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서장(5)
* * *
몸 속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예리엘은 내 혈색이 돌아온 것을 보곤 작게 감탄했다.
"대단하군요. 투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 감사합니다."
세계 최고의 헌터에게 칭찬을 받게 된 한예진은 쑥쓰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몸 속을 보지도 않고 치료하는 그녀의 기술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내 전용 치료사라서 숙련도가 쌓였다곤 하지만, 이런 실력자는 일류 길드에도 거의 없다.
나는 예리엘의 반응을 볼 겸 당사자 대신 자랑했다.
"당연하지. 얘는 이래봬도 에스콰이어니까."
"마, 마스터!"
"에스콰이어?"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반응하는 앨리스와 달리.
예리엘은 대충 알고있는 눈치였다.
하긴. '회사'의 핵심 기밀인 오라클에 대해서 알고있는데, 에스콰이어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하나의 오라클.
3인의 마스터.
9명의 에스콰이어.
그리고 81체의 서번트들.
내가 몸담고있는 조직의 구성이다.
각 계급은 명확하게 구별되며, 에스콰이어는 마스터의 보조 및 호위를 담당하게 되어있다.
나는 치료사인 한예진이 몇 번이나 불렀다시피 마스터다.
그제야 호칭의 의미를 대충 짐작한 앨리스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 마스터도 계급인 건가. 에스콰이어 밑에는 뭔데?"
"서번트."
"이건 뭐 다단계도 아니고."
앨리스가 그렇게 평하자 내 치료사인 한예진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으나...
사실 나도 앨리스와 비슷한 소감이다.
이 계급체계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치료를 마친 한예진이 겨우 내 가슴에서 손을 뗐다.
내가 셔츠의 단추를 빠르게 채우고있자 예리엘이 그녀에게 물었다.
"상태가 많이 나쁜 건가요?"
"그... 그린 더스트를 생성하신 직후엔 꼭 치료를 받는 게 좋아요. 피폭량이 너무 많이 쌓이거나,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그만큼 치료가 어렵고 길어지니까요."
내 눈치를 살피며 더듬더듬 대꾸하는 한예진.
어차피 들켜버린 이상, 이 정도 정보는 공개해도 된다.
나는 미리 제작해놓은 그린 더스트를 그녀에게 넘겼다.
"가져가."
"아, 감사합니다."
묵직한 가방을 안아든 한예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조직에서 마스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린 더스트 덕분이다.
그린 더스트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주지 않으면, 다른 마스터들이 내게 손을 쓸지도 모른다.
그래서 굳이 예리엘과 앨리스가 보는 앞에서 부랴부랴 그린 더스트를 제작했던 것이다.
이건 도저히 뒤로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이걸로 당분간은 잠잠하겠지.'
그린 더스트를 정기적으로 공급해주는 이상, 조직 내부에서 내 지위는 보장된다.
내가 예리엘과 결혼을 하든 말든 그린 더스트만 제깍제깍 갖다주면 아무 문제없다.
나는 내친김에 한예진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 직속 에스콰이어인만큼, 이미 충성심이 입증된 인재였다.
"그나저나 숙제는 해왔어?"
"네! 마스터. 각국에서 던전의 생성 횟수가 급격히 감소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스터께서 보내주신 자료가 맞았어요."
"그래?"
역시 예리엘의 말은 사실이었던 건가.
내가 그것을 확인하자 앨리스가 불쾌함을 내비쳤다.
"언니의 말을 못 믿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넙죽넙죽 믿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무조건 이중삼중으로 확인해야지."
정작 예리엘은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믿어주시는 거죠?"
"일단은."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엔 도저히 믿고싶지 않았어요."
"마스터.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업무를 마친 한예진은 커다란 가방을 소중히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직 이것저것 신경쓰이거나 궁금한 것이 남아있는 눈치였으나...
에스콰이어는 마스터에게 감히 질문 따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스터 휘하의 에스콰이어와 서번트들은 오직 마스터를 보좌하기 위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게 한예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이윽고 앨리스도 떠나야 할 때가 됐다.
그녀는 예리엘과 달리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있는 헌터인만큼... 언제까지나 여기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녀석은 마지막까지 예리엘을 보며 말했다.
"언니, 저녁에 다시 올게. 이따 봐!"
"응, 조심해서 잘 다녀와."
마침내 앨리스를 떠나보낸 나는 예리엘에게 물었다.
"쟤 어디에 살아? 바로 아래층인가?"
"아앗, 앨리스가 좀 무례하긴 해도 암살은 안 돼요."
"암살은 무슨. 그냥 야한 비디오나 보내줄까 해서."
나는 일부러 좀 짓궂게 말했으나, 예리엘은 한 술 더 떴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욱 밝게 웃으며 받아치는 것이 아닌가.
"정말요? 혹시 지금부터 찍을 건가요?"
"... 그나저나 지금 뭐 하는거야?"
괜히 장난쳤다가 본전도 못 건지게 된 나는 그녀가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려대는 것을 보곤 물었다.
세계 최고의 헌터가 은퇴한 뒤에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솔직히 조금 궁금하지 않은가.
예리엘은 흔쾌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노트북의 화면을 보여줬다.
좀처럼 다가가기 힘든 이미지라서 성녀라고 불렸던 주제에 의외로 붙임성이 좋다.
"재단 관리중이에요."
"재단이라면... 프로스트 재단?"
"알고 계셨군요?"
누가 모르겠는가.
예리엘이 자선 단체들의 부정부패에 질려버린 나머지 직접 자선 재단을 설립했다는 것은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다.
모든 자금 운용 내역은 투명하게 공개되며, 직원들의 월급은 100% 예리엘의 사비로 나간다.
심지어 연간 100만원 이하의 소액 기부는 받지도 않는 것으로 알고있다.
'은퇴는 개뿔. 이렇게 재단 운영만 해도 어지간한 직장인 업무량 뺨치겠구만.'
나는 속으로 핀잔을 주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세계 최고의 헌터가 바로 옆에 있다보니 자꾸만 질문거리가 생긴다.
"그런데 왜 소액 기부는 안 받는 거야?"
"소액 기부를 받으면 그걸 처리하기 위해서 직원을 추가로 고용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 인건비가 더 나갈 수도 있거든요. 저희 재단은 이것저것 일이 좀 많아서..."
"아하..."
프로스트 재단은 모든 자금 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되어있어서, 다른 자선 재단보다 일처리가 훨씬 번거롭다.
그러니 인건비 때문에 소액 기부를 안 받겠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예리엘은 내 질문을 받게 된 것이 퍽 기쁜 듯 키보드를 두드리며 재촉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건 없나요?"
"당장은 없어."
"으음..."
놀라운 속도로 업무를 처리하던 그녀가 내쪽으로 몸을 살짝 기대더니, 곤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재단을 운영하다보면 가끔씩 이상한 기부자들이 있단 말이죠."
"어, 어떻게 이상한데?"
"미리 말도 없이 무통장으로 천 만원씩 입금한다든가, 아니면 아예 본사 앞에 현금을 다발로 갖다놓는다든가 말이에요."
잠시 커피를 홀짝인 그녀가 내쪽을 지그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잽싸게 눈을 피했다.
보아하니 이쪽도 들킨 것 같다.
"그런 돈은 범죄 수익일 가능성이 있어서 처리하기 무척 번거로운 거 알아요?"
"... 거 참 나쁜 사람이네."
"그렇죠?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실제로 암살당한 헌터에게서 나온 돈이라서 전액 반환해줬던 경우도 있어요."
말도 안 된다.
놈들에게 상속인이 없었던 것은 제대로 확인했는데?
설마 국고로 반환시킨 건가?
내 얼굴을 즐겁게 뜯어보던 예리엘이 어깨를 꽉 움켜쥔 채 물었다.
"뭐 할 말 없어요?"
"미안해."
"알면 됐어요."
"근데 그런 것치곤 잘만 쓰던데 뭘..."
괜히 한 마디 더 했다가 매서운 눈총을 받게 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있는지 감도 안 잡힌다.
강하긴 또 더럽게 강해서 나 혼자선 어떻게 해볼 수도 없다.
솔직히 이 정도면 조금 기가 죽을 정도다.
"내 일처리가 그렇게 엉망이었나?"
"아녜요. 말씀드렸잖아요. 오래전부터 지켜봤다구요."
"힌트를 좀 줘봐."
"알게 된지 한 5년 정도 됐어요."
5년 전이면... 내가 검찰에서 쫓겨난 다음, 뒤늦게 각성했을 때다.
그 때는 여러모로 서툴었으니, 정말 운 없게 걸렸을 수도 있겠다.
당시의 일을 떠올리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시절이야말로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여전히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예리엘이 이쪽의 기분을 눈치채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회하시는 건 아니죠?"
"후회? 당연히 후회하지."
"네에?"
나는 생뚱맞은 질문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담담히 말했다.
지금껏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없었는지라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아니, 후회가 안 되겠어? 만약 5년 전에 아무것도 모른 체 가만히 있었다면 아직도 신나게 검사 생활 하고 있었을텐데."
"그, 그래도..."
예리엘은 내 대답에 무척 놀란 듯 했으나, 나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가 뭐 좋아서 칼로 사람들 쑤시고 다닌 줄 알아? 능력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헌터들을 막으려다 검찰에서 쫓겨났는데, 이젠 나도 그놈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있어. 당연히 후회하지."
"... 제, 제 생각이 짧았네요."
그제야 본인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리엘.
그녀가 웬일로 쩔쩔매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나는 뒤늦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데 뭐 후회해봤자 어쩌겠어. 이미 일어난 일인데."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좋든 싫든 상관없어. 해야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야."
내 선호와 상관없이.
누군가는 헌터들의 천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태계가 유지되지 않겠는가.
나와 조금이나마 속을 터놓게 된 예리엘은 무척 개운한 얼굴이 됐다.
나도 내친김에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물어봤다.
"정말 나 같은 놈이랑 결혼해도 되겠어? 후회 안 해?"
"저는 후회 안 해요. 역시 당신밖에 없어요."
괜히 사람 머쓱하도록, 너무 진지하게 대꾸하는 예리엘.
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나란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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