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티나(129)
* * *
"기척을 숨기는 걸 익혀보고 싶은데.."
"기척?"
"아니지. 기척을 숨기는 것에 한정한다기보다는.. 잠행 전반에 대한 걸 익히고 싶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려나."
"흐음~"
흘끗 소피아는 기레스를 부드럽게 훑어 보면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기술을 배우고 싶어졌는지 물어봐도 돼?"
소피아의 질문에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소피아가 기레스를 시험한다고 내준 건 아니었지만, 기레스도 나름 며칠을 고민해서 낸 대답에 대한 평가를 소피아에게 듣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일단 처음에는 소피아 네가 숱하게 경고해준 것도 있고.. 뭘 배우는 게 나한테 제일 효율적인지를 고민해 봤어."
"경고..?"
"왜? 투정이라고 바꿔 말해주랴? 저런 기술은 가르쳐 주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툴툴 댔잖아?"
기레스는 방에 패인 벽을 가리키면서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예쁘면 뭐든 용서된다고, 외모가 외모인 만큼 어떻게 보면 귀여운 투정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이런 기술 따위 별 것 아니라고 그 지근거리에서 벽을 파버리는 공격을 자신에게 쏴댄 것은 다시금 생각해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일이었다.
'상당히 아찔했던만큼 피했을 때의 성취감도 쩔긴 했지만..'
"음.. 그랬던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소피아를 뒤로하고 기레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어쨋든 내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긴 했는데, 무슨 기술이 있는지 보고 고르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술이 효율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은 지 따위 내가 알 리가 없으니 반대로 네가 가르쳐 준 기술이 어땠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했지."
'역시.. 기레스야.'
기레스가 말하는 것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사실이라 믿다 못해 신봉한 나머지 맞다고 우겨댈 소피아지만, 그런 콩깍지를 떼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소피아는 기레스가 상당히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암기나 계산 능력 같은건 떨어지지만 클로에나 티나는 물론이고 자신을 함락시킬 때의 흉계를 생각하면 간특하기 짝이 없는 기레스다.
좋게 말하면 현명하고, 나쁘게 말하면 약다고 해야되나 영악한 쪽으로 기레스의 머리는 추상적인 측면으로는 그 영특하다는 이세계인들 이상으로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하아♥'
기레스의 흉계에 몸도 마음도 정신없이 희롱당했던 나날을 떠올린 소피아는 새하얀 얼굴에 발그레 홍조를 띄며 달콤한 추억을 음미했다.
'어? 뭐지?'
"저기.. 듣고 있어?"
기레스를 인정하고, 그 대단하신 기레스의 업적을 곱씹어보다가 저 혼자 흥분해버린 소피아의 변태적 사고의 흐름을 알 리 없는 기레스는 뜬금없이 발정난 듯한 그녀의 행색에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응? 아.. 물론이지. 그.... 내가 가르쳐 줬던 기술에서 생각해 본다고까지 이야기 했잖아?"
음탕한 망상에 헤실거리던 소피아는 기레스의 질문에 순간 황망해하면서 이래저래 손을 놀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기본적으로는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 쪽으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정답이야.'
나중에 기레스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대답을 가지고 왔다면, 반대는 하지 않더라도 한번쯤 조언 정도는 해 줄 생각이었지만 소피아는 기레스가 올바른 답을 냈다는 것에 마치 자신이 난해한 답을 맞춘 것마냥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아무리 단련했다고 해도, 기레스의 신체능력은 여전히 이세계인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상대가 클로에나 하일즈라고 하면 그 차이는 더더욱 극명해진다.
피지컬은 그 자체로만으로도 재능에 직결하는 영역, 설사 같은 기술을 배우게 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클로에나 하일즈에 비해 신체능력만큼 효율의 차이가 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크게 힘을 요구하지 않는, 소위 재주에 해당하는 기술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힘이 없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기술이라면 클로에나, 하일즈, 기레스 간에 신체적 우열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척을 지우는 건, 기레스도 문제 없이 익힐 수 있겠지만..'
어딘지 기레스 치고는 가볍다는 생각에 소피아는 슬그머니 기레스에게 운을 띄우며 질문했다.
"그럼.. 효율적인 기술을 찾다가 기척을 지우는 기술이라면 괜찮겠다 싶어서 배우고 싶어진 거야?"
"뭐? 그럴리가.. 효율적인 기술을 찾는 건 전제조건이지. 목적이 아니잖아. 내가 그런 단순한 이유로 끼워 맞춰서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할 것 같아?"
기레스의 철두철미함을 곁에서 가장 오래 지켜봐 온 소피아는 한순간 신을 부정하는 죄를 저지른 광신도마냥 몸을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기레스는 눈앞의 정답만 맞추고 싶다는 어설픈 이유로 가볍게 선택해 버리는 인간들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간이라는 건 다름아닌 소피아 본인이 몸과 마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그런 기술을 생각하게 된 계기라도 있어?"
"소피아 넌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기레스한테? 음..."
순간 머릿 속에 떠올라 버린 '나' 라는 대답을 소피아는 입을 오믈거리면서 참은 뒤에 기레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여자...?"
울긋불긋 색기를 풍기는 얼굴로 애둘러 표현했지만, 기레스는 그런 소피아의 표정을 자신의 난봉꾼 기질에 질투라도 했나 멋대로 착각하며 시큰둥하게 대답을 이어 나갔다.
"정보야 정보."
"정보?"
"어차피 나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강해지든 공부를 잘하든, 세간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수단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거야. 그런 내가 유일하게 남들보다 앞설 수 있는 게 있다면 이 손재주 밖에 없겠지."
직접적으로 음부를 만진 것도 아니고 허공에 만지는 시늉을 한 것 뿐인데도 기레스의 음탕한 손놀림에 소피아의 입 안은 삽시간에 군침으로 가득 차 버렸다.
"하지만 이런 능력도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라고 나같은 놈이 살리는 건 만만치 않아. 내가 하일즈만큼 생겼다면 별 상관 없겠지만, 아쉽게도 난 이모양이니까.."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쁘다고 이미 콩깍지가 씌일대로 씌인 소피아는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듯, 즉각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기레스는 가볍게 소피아의 의견표시를 묵살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나한테 가장 필요한 건 뭐니뭐니해도 정보라는거지."
유페르 가문에서 지낸 십수년 간, 여자 후리는 재주 외에는 외모부터 능력까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기레스가 소피아와 클로에는 물론이고 티나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의 정보를 자연스럽게 모을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양모인 소피아와, 그 딸인 티나. 거기에 어려서부터 남동생인 하일즈의 소꿉친구로 약혼녀인 클로에까지 기레스는 유페르 가문의 양자로서 어떻게든 모든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정보만 있다고 그 모든 흉계를 성공시킬 수 있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정보가 없었다면 애초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사실 이번 리움사관학교를 준비하면서 따로 고민한 게 하나 있었어."
"고민?"
"과연 내가 소피아 너나 클로에가 없어도 내 능력만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읏.."
소피아로선 선택지 자체에 없다 싶을 정도로 상상하기 싫은 이야기지만, 기레스의 고민 자체는 소피아도 사무칠 정도로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다.
이번 출장처럼 따로 떨어져야 될 일도 일이지만, 그게 아니어도 항상 기레스와 붙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소피아는 잘 알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기레스의 몸에 새겨넣어준 기술 자체가 기레스가 어딘가에서 사고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르쳐 준 것인 만큼, 소피아는 기레스의 심정을 기레스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항상 함께하고 있어서 한동안 잊고 살긴 했는데, 얼마 전에 밤에 티나를 만나고 나서 문득 다시금 생각이 나더라고."
"티나? 거기서 왜 갑자기 티나가?"
"아니, 티나 그 년.. 엊그젠가? 장난 좀 쳐보겠다고 기척을 숨긴 채 몰래 나한테 다가왔던거야. 그때 한번 놀란 다음에 문득 생각나더라고. 옛날에 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기척을 숨기고 정보를 죄다 캤던 그 잠행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하고.."
'우으...'
티나와의 꽁냥대는 장난질에 영감을 얻었다는 말에 소피아의 마음은 살짝 달싹거렸다.
단순하게 조교하고 성관계를 했다는 것과는 뭔가 다른 순수한 애정행각이라도 했다는 느낌에 속이 근질거리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서 나도 클로에한테 한번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 봤는데, 클로에는 클로에답게 기가 막히게 내가 다가오는 걸 다 알아채더라고. 그때 딱 삘이 왔지. 소피아 '네가 없어도'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이건 필요하겠다고.. 지금이야 집에 살고 있으니까 하일즈나 젤가 상대로 이 어수룩한 것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지만, 유페르의 '집을 나서게 되면' 언제까지고 이용해 먹기는 힘드니까."
'으으..'
"거기까지 오니까, 기척을 지운다는 건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도 딱 들어맞는 것 같아서 오늘 이렇게 불렀다는거지. 어때?"
여러가지 자각없이 마음을 후벼파는 기레스의 말투에 소피아는 누가봐도 토라진 어투로 대답했다.
"몰라.."
"아니, 모르면 안되잖아. 음..? !! 아... 네가 없다는 건 비유지. 딱히 떼어내거나 하고 싶다는 건 아니니까. 거기다 리움사관학교에 가게 되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게 되는 부분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진지한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배우고 싶다는 이거, 어떤 것 같아?"
"좋다고.. 생각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