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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3화 (3/131)

〈 3화 〉 서장(3)

* * *

예리엘 프로스트는 평소보다 훨씬 편안한 차림새였다.

심지어 그녀치곤 머리도 조금 부스스한 느낌이다.

내가 그것을 신경쓰자 그녀가 쑥쓰럽다는 듯 웃으며 설명했다.

"조금 어수선하죠? 죄송해요. 헌터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5시간 이상 잤던 것은 처음이라서요."

"그러시군요."

조금 기다리자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가 배달됐다.

아무래도 식당에서 올려준 것 같은데...

나는 식사에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수저를 드는 대신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내 정체가 발각되었단 말인가.

"어떻게 알아내신 거죠?"

"뭘?"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앨리스의 반문을 못 들은 체 하며, 순순히 대답하는 예리엘.

"운이 좋았죠. 제현 씨께서 실수하셨던 건 아녜요."

"..."

"언니,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너도 만나본 적 있을걸? 그린 더스트."

우당탕!

예리엘이 물잔을 들며 짧게 말하자 뒤로 펄쩍 물러나는 앨리스 윈터.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든 채 나를 노려봤다.

원래부터 표정이 썩 좋진 않았지만 거기에 강렬한 살의가 추가됐다.

나는 쓸데없는 저항을 포기한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예리엘 프로스트 한 명도 벅찬데, 앨리스까지 추가된 시점에서 필패였다.

물론 두 여자를 떨쳐내고 도망칠 자신이 없다는 것뿐이다.

결국 내가 지겠지만, 여차할 때엔 저 둘을 함께 데려가는 것은 물론이고 서울 전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릴 수는 있다.

"앉아."

예리엘이 짧게 타이르자 하는 수없이 테이블로 돌아오는 앨리스.

그러나 회중시계는 여전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

예리엘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어제의 일을 상기시켰다.

"제 제안은 생각해보셨나요?"

그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덕분에 어제의 은퇴식 행사를 떠올리게 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박수를 치다가 난데없이 청혼을 받은 것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그녀의 은퇴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배신감마저 느꼈다.

결국 끙끙 앓던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책망의 말이었다.

"이런 짓 하지말고 그냥 은퇴했어야지."

"..."

앨리스는 내 말투가 바뀌자 다시 한 번 경계심을 내비쳤다.

나는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으며 예리엘에게 말했다.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는 기회였잖아. 너는 할만큼 했어. 그냥 떠나도 뭐라고 할 사람 없잖아."

내가 활동 도중 예리엘과 마주친 적이 있다곤 하지만...

그래봤자 두 세번 정도 잠깐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그녀의 원한을 사거나, 그녀에게 원한을 품게 만들만한 사건도 없었다.

예리엘로선 괜히 그린 더스트라는 벌집을 쑤셔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앨리스도 내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예리엘은 여전히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변명했다.

"그치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도망치셨을 거잖아요."

"..."

너무 정확한 지적이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했다.

그러자 나를 놀리듯 덧붙이는 예리엘.

"저는 지금의 얼굴이 마음에 드는걸요?"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

"설마요."

예리엘은 워낙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라서 나를 놀리는 것인지 아닌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자꾸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킨 나는 그녀의 요구사항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내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으니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댁 주변에 그렇게 남자가 없을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진심으로 말하자 앨리스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그냥 이대로 싸우고 싶어졌다.

예리엘은 얼굴색 한 번 안 바꾸고 태연히 말했다.

"다른 사람은 싫어서요."

"사람 놀리는 것도 정도껏 좀 해."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꽉 붙잡는 예리엘.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굳어있자 마침내 본론이 나왔다.

"360일."

"뭐?"

"최대 360일 정도 남았어요.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몰라요."

이번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답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앨리스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얼굴만 보이던 중.

돌연 내 머릿속에 설마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360일이라면..."

"게이트와 던전의 생성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그 정도 남았어요."

"!"

말도 안 된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실제였다니.

더군다나 1년도 채 안 남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예리엘의 얼굴은 굉장히 진지했다.

만약 저 정도의 안건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으리라.

나는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근거는?"

"자료를 보여드릴게요."

스윽.

예리엘은 미리 준비된 파일을 내밀었다.

요즘 시대에 종이로 된 자료라니.

나는 살짝 기겁하며 잽싸게 내용을 살펴봤다.

년도별 게이트와 던전의 생성 횟수를 그래프로 나타낸 자료였다.

"보시다시피 20년 전, 게이트와 던전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년도별 출몰 횟수는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여기 10년 전에 정점을 찍었죠."

"그래서?"

나는 그래프의 후반부에 주목했다.

앨리스도 이 자료는 처음 보는 것인 듯,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는 중이다.

"정점을 찍은 뒤에는 완만하게 하락하다가... 재작년부터 이렇게 급하게 꺾입니다."

"확실히 급격하군."

"재작년에 대한민국 내에서 생성된 던전은 약 5천개. 하지만 작년에는 고작 2천개로 줄었습니다."

"말도 안 돼.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사실 게이트의 발생 빈도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래서 나를 비롯한 시민들이 예리엘의 은퇴를 손쉽게 납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는 그래도 4천개 정도는 생겼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동안 아침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던 나는 갑자기 목이 탈 것 같아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이 정도 페이스라면 예리엘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던전과 게이트는 갑자기 나타났으니,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앨리스는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그게 무슨 문제야? 더 이상 게이트와 던전이 발생하지 않게 되면 좋은 거 아냐?"

"전혀."

이런 지능으로 잘도 헌터를 하고 있구나.

내가 그런 눈으로 앨리스를 쳐다보자 녀석이 지지 않고 눈총을 쏘아댔다.

예리엘은 참을성있게 내 대신 설명해줬다.

"그건 뭘 모르는 소리야. 현대의 사업은 거의 다 던전과 게이트를 통해서 이뤄지고 있어."

"음?"

"몬스터를 잡아서 마석을 비롯한 부산물을 얻는다. 그 부산물을 재가공해서 상품으로 만들고, 겸사겸사 헌터들의 능력도 사업에 이용한다... 그게 현대 사회의 기초야."

게이트가 출현한지 약 20년.

이제 현대 사회는 게이트와 몬스터 없인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됐다.

그래서 헌터들이 그토록 강력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게이트가 더 이상 열리지 않고 몬스터들도 멸종한다면?

현대 사회의 기반 자체가 와르르 무너진다.

그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그쪽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외부의 적이 있었지."

몬스터.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수!

심지어 토벌만 하면 값진 부산물까지 얻어낼 수 있다.

지금까지는 헌터들 때문에 피해가 발생해도 시민들이 대충 넘어갔다.

헌터들은 몬스터들에게서 인류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니까.

그들이 없으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몬스터가 나오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황이 그렇게 변해도 사람들이 여전히 헌터들을 사랑해줄까?

나는 아니라고 봤다.

"몬스터가 사라지면 헌터들의 수입원도 대부분 끊겨. 몇몇 놈들은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만,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겠지."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과연 몰락한 헌터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수입이 줄어들어도, 소비습관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냐. 그걸 감당하지 못해서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어."

앨리스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침묵했다.

나는 상황을 최대한 간단히 정리해봤다.

"게이트와 던전이 사라지면 헌터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최악의 경우에는 현대 문명이 붕괴될 거야."

내 말을 반박해달라는 듯 예리엘을 쳐다보는 앨리스.

그러나 정작 예리엘은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그래서 갑자기 언니가 은퇴를 결정했던 거야?"

"응."

이제야 알겠다.

예리엘은 그 어느때보다도 힘든 싸움에 전념하기 위해서 현역의 자격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 다음, 그녀는 가장 먼저 나를 끌어들였다.

맞은편에서 한층 진지해진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린 더스트의 활동은 일종의 숙청이었죠? 주로 범죄를 저지른 헌터들을 처형했잖아요."

"..."

"다가올 사태는 저 혼자선 역부족이에요. 부디 힘을 빌려주세요. 제 모든 것을 드릴테니까, 대신 그린 더스트와 오라클을 주세요."

"오라클?"

앨리스는 생소한 단어에 어리둥절했으나...

나는 순간 가슴이 떨어질 뻔했다.

이 여자, 오라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건가.

굳이 종이로 된 자료를 준비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완전히 굳어버린 내 앞에서 예리엘이 다시 한 번 청혼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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