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티나(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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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온 기레스는 잠시 방금 전 하일즈에게 맞았던 일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지. 아니.. 생각보다가 아니라 그냥 아프지 않았나?'
갑작스럽게 얼굴을 얻어 맞아 덜컥 당황하긴 했지만, 침착해진 지금 다시금 곰곰히 되새겨 보면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아프지 않았던 것 같다고 기레스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소피아와 대련할 때도 어느 순간부터 그다지 아프지 않게 되긴 했었단 말야. 그때는 그냥 소피아가 적당히 봐준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 그건 아니었나.'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도 크다고, 수련의 성과에 대해 지금까지 다소 냉소적으로 생각해 오기는 했지만, 그간 있었던 여러 일들과 방금 하일즈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기레스도 느끼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하일즈는 날 봐주거나 할 인간은 아니니까 말이지.'
상대가 소피아나 클로에라면 자신에게 맞춰 봐주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하일즈는 이야기가 다르다.
소피아가 무서워서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았으면 모를까, 방금처럼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댔다고 한다면, 하일즈는 기레스의 사정을 봐주거나 할 인간이 아닌 것이다.
마음껏 때려도 외상이 남지 않는 젤가의 기술도 있겠다, 분명 작정하고 때린 것이었을텐데도 크게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레스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저 하일즈를 상대로 이정도라 이거지?'
소피아를 손에 넣은 뒤부터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지만, 본래 이세계인들이란 기레스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벽이었다.
그 괴물들이 즐비한 인간들 사이에서도 내로라하는 재능을 가진 하일즈는 따라가기는커녕 쳐다보는 것조차도 헛되다고 느낄 정도여서 아예 노력 자체를 포기해 버릴 정도였는데, 방금 하일즈와 있었던 갈등으로 기레스의 열등감은 상당히 해소되어 버렸다.
'얼마 전에 마석을 사용해도 하일즈를 이길 수 없을거라고 소피아가 말했으니까, 아마 작정하고 싸우면 이길 수는 없겠지만 저정도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어떻게든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기레스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와닿는다.
이전까지는 하일즈가 눈이 돌아가, 작정하고 죽이려 들면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언제 죽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안심이 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하일즈보다 더 강할 클로에조차도 나를 쉽게 제압하지 못해서 그 난리를 벌였을 정도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거였겠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성장한 걸 느끼니까... 역시 좋은데..'
이따금씩 간간히 티나가 귀엽게 폭주하는 것을 대처할 때도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저렇게 죽일 듯이 정색하고 달려든 공격조차도 능수능란하게 받아 넘길 수 있다는 것은 역시나 각별한 것이었다.
아무리 하일즈가 클로에의 일로 꼭지가 돌았다고 해도 기레스는 설마하니 거기서 냅다 면상에 주먹을 박을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원래가 그런 기술이긴 하지만, 그런 불시의 기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레스는 별다른 충격하나 없이 하일즈의 공격을 받아 흘려넘긴 것이다.
소피아가 기레스의 몸에 심어준 기술은 기레스가 반평생을 살았던 지구가 아니라, 이세계 사람들 기준으로 생각해도 기가 막힌 달인의 경지임에 틀림 없는 것이었다.
'클로에가 질투해서 폭주하고, 소피아가 구구절절 젤가의 기술 따위 별 것 아니라고 할 만 했어.'
실제로 하일즈가 사용한 젤가의 기술 따위, 이제와선 기레스에게 별다른 데미지조차 주고 있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젤가의 기술 따위는 지금와서 생각하면 겉만 번지르르한 기술에 불과한 것이었다.
"흐음.."
거기까지 생각한 기레스는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역시... 단순하게 강해지는 것보다는..'
"좋아."
그날 저녁, 식사시간 기레스는 조심스럽게 소피아를 불렀다.
"아.. 저기.. 엄마."
"응?"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밤에 제 방에 와주실 수 있어요?"
'으윽...'
기레스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지만, 하일즈는 낮에 기레스에게 했던 행동 때문에 제 발이 저린 나머지 속이 뜨끔 거렸다.
슬쩍 기레스에게 시선을 돌려보면, 평소처럼 백치마냥 어벙하면서도 순진해 보이는 표정이다.
'정말 그냥 상담만 하려고 하는건가? 하긴.. 고자질을 할 거였다면 클로에한테 배우게 해달라느니 뭐니 부탁도 안했겠지. 시발 헷갈리게 왜 오늘 상담을..'
"물론이지."
평소와 다름 없는 자애로운 대답에 심기가 불편한 것은 하일즈 뿐만이 아니었다.
'후우.. 상담인가..'
젤가는 젤가대로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공략의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뒤, 던전 안에서 소피아의 야릇하게 비쳤던 새하얀 살결에 발정으로 안달이 난 젤가였지만, 돌아오고 나서도 젤가가 소피아를 안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미궁을 돌면서 그렇게 참았으니, 당연히 집에서는 소피아를 맛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의 리움사관학교 시험을 핑계로 소피아가 성관계를 거절해 온 것이다.
젤가는 젤가 나름대로 따지고 들었지만, 아이들도 클만큼 컸겠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혹시나 아이들에게 섹스하는 것을 들키게 될 경우 안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을거고, 시험까지 고작해야 두어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소피아는 젤가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애초에 소피아가 그렇게 한다고 한다면 티끌하나만큼도 반박할 수 없는 입장인 젤가지만,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가정적인 이유로 설득해 오면 더더욱 젤가로서는 뭐라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가 없다.
평생 섹스를 안해준다는 것도 아니고 한달 하고도 조금만 참으면 섹스가 해금된다는 사실도 아슬아슬하게 젤가의 한계에 다다른 성욕을 봉인해 주었다.
'그냥 조용히 하면 되지 않나.. 소피아나 내가 집중하면 누가 오는지 모를 일도 거의 없을텐데..'
조용하면 조용한대로 맛이 안사는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이미 옛날 옛적에 던전에서 참을성의 한계를 느낀 젤가가 그렇게 불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소피아의 말마따나 인생의 갈림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런 중요한 시기에 애들한테 걸리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확실히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뭐 그래도.. 소피아에게 쥐어 짜일때는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긴 하니까.. 절대로 안 걸린다는 보장은 없긴 하고.. 확실히 그런 모습을 애들이 보게 되면....'
어차피 가장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지 알음알음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과 소피아에게 송두리째 주도권을 잡힌 성행위를 보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으으... 끄응....'
던전 안을 누빌 때, 탄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야릇하게 흔들렸던 소피아의 탐스러운 육체를 떠올리면서 젤가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기레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저새끼한테 선물을 줬던 그 날이 문제였던 것 같단 말야. 단순하게 선물로 준 마핵에 대한 설명만 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이야기 했을리도 없고..'
젤가는 분명 그때, 기레스가 소피아에게 리움사관학교든 인생문제든 소피아에게 상담을 요구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들의 장래에 대한 고민을 성실히 상담해 준 나머지 소피아의 모성에 불이 붙어 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련의 거절의 앞 뒤가 딱 들어맞는 것이다.
가뜩이나 보물 중의 보물인 마핵을 기레스 같은 머저리한테 준 것도 마음에 안드는데, 소피아와의 뇌를 흐물흐물 녹여 버리는 달콤한 성행위마저 기레스가 날려먹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젤가의 입장에서는 기레스의 상담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시발,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드는 게 없는 새끼라니까...'
그렇게 젤가가 속으로 기레스를 욕하면서 발정으로 벌벌 떨리는 신체를 추스르는 사이 티나는 티나대로 뱁새 눈을 뜨고 기레스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칫... 일주일에 최소 3일이라고 했는데... 날 부를 생각은 않고.....'
일견 온화하고 자애롭게만 보이는 소피아의 얼굴에 불긋한 색향이 감도는 것을 이제 여자가 다 된 티나가 놓칠 리 없었다.
'상담... 참 편리한 설정이네..'
기레스를 상담해 주는 척, 방에 들어가 마음껏 요분질하는 소피아를 상상한 티나는 흥분과 더불어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해 분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더욱 독살스럽게 기레스를 쏘아 보았다.
'거 참..'
따까운 삼인삼색의 불만을 고스란히 알아차렸으면서도, 감히 불만 같은 건 짐작도 못했다는 듯, 기레스는 순박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받아 넘기면서 꾸역꾸역 식사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똑똑]
저녁식사가 끝나고, 해가 완연히 진 늦은 밤, 소피아는 기레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아.. 기레스. 난데."
"아.. 들어오세요."
소피아는 밝은 목소리로 하일즈나 티나가 들으라는 듯 대답하며 기레스의 방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는 순백으로 정숙한 듯 하면서도, 모양좋게 솟아 숨길 수 없는 가슴골은 물론이거니와 살짝 속살이 비쳐 남자의 음심을 은근히 달구는 속옷을 입고 온 것은 덤이다.
"음?"
기레스를 본 소피아는 색기를 풍기는 것을 접고 표정을 풀며 말했다.
"상당히 빨리 불러서, 그냥 하고 싶어서 부른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까 뭘 배우고 싶은지 정한 모양이네?"
"그래. 빨리라고 하기엔 꽤 고민하긴 했지만."
기레스가 뭘 배우고 싶어하는지 기대가 된 소피아는 티나를 연상시킬법한 여우같은 요망한 눈웃음을 지으며 기레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배우고 싶은 기술은 뭐야?"
"그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