웬일로 머리를 쓰는 게 가상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앨리스는 벌써 머리가 과부하 된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지구상에 더 이상 게이트와 던전이 생성되지 않으면, 대기중의 마력 농도는 급격히 낮아질거야. 게이트와 던전이 등장하기 전의 지구처럼 말이지. 그럼 사람들이 헌터로 각성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줄어들테고."

그래서 헌터들을 모두 죽여버리면 끝난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뒤로는 새로운 헌터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예리엘이 그건 싫다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나도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양지에서 일을 처리하려니까 걸리적거리는 것이 너무 많다.

예리엘은 아예 나를 빤히 쳐다보며 의견을 구했다.

"몰살 말고 다른 방법도 생각하고 계신 거죠?"

"방법까진 아니고, 양지에서 일을 처리하기 위한 조건에 가까운데..."

"조건?"

"수사기관이 범죄를 저지른 헌터들을 제대로 잡아들이기 위해선 여러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해. 일반적인 수사로는 도저히 체포가 불가능하니까."

"그게 정확히 어떤 거죠?"

어느새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리를 좁혀온 예리엘.

나는 그녀에게서 살짝 물러나며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단 영장없이 수사한 다음 사후에 청구를 받을 수 있어야하고, 도청과 감청도 무제한적으로 가능해야 해. 물론 해당 자료는 법원에서 증거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하고."

"다른 헌터들이 들으면 거품물겠네."

앨리스가 작게 코웃음을 쳤으나 나는 무척 진지했다.

"헌터 범죄자들은 초능력 같은 거 쓰면서 범죄를 저지르는데, 우리는 지킬 거 다 지키면서 정석대로 딱딱 수사하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시대에 한참 뒤쳐졌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나갔잖아..."

불행히도 전제조건은 아직 한참 남아있다.

그런데, 정작 예리엘은 작게 침음을 삼키며 웃는 것이 아닌가.

직후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제법 놀라웠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뭣? 어떻게?"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헌터들은 모두 협회에 가입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잘 이용하면..."

예리엘이 말한 방법은 놀랍게도 가망이 있어보였다.

제법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간신히 합법.

그녀는 나도 잘 모르고 있었던 협회의 조항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잠깐, 그럼 영장 사후발부는 어떻게..."

"그건 제가 통과시켜볼게요. 사실 헌터들의 활동도 비슷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요."

"아. 그건 그렇지."

예리엘과 만난 이래로, 내 심장이 가장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로 이 모든 것을 양지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건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칼질할 필요가 없나?

그러나 앨리스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무척 혼란스러울 법도 하다.

"잠깐, 그거 네가 직접 하겠다는 건 아니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는데?"

"아니... 너 검찰에서 해임 당했잖아? 잘은 모르지만, 그거 꽤 강한 징계 아니야?"

왜 아니겠는가?

공무원이 받는 징계 중 최상은 보통 파면이지만...

검사는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파면을 당하지 않는다.

현행법상, 검사가 파면을 당하기 위해서는 탄핵이나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형을 선고받는 절차부터 굉장히 오래 걸리는데다...

현직 검사가 파면을 당하는 것은 검찰의 위신을 엄청나게 해친다.

그래서 검사의 징계 중 최대치는 해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한 사정을 전해들은 앨리스가 더더욱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네가 어떻게 검사로 복귀하겠다는 거야?"

"검사로 복귀 안 해."

"뭐?"

"지금 우리가 논의중인 건 헌터 협회 직속의 특별 수사관이야. 검찰청이 아니라 협회장 밑에서 움직이는 특별 직위다."

물론 그 수사 대상은 오직 협회 소속의 헌터로 한정되지만...

협회법에 명시된 특별 수사관의 권한은 하나하나가 어이없는 수준이었다.

예리엘은 아예 수백 페이지짜리 자료를 가져와서 직접 짚어줬다.

내가 다시 한 번 거리를 벌리자 그녀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보였다.

"너무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 아닌가요?"

"아, 미안. 그쪽이 공격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간격은 좀..."

"공격범위를 신경쓰고 계셨던 건가요..."

"여튼, 이거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

물론 협회의 특별 수사관으로 임명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설마 예리엘의 인맥이 협회장 라인까지 닿아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제법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장님도 이번 건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계셔요."

"조금이라면... 던전과 게이트가 오래 못 간다는 사실 정도?"

"네, 딱 그 정도요. 그러니까 제가 설득할 수 있어요. 당신을 반드시 특별 수사관으로 만들어드릴게요."

"좋아."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을 넘어서...

이제 양지의 수사관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예리엘에게 위험한 간격을 허락했다.

묘하게 신이 난 그녀가 냉큼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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