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티나(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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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이야기는 끝났으려나?'
전날 미리 클로에와 입을 맞춰둔 기레스는 방문 앞을 어슬렁 거리면서 하일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일즈 놈. 어떤 선택을 했든 지금쯤 꽤나 열받아 하고 있겠지.'
자신을 가르쳐 준다는 명분이 아니면 따로 집에 놀러가지 않겠다는 클로에의 억지에 하일즈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까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하일즈가 자신에게 얼마나 화가 났을지 정도는 훤히 예상이 가는 기레스다.
'이럴 때는 클로에의 성격도 꽤나 편리하단 말이지.'
자타가 공인하는 고지식한 성격의 클로에가 자신의 성격을 이용해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앞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에 적당히 살만 붙혀 주면 다소 억지 같아 보여도 하일즈로서는 납득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지 않도록, 정 기레스를 가르친다는 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오지 않겠다고 퇴로를 남겨 하일즈에게 선택을 종용하게 만든 것도 기레스의 생각이다.
겉으로는 남자친구인 하일즈에게 클로에 나름의 배려로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게 또 교묘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하일즈는 어느 쪽도 딱히 원하는 선택지가 아님에도,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유도 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뭐.. 클로에가 걱정한 것처럼 하일즈가 거절한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하일즈라면 설사 클로에가 나를 가르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허락할 가능성이 높겠지.'
사랑하는 사람과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혈기왕성한 시기에, 여성의 농익은 매력이 한껏 물오른 클로에가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남성으로서 마다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클로에가 집에 오겠다고 가르쳐 준다는 상대가 남성으로서의 매력이라면 없다시피한 기레스와 관계된 일이라면 더더욱이 심리적 허들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하일즈가 클로에만 보면 발정이 날대로 나, 이미지 관리도 못하고 짐승처럼 들이댄다는 건 이미 옛적에 알고 있던 기레스는 십중팔구는 하일즈가 허락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면 아닌대로 밖에서 만나면 그만이기도 하고....'
클로에와 야한 짓은 커녕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하일즈와 달리, 기레스는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다.
집에서 하일즈를 기만해가면서 클로에를 후릴 수 없는 것은 기레스로서도 꽤나 아쉬운 일이지만, 안된다면 안되는 대로 밖에서 즐기면 그뿐인 것이다.
[덜컥]
"응?"
'왔나?'
어딘지 짜증스러운 듯, 투박하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기레스는 비열한 미소를 머금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 저.. 하일즈."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다 올라오는 하일즈를 만나 당황했다는 듯, 기레스는 얼띤 반응을 보이며 허둥거렸다.
'하.... 시발..'
이미 클로에와 이야기는 끝났지만, 기레스의 저 눈치보는 꼬라지를 보자마자 하일즈는 열이 뻗쳐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보다 더 눈치를 본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있다는 것. 즉 기레스는 자신이 화낼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클로에한테 가르침을 청했다는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나..'
들어오면서 주변을 살핀 하일즈는 그대로 기레스의 면상을 갈겨 버렸다. 상처 하나 없이 고통만을 안기는 예의 젤가의 고문 기술이다.
"끄에엑."
외마디 비명과 함께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 나가 떨어진 기레스는 고통스럽다는 듯 바닥을 뒹구르며 생각했다.
'응? 뭐지.. 생각보다 안 아픈데..'
반면 하일즈는 하일즈대로 갸우뚱 거리면서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 뭔가 손에 감각이 얕은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끄으으.."
하지만 의문도 잠시, 바닥에서 머리를 감싸고 고통에 신음하며 뒹구르는 기레스의 연기를 보고, 이내 하일즈는 머릿 속의 의문을 지워 버렸다.
"후우... 시발 새끼. 주제도 모르고 클로에한테 부탁을 해? 일어나."
"으으..."
"안 일어나?"
하일즈의 위협에 기레스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봐도 더 맞기 싫어서 하일즈의 명령에 반응한 듯한 찌질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행색에 하일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클로에는 이런 병신이 뭐가 이쁘다고 가르쳐 달라 했다고 순순히 가르쳐 줄 생각을 하지? 성격상 괴롭히지는 않더라도 호의를 베풀 정도로 좋아할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새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라 하면 기레스가 자신의 가족이기 때문인 것 밖에는 떠오르지 않은 하일즈는 살짝 화를 누그러뜨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클로에는 설득하지 못했지만.. 이 녀석은 다르잖아?'
클로에는 거절한 기레스한테 민망하다는 이유로 자신과 공부하는 것을 거절 했지만, 기레스 본인이 나서서 클로에와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은 하일즈는 기레스를 툭툭 걷어 차면서 말했다.
"야. 너 클로에한테 공부 가르쳐 달라고 했다면서?"
어디까지나 지금 자신에게 맞은 것은 기레스의 자업자득이라고 설명이라도 하는 듯, 하일즈가 말했다.
"어.. 그렇지.."
가만히 쭈그러져서 나약한 모습만 보이던 평소와 달리, 기레스는 울상과 불만이 뒤섞인 듯한 묘한 표정으로 침울하게 대답했다.
"뭐야? 그 표정은. 잘하면 한대 치기라도 하겠다? 오랜만에 제대로 맞아 보니까 상황 파악이 안되냐? 더 쳐맞고 싶어? 확 그냥.."
"우읏.."
평소의 비굴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기레스의 반응에 하일즈가 손을 들어 위협하자 기레스는 맹수를 앞에 둔 초식동물마냥 곧장 움츠러 들었다.
"병신새끼가.. 대들지도 못하면서 깝치기는. 내일 가서 클로에한테 가르쳐 달라고 했던 거 없었던 일로 하자고 전하고 와라."
하일즈는 선심이라도 썼다는 듯, 들었던 팔을 접으며 기레스에게 말했다.
"......"
당연히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하일즈의 예상과는 달리 기레스는 묵묵부답으로 하일즈를 노려보았다.
"표정 봐라? 대답."
"....."
"대답 안해?"
"...... 시... 싫어.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두려운 와중에도 용기를 쥐어 짜기라도 한 듯이, 기레스는 나약하면서도 필사적인 어투로 하일즈에게 따지고 들었다.
상상도 못했던 때아닌 기레스의 반항에 하일즈는 순간 이성이 끊어졌다.
여자친구이자 약혼녀인 클로에에게 주제도 모르고 접근한 것만으로도 이미 하일즈의 안에선 능지처참감인데, 적당히 클로에와의 약속만 파기하면 넘어가 준다는데도 굳이 반항을 했다는 사실이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싫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일즈는 손바닥으로 기레스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대로 퉁겨나가듯 나가 떨어진 기레스에 대한 분노로 어쩐지 허공을 가르기라도 한 듯한 옅은 손의 감각은 하일즈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싫냐?"
"시발!!"
"뭐? 시발?"
"내, 내가 너한테 이렇게 이유도 없이 쳐맞기까지 했는데 그딴 걸 왜 들어줘야 되는데!"
참다 참다 못해 고이고 고였던 불만이 터져 버렸다는 듯, 기레스는 처절하게 악을 쓰는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다.
"내가 클로에를 뭐 어떻게 해보려고 꼬시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모르는 거나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 뿐인데.. 그게 이지랄까지 해야 될 일이냐!"
'옛날 생각 나는구만..'
반은 연기지만 반은 진심이라고, 괴롭힘을 당한 울분을 쥐어 짜내는 연기 따위야 십 수년간 참고 살아온 기레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었다.
"이, 이제와서 형 취급 같은 건 기대도 안했지만, 조롱에 협박도 모자라, 다시 폭력질까지 당하게 됐는데.. 내가 아무리 호, 호구 같은 새끼여도 들어주고 싶겠냐고!!"
"이새끼가 미쳤나.."
말보다 먼저 주먹이 기레스의 복부를 향했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비틀면서 기레스는 하일즈에게 곧장 토로했다.
"나, 나도 사람이야! 사람! 더는 모, 못참아."
"못 참아? 못 참으면 어쩔건데? 덤비기라도 하시게?"
기레스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대놓고 조롱해대는 하일즈에게 기레스는 이를 악 물고 대답했다.
"엄마한테 말하겠어."
'어..?'
"찌, 찌질해 보이기도 하고 엄마를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사소한 것들은 그냥 참아왔는데.. 더는 못참아."
'어어...!?'
그제야 하일즈는 상황 파악을 하고 살짝 질려 버렸다.
본래는 따지고 들기 애매한 수준에서 적당히 매운맛만 보여주려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기레스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눈앞에서 대든 나머지 홧김에 손을 너무 대어 버린 것이다.
클로에한테 찝적댄줄 알았다는 이유로 홧김에 손이 나갔다고 둘러대며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처음의 한대 정도뿐, 오늘의 손찌검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단순한 형제간의 불화나 다툼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방심했다..'
오늘처럼 폭력까지 행한 적은 없었지만, 최근들어 은근히 괴롭혀대도 참기만 했던 기레스의 모습에 하일즈는 너무 방심했다고 자책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괴롭히고 멸시해대도 고자질 하나 없이 꾸역꾸역 참으며 상상 이상으로 만만한 호구처럼 보였던 기레스기에, 되려 그 만만하기 짝이 없는 기레스의 반항을 이성적으로 참을 수 없었다는 게 어떤 의미로는 아이러니하다 할 수 있었다.
'어쩌지... 아무리 어머니라고 해도 내가 잡아 떼면, 이렇게 갑작스럽게 기레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전과도 있는 자신이겠다, 기레스의 말을 쉽게 믿고 이전처럼 소피아가 돌변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에 하일즈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버렸다.
애초에 소피아가 징계를 주든 주지 않든, 말이 나오기만 해도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눈에 선한 것이다.
'칫.. 어쩔 수 없지...'
"...... 때린 건 미안하게 생각해."
"뭐?"
"하지만 나는 제껴두고 여자친구인 클로에가 집에서 너랑 공부하겠다는 걸 들은 내 입장도 생각해 보라고! 원래 내가 널 싫어하는 건 둘째치고 내가 화가 안나게 생겼냐고!"
"그, 그게 내가 맞아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잖아."
'그게 미안한 태도냐..'
"가뜩이나 눈에 밟혀서 거슬리는데, 클로에의 일까지 겹치는 바람에 실수한거야."
이제와 새삼스레 기레스가 싫다는 건 숨길 생각도 않고, 뻔뻔스럽게 하일즈는 자기 변명에 사용해 먹었다.
"실수라고?"
"실수야. 나도 네가 어머니한테 고자질 할 수 있다는 거 모르는 게 아닌데, 이게 실수가 아니면 뭐겠어? 클로에의 일이다 보니, 이성을 잃고 막 나가 버린 거라고.. 실제로 그 때 이후로 오늘까지 내가 이정도로 때린 적은 없었잖아?"
"결국은 이렇게 때렸잖아."
맞은 부위를 어루만지면서 기레스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칫..'
"그러니까 미안!"
여기선 어떻게든 기레스의 입을 틀어 막아야 겠다고 생각한 하일즈는 기레스에게 꼬박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싫지만, 오늘은 정말 심했다고 생각해. 미안해."
"어.. 어어.."
이례적인 사과로 살짝 약해진 척하는 기레스의 태도에 하일즈는 속으로 안도하며 몰아 붙혔다.
"그래서 말인데... 염치 없지만 어머니 한테 말하는 것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부탁이야."
"음..."
하일즈의 겉만 번지르르한 사과에 기레스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뭐야? 나야 좋지만 고작해야 고개 하나 숙인걸로 넘어가는건가? 대가리에 든 게 없는 저능아라 그런지 쉬운 새끼구만.'
잠시의 고민을 끝내고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클로에랑 같이 공부하는 거에 토 달지 않으면, 넘어가 줄게."
"뭐?"
"사실은 나도 하일즈 네가 클로에를 신경 쓸 거 같아서, 방금 너한테 쳐맞기 전까지는 아무리 그래도 남자친구인데 같이 공부하자고 말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많이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유로 다짜고짜 주먹질이나 해대는 동생이랑 한 자리에서 공부하는 건 진짜로 무리니까.. 내가 클로에랑 공부할 때는 방해하지 말고 신경 꺼줬으면 좋겠다는거야."
'아니 뭔... 그럼 내가 이새끼를 안 건드리고 곱게 이야기 했으면 나도 클로에랑 같이 공부할 수 있었다는건가?'
물론 기레스는 그럴 생각 따위 모래한톨만큼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기레스의 검은 속내를 알 길이 없는 하일즈는 괜히 긁어 부스럼만 낸 것 같아 바짝 약이 올라 버렸다.
"방해라니.. 내가 무슨 방해를 해?"
"솔직히.. 지금도 하일즈 네가 앞에 있는 것만 봐도 난 언제 또 맞을까 싶어서 무서워 죽겠거든. 그냥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방해니까.. 공부할 때는 제발 보이지 말아줬음 좋겠다는거지. 클로에랑 공부할 때 남자친구랍시고 괜히 얼굴을 보이거나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면 엄마한테 말하는 건 그만 둘게."
'하.. 시발.. 어차피 클로에는 기레스랑 둘이서 공부할 생각이었던 걸 생각하면 딱히 손해보는 건 없지만.. 괜히 아쉬운데..'
아쉬운 것도 아쉬운 것이지만, 기레스랑 클로에가 둘이서'만' 공부한다는 걸 본인이 공인한다는 건, 설사 별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해도 뭔가 형언하기 힘든 찝찝함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하일즈에게는 남는 장사였는지라, 결국 하일즈는 못이긴 척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혹시 간섭해오면 경고는 줄거지만, 계속 반복하면 그냥 엄마한테 오늘 일을 고자질 해버릴거니까 그건 그렇게 알아주고.."
'이새끼 혹시 진짜로 클로에한테 흑심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 그리고.. 가급적이면 클로에가 없을 때도 피해줬음 좋겠고.."
'이 병신이 그럴 리는 없나..'
문득 스치고 지나간 하일즈의 의심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대꾸하는 기레스의 소심한 태도에 씻은 듯이 날아가 버렸다.
'설사 반해서 흑심이 있다고 해도 클로에를 건드리지도 못할테니.. 그쪽 걱정은 할 필요 없겠지. 단순하게 친해지고 싶다는 의도만으로도 마음에 안들기는 하지만..'
"알았어. 지금부터 사라져 주면 된다는 거잖아."
더 상대하기도 짜증나고 귀찮아진 하일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들먹 거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크큭.."
그런 광대나 다름 없는 하일즈를 보면서 기레스도 한차례 조소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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