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티나(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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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스가 클로에에게 찝쩍댔다는 사실에 하일즈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기본적으로 클로에의 성격은 주변에 무신경한 편이지만, 그런 무신경한 성격이기에 부탁을 받으면 별다른 거절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닌이상 나름대로 무심하게 응해준다는 것을 오랜 교제를 통해 하일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클로에가 기레스를 가르쳐 주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서는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기레스가 클로에에게 따로 가르침을 청한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최근 직접적으로 기레스에게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겠다. 자신이 기레스를 얼마나 고깝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리 덜떨어진 기레스라고 해도 모를 리 없었다.
'개 시발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클로에에게 찝쩍대면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고 있을텐데도, 굳이 기레스가 자신을 거슬러가면서 클로에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에 하일즈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레스에게 얕보인 듯한 기분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하일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에는 전에 없는 화사하게 밝은 표정으로 하일즈에게 말했다.
"하일즈 좋은 기회지?"
"기회? 뭐가?"
하일즈의 물음에 클로에는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기레스를 가르쳐 주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일즈의 집에 놀러갈 수 있을 거 아냐..."
흘끗 하일즈를 곁눈질하며 어딘지 수줍게 말하는 클로에의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마치 같이 동거했던 나날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 하면서 '발정이라도 난 듯한' 야릇하기 짝이 없는 클로에의 마성의 표정에 하일즈의 속은 절로 달아 올랐다.
'크으.. 저 정도로 날 의식해 주는 건 정말 좋지만..'
그 애틋함이 향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하일즈는 히죽거리다가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생각했다.
'클로에가 저렇게까지 우리 집에 오고 싶어하는 건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레스 그 새끼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건 맘에 안드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기레스에게 선의를 베풀겠다는 상황이 하일즈의 마음에 찰 리 없다.
거기에 말은 자신의 집에 올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클로에는 기레스를 가르치기 위해 오는 것으로, 당연히 둘이서 꽁냥 거릴 틈이 많을 리 없는 것이다.
"음... 하일즈.. 혹시 내가 집에 오는 게 싫은거야?"
"응? 아니. 그럴리가. 왜?"
"뭔가 표정이 어두운 것 같아서.."
'이런...'
클로에의 말에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하일즈는 애써 표정을 고치면서 둘러댔다.
"아.. 사실,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기레스 형은 좀 우둔하잖아? 이제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클로에 네가 괜히 고생만 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 걱정한거야."
'.....'
"이정도 가지고 뭘.. 나는 별로 상관 없어. 오히려 가르치면서 다시 배우는 부분도 있고.. 거기다 기레스는 하일즈의 가족이기도 하니까.."
한창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할 무렵,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안중에 없었을 때와는 달리 최근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나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하일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동거를 하면서 정이 들었다거나 편해지기도 했을거고, 클로에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가족처럼 보이는 기레스도 덩달아 괜찮게 보는 것이겠지만.... 맘에 안들어.'
틈만 났다 하면 자신의 사랑을 도와주겠다고 티나는 상담을 하려들지, 첫 날 단추를 잘못 끼워 버린 탓에 클로에는 클로에대로 고지식하게 하일즈를 은근히 멀리하지, 나름대로의 추억을 만든 건 좋지만 기대만큼 클로에와 많이 붙어먹지 못해 하일즈는 동거 내내 못내 아쉬워 했다.
유페르 가문의 집은 넷이 살기에 그렇게까지 작은 집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집은 집, 자연히 따로 하일즈와 만나고 있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에' 클로에와 기레스가 마주치는 경우는 종종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동거가 끝나갈 무렵에는 간간히 둘이 붙어있거나 가끔 뭔가 이야기도 나누기도 했었던가.. 시발.. 내가 모르는 사이 따로 물어 봤다는 걸 보니, 아마 그때쯤 가르쳐 주고 둘이서 이야기도 나눈 것 같기는 한데..'
혹시나 옹졸한 대응으로 클로에에게 미움을 받지는 않을까 싶어 당시에는 따지지 못하고 유야무야 지나가 버렸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클로에와 기레스가 상당히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하일즈의 속은 지글거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기대했던 것보다 클로에와 함께하지 못해 은근히 짜증났는데, 그 피같은 시간에 기레스와 이야기 하고 물음에 답해주는 호의를 베푼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공부를 가르쳐 주기까지 하겠다고 나서다니.. 상대가 상대인만큼 하일즈는 짜증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었다.
'하 시발.. 클로에가 괜찮다는데 이제와서 왜 그 병신을 가르치냐고 따질 수도 없고...'
티나가 쯧쯧 혀를 차대면서 자신을 나무라는 말투가 하일즈의 귓가에 멤돈다. 동거하는 내내 얼마나 하일즈를 달달 들볶았는지, 여기서 찌질하게 불평을 내뱉으면 클로에의 호감도만 떨어뜨릴 게 뻔하다고 조잘대며 구박하는 티나의 모습이 하일즈의 눈에 선하게 그려진 것이다.
'차라리 나를... 아.. 그렇지.'
"저기.. 클로에. 생각해 보니까 굳이 기레스 형을 가르칠 필요는 없지 않아?"
"응?"
"딱히 형이 아니어도, 우리 집에 놀러오고 싶은거라면 그냥 나랑 공부한다고 둘러대고 와도 되잖아. 곧 리움 사관학교의 시험도 있으니까 명분으로도 나쁠 거 없고.. 거기다 그 편이 클로에 너도 나랑 오래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좋을테니까.."
하일즈의 말에 클로에의 고운 미간은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어쩐지 난처해 보이기도 하고, 짜증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구겨진 표정으로 클로에는 하일즈에게 말했다.
"그건 곤란해.."
"곤란하다니?"
"기레스한테 부탁 받았을 때, 가르쳐 주겠다고 이미 답해줬단 말야.."
"그거야 거절하면 되지. 고작해야 그런 걸로 형이 짜증을 낼 리도 없을텐데 뭐 어때?"
"확실히 기레스야 이런 일로 짜증을 낼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민망하잖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굳이 그걸 거절해놓고 하일즈 너랑 공부하는 모습을 기레스한테 보여주란 말야? 기회가 되면 핑계삼아 한번씩 놀러가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하긴 싫어."
딱히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은 아니지만, 자신한테 떳떳하지 않은 일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힐 줄 모르는 클로에다운 말에 하일즈는 살짝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음.. 그, 그럼 형을 나랑 같이 가르쳐 주는 건 어때? 이거라면 형도 가르칠 수 있고 둘이 같이 공부할 수도 있고 좋잖아."
"나야 좋긴 한데.. 저번에 이야기 하는 거 보니까 기레스는 하일즈를 꽤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던데? 열등감도 느낀다고 말했고..."
마치 친한 친구에게 고민상담이라도 해준 것만 같은 클로에의 말투에 하일즈는 인상을 구기며 생각했다.
'그 씹새끼는 주책 없이 클로에한테 뭔 이야기를 해댄거야... 그래도 내가 괴롭혔다는 이야기까지는 안한 모양이긴 하지만..'
"그거야 형 사정이고.. 너나 나나 가르쳐 준다는 약속만 지키면 되는 거 아냐?"
"그래도 이왕 가르쳐 주기로 한 거, 나도 괜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단 말야. 혹시라도 기레스가 하일즈를 의식한 나머지 집중하지 못하면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되어 버리잖아."
'하아.. 이 고지식한 년... 그 병신새끼한테 그렇게까지 착실하게 가르쳐 줄 필요가 뭐 있다고... 어차피 모르는 거나 물어올 거고 그마저도 씨알 이해도 못할텐데, 그냥 대충 대답이나 해주고 치우면 되는 거 아닌가?'
옹고집도 저리가라할 정도의 고지식함에 답답해진 하일즈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클로에를 설득하려 들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다소 구질구질하게까지 매달리는 하일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하일즈 답지 않게 여유가 없어 보이는 거 같은데. 하일즈 혹시..."
의심쩍다는 듯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하일즈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조심스레 떠보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기레스를 가르칠 때, 둘이서만 있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뭐?"
"아까부터 기레스와 날 떨어뜨려 놓거나, 시야가 닿는 곳에서 같이 공부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말야. 혹시 기레스를 의식해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
"혹시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기레스를 가르치는 건 포기할게. 뭐니뭐니 해도 이런 사소한 일로 화목을 깨는 건 원치 않으니까.."
"아니, 클로에 뭔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내가 기레스 따... 형을 의식할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로에에게 기레스를 의식하는 건 아니냐고 의심받다니, 농담이라고 해도 하일즈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수치는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평소와는 다르게 꽤나 집요하게 기레스랑 내가 단 둘이 되는걸 꺼려했잖아?"
'그건 내가 그새끼를 싫어해서 그런거고.. 아니, 어떻게 보면 이것도 질투라고 할 수는 있나..?'
혐오하는 기레스가 약혼자인 클로에와 사이좋게 지내는 꼬라지를 보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유치한 이유도 어떤 의미로 질투라면 질투였지만 하일즈는 클로에에게 질투라고 시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쨋든 질투는 아냐.."
"흐음.."
그런 하일즈를 지그시 바라보던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기레스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놀러가는 건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하일즈가 내키지 않는다고 하면 기레스에게 거절해 두도록 할게."
"약속 했는데 괜찮은 거야?"
"거절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까.. 기레스의 요구는 거절해놓고 뻔뻔스럽게 따로 하일즈 너랑 공부하는 짓을 못하겠다는거지. 사정이 있는 거절이면 기레스도 이해해 줄텐데 뭐."
'윽...'
방금까지는 같잖은 질투심에 거부감을 느꼈으면서도, 막상 클로에가 집에 오지 않는다고 하니, 그건 그것대로 너무나 아쉬워서 하일즈는 이내 안달이 나버렸다.
그런 끙끙 앓는 하일즈의 모습을 보면서 클로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하일즈의 여자친구니까.. 하일즈가 바라는 대로 해줄게. 기레스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가끔식 집에 들르는 거랑,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어느 쪽이 좋아?"
자연스럽게 결정권은 하일즈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음... 클로에와 기레스가 지금보다 좀 더 친해질지 모른다는건 살짝 꼽긴 하지만.. 클로에의 성격을 생각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남녀관계가 될 리는 없을거고... 나는 나대로 간간히 클로에를 집에서 만날 수 있다는건데..'
하일즈는 동거 때 티나와 기레스가 요리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클로에의 뱅어같은 손에 인정사정 없이 정액을 쥐어 짜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랫도리를 벌벌 떨었다.
후끈 달아오른 얼굴로 하일즈는 클로에의 새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매끈한 손가락을 보면서 그 때의 쾌감을 상상하면 뇌가 저릿해지는게 다시 한번만 당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이 속이 달아 오른다.
'으..'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발정나 버렸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일즈를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짓고 있는 클로에의 자태는 선택의 천칭을 서서히 기울게 만들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거절까지 해준다고 하는 거 보면.. 이러니 저러니 해도, 클로에도 날 꽤 생각해 주고 있고..'
이미 기레스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자신이 바라지 않으면 거절까지 해주겠다는 게 클로에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결심이고, 배려인지 하일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기레스 그 병신놈 따위한테 좀 베푸는게 뭐 대수냐. 내가 클로에랑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거지... 기레스 새끼를 위하는 척을 하면 클로에의 호감도 쌓을 수 있을거고.. 좀 꼬운 부분도 없는 건 아니지만 딱히 손해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밖에서 만날 때와는 다르게 집에서는 기회만 닿으면 또 클로에가 해줄지도 모르고...'
"? 하일즈?"
"어.. 어어.. 그.. 기레스 형도 리움 사관학교에 가겠다고 그렇게 애쓰는 모양인데 네 약혼자라고 내가 너무 과민하게 초쳐 버리는 것도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
"그 말은.."
"형한테 가르쳐 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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