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4화 (4/131)

〈 4화 〉 서장(4)

* * *

혼인 수속은 무척 빨랐다.

간단한 결혼식조차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끝내버리는 간단한 방식.

소박하다 못해 허무할 정도의 결혼이었으나...

그 결과는 그리 소박하지 않았다.

[전 최상급 헌터였던 예리엘 프로스트 씨가 결국 혼인 신고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본 방송국은 두 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삐익.

나는 듣기 괴로운 나머지 아침 뉴스를 꺼버렸다.

원래 저런 뉴스는 저녁 시간에 방송하곤 하는데, 어제 저녁 직전에 기습적으로 혼인신고를 해서 간밤에야 눈치챈 모양이다.

이미 주목을 받을만큼 받아버린 이상, 나는 예리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활동을 재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굳이 결혼까지 해야하는가 싶었지만 다행히 효과는 탁월했다.

"혼인 신고서만 제출했는데 이렇게 되는 건가..."

나를 향한 여론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반전돼서, 무분별한 추측이나 욕설 등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리엘이 몸담고 있었던 윈터킹덤 길드의 법무팀은 굉장히 유능했다.

이제 다른 헌터들도 나를 대놓고 건드리진 못하겠지.

신혼집은 이곳, 예리엘의 숙소를 그대로 쓰게 됐다.

1년 남짓한 계약 결혼.

아직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를 되새기고 있자 침실에서 예리엘이 걸어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 그래..."

당연하지만 일단은 각방이다.

내가 사복 차림의 예리엘에게 익숙해지려고 애쓰는데...

돌연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앨리스가 태연히 걸어들어왔다.

본인의 근무처가 아니라 남의 신혼집에 출근하고 앉았다.

"언니, 괜찮아?"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어?"

예리엘은 피식 웃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해줬다.

보아하니 자주 같이 먹었던 모양이다.

내가 마지못해 앨리스의 존재를 받아들이자 그녀가 내게 상자 하나를 툭 던졌다.

"자, 어제 주문했던 특수 밀폐용기. 이런 걸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감사."

일단 상자를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

예리엘의 음식 솜씨는 썩 나쁘지 않았다.

사실 아침 식사답게 맛이 없을 수 없는 메뉴이기도 했다.

그 사이 예리엘은 우리와 함께 수저를 드는 것이 아니라, 앨리스의 옆에 앉아서 머리에 리본을 매줬다.

저거 앨리스 본인이 직접 하는 게 아니었던 건가?

앨리스는 살짝 귀찮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차마 예리엘의 손을 뿌리치진 못했다.

공공장소에서도 저렇게 다니는 것을 보면 예리엘에게 진짜 깍듯하긴 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핀잔을 줬다.

"왜 현역 시절에 5시간도 못 잤는지 알 것 같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범죄자."

앨리스는 예리엘이 리본을 매주는 것을 그만둘까봐 포크를 흔들며 나를 위협했다.

예리엘은 그녀를 책망했으나, 정작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범죄자라니..."

"아, 괜찮아. 틀린 소리도 아니고."

"그치? 그나저나 이 인간이랑 꼭 함께 지낼 필요가 있는 거야?"

앨리스는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듯 싫은 얼굴을 보였다.

그린 더스트는 헌터 전문 살인귀.

그야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리엘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앨리스, 오늘은 이만 돌아갈래?"

"아, 아냐. 그냥 조용히 있을게. 미안해."

사실 예리엘의 의도는 대충 짐작이 간다.

그녀는 어떻게든 내 신뢰를 얻고싶은 것이리라.

우리는 어제 혼인신고에 앞서 간단한 규칙도 정했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나는 냉큼 소파로 자리를 옮겨서 밀폐용기를 집어들었다.

자그마한 앰플 같은 느낌의 특제 컨테이너.

나는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서 그 안을 채워넣기 시작했다.

사아앗...

기이한 불빛과 함께,내 손 끝에서 초록색 가루가 밀폐용기 안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앨리스와 예리엘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작업을 구경하러 왔다.

"그게 그린 더스트지?"

"그래."

그린 더스트.

내 별명이자, 또한 능력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력에 반발하는 특수한 물질.

그 용도는 가히 무궁무진하다.

지금 제작중인 분량은 내가 속한 조직인 '회사'에 넘겨줄 것이다.

그들은 예리엘의 존재를 무척 부담스러워했으나...

그린 더스트는 대체가 불가능한 물질이다.

당연히 그것을 공급해주는 나 또한 대체 불가능한 인재.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앨리스는 스스로 빛을 내는 그린 더스트가 신기한 듯, 자꾸만 거리를 좁히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너무 가까이 오지마."

"흥. 누가 훔쳐갈까봐?"

"아니. 그린 더스트는 방사성 물질이야. 가까이 접근해서 좋을 게 없어."

"뭐, 뭐라고?"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기겁하며 물러나는 앨리스.

이 정도는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어떻게 헌터로 활동하고 있는가 싶다.

반면 예리엘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웃고 있다.

사실 그린 더스트에 대한 세부사항 정도는 특별히 기밀도 아닌 것이다.

그냥 앨리스의 공부가 모자랐을 뿐이다.

"도대체 왜 거실에서 방사성 물질을 만들고 있는 건데?"

"너희 언니 있잖아."

"아..."

그린 더스트에서 자연 방출되는 방사능은 아주 약하다.

따라서 예리엘의 능력이 있으면 크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다.

그녀의 능력은 원래부터 내 것과 상성이 나빴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극단적인 상성까진 아니지만... 먼저 손을 쓰는 사람이 매우 유리해진다.

그래서 나는 매번 그녀를 피해다녔다.

'은퇴식 같은 거 한다고 구경가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새삼 후회를 하며 그린 더스트의 비축을 진행했다.

이런 식으로 미리미리 생성해서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내 능력의 장점이다.

컨테이너를 반 정도 채웠을 즈음, 어젯밤에 생각해둔 것이 떠올랐다.

"그럼 359일 뒤의 대책을 논의해볼까?"

"아..."

멍하니 벌려진 앨리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

원래는 360일이었지만 그새 하루가 줄었다.

인류의 멸망으로 향하는 카운트다운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예리엘이 내 말에 자세를 냉큼 고쳤다.

"네, 말씀하세요."

"먼저... 너희 쪽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대책이 없는거지?"

"예. 부끄럽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현재 해당 정보는 저를 포함한 극소수의 관계자들만 알고 있어요."

그야 그렇겠지.

만약 게이트의 생성이 영영 멈춰버릴 수도 있다는 정보가 퍼지면 패닉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정부로선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제해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시간 문제라고 봐야겠죠."

"합당하군. 나한테 해결책이 있는데 들어볼래?"

"혹시 헌터들을 다 죽이자는 건가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내가 화들짝 놀라자 옆에 있던 앨리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쓰게 웃는 예리엘을 황급히 설득했다.

"그래, 잘 아네. 사실 말이 좀 통하는 상대였나?"

"안 돼요. 어제 살인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했잖아요?"

그렇지.

어제 그녀와 정했던 결혼 규칙.

그 중 첫째가 바로 살인 금지였다.

그녀는 헌터 전문 살인귀 그린 더스트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조금 안심하면서도 곧바로 다음 방법을 꺼내들었다.

"그럼 그린 더스트를 대량으로 제작해서 대기중에 살포하는 건 어때? 내가 정말 죽을 각오로 만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렇게 하면 헌터들이 능력을 쓰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그렇지. 사소한 환경 문제가 있긴 한데,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어."

"아니, 그거 방사성 물질이라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주제에 눈치 빠르게 지적하는 앨리스.

하지만 나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정말 괜찮다.

"그래서 더 좋지. 방사성 물질은 반감기가 있으니까."

"뭐어?"

"초창기에는 그린 더스트 때문에 이런저런 악영향이 있겠지만, 한 50년 정도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거야. 그 때쯤이면 헌터들은 이미 멸종 직전이겠지."

"그게 사소한 환경 문제인가요?"

"헌터들이 멋대로 날뛰도록 놔두는 것보다 백 배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

아쉽게도 예리엘과 앨리스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선구자는 언제나 무지한 대중들에게 고통받는 법!

상황이 좀 더 심각해지면 결국 내가 옳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내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마지막 컨테이너를 채우고 봉인한 직후.

돌연 가슴 깊은 곳에서 비릿한 철분의 맛이 올라왔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쿨럭!"

"엇?"

"제, 제현 씨?"

후두둑...

깨끗하게 청소된 거실 바닥에 검게 죽은 피가 흩뿌려졌다.

내 갑작스런 토혈에 무척 당황한 여자들.

아직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신경쓰지마."

"아니, 신경을 쓰지 말라니. 지금 바로 치료사를 부를..."

"사실 이거 따지고 보면 너희들 때문이거든?"

내가 갑자기 탓하자 몸을 부르르 떠는 앨리스.

반면 예리엘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물었다.

"왜 이러시는 건가요?"

"내부 피폭."

"네에? 아..."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예리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 더스트는 짧은 반감기를 지닌 방사성 물질.

비록 방출량 자체는 극미량이라지만, 그것을 생성해내는 내 몸은 계속해서 피폭을 당할 수밖에 없다.

평상시에는 방사성을 억제할 수 있지만 생성 도중에는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것이다.

원래는 치유 능력자에게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하는데...

이틀 전, 은퇴식 사건에 휘말린 탓에 시기를 놓쳐버렸다.

벌써 이런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아쉽게 됐다.

"사람 한 명 부를게. 내 전담 치료사니까 들여보내줘."

"알겠습니다."

바닥의 핏물을 청소하고 있자 스마트폰으로 호출한 부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앨리스가 직접 주차장에서 데려온 그녀는 예리엘을 발견하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보였다.

귀여우면서도 살짝 허술하게 생긴 그녀는 지난번에 내가 자택을 처분하기 위해서 통화했던 바로 그 부하였다.

"마스터..."

"빨리 부탁한다."

"네!"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치유 능력을 사용했다.

소파 위에 드러누운 내 몸이 빠르게 호전되는 것이 느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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