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233화 (233/238)

〈 233화 〉 티나(125)

* * *

"후우...."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클로에는 작지만 땅이 꺼질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락에 허덕이던 동거가 끝난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클로에는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그리워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평소 같았으면 오늘은 기레스와 얼마나 문란한 행위를 하게될 지를 상상하며 들뜬 마음으로 방과후를 기다렸을 시간,

수업이 끝나면 유페르 가문의 집에 들어가 티나가 하일즈를 꾀어낸 사이, 기레스의 방에서 질탕지게 놀았던 것이 머릿 속에 떠오르자 클로에의 온몸은 오슬오슬 떨려온다.

2주라는 시간동안 새겨진 은밀하고도 음탕한 장난질은 자연스럽게 클로에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어제는 밤잠도 설치고..'

퀭한 눈으로 클로에는 하루마다 티나와 함께 번갈아 기레스의 방에서 잤던 일을 떠올렸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본능에만 몸을 맡긴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몸을 섞어대거나, 기레스에게 안겨 속살을 살살 간질이는 손가락을 만끽하면서 맛봤던 단잠은 이제와 다시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달콤한 것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또 기레스의 품 안에서 그 나른한 느낌을 맛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클로에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제 내가 없으니까..'

당연히 집 안에 남은 유일한 좆집인 티나가 기레스를 독점할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클로에의 속이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으읏..'

부럽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슬근슬근 다리를 배배 꼬아가면서 기레스의 구석구석을 핥아대며 환희에 떨던 티나의 모습을 떠올리던 클로에는 순간, 찌르르 떨리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안돼. 안돼.'

더 떠올렸다가는 교실에서 숨기지도 못할 정도로 젖어버릴거라 생각한 클로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나저나.. 자연스럽게 기레스와 하던 특훈도 멈춘 상태가 되어 버렸네. 아줌마가 돌아오신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얼른 다시 시작하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클로에는 익숙한 발걸음에 쫑긋거리며 뒤를 돌아 보았다.

기레스의 얼굴만 봤을 뿐인데도 시무룩 했던 클로에의 표정에는 어느새 미소가 넘실거리는 얼굴로 바뀌었다.

'음.. 그런데 왜 저렇게 심각한 얼굴이지?'

화가 났다기 보다는 고민이 있는 듯한 기레스의 얼굴에 클로에는 의아해 했지만, 장소가 장소니 만큼 기레스에게 대뜸 물어볼 수는 없었다.

"......"

어딘지 진지한 얼굴로 클로에의 앞에서 멈칫 거리던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몰래 쪽지 하나를 클로에에게 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방과 후에 구교사에서 보자.]

수업이 끝나고 클로에는 쏜 살 같이 내달려 구교사로 향했다. 당연히 기레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 구교실 주변을 둘러보는 클로에의 입꼬리는 슬금슬금 올라갔다.

"하아..♥"

기레스와 자신만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는 비밀의 공간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클로에는 단숨을 내쉬었다.

'동거도 좋지만.. 여기서 뭣도 모르고 즐길 때도 정말 좋았는데..'

그렇게 답지 않은 푸근함이 물씬 거리는 얼굴로 클로에가 소중한 추억을 곱씹던 사이 교실의 문이 열렸다.

"오.. 클로에 빨리 왔네?"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까.."

매사 달라 붙어 있던 동거 때와는 다르게 기레스가 없으니 정말이지 하고 싶은 게 없었던 클로에는 약간 냉랭한 어조로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하일즈와 약속이라도 있으면 좀 기다려야 되나 싶었는데.."

반면 기레스는 클로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다.

자신은 애가 타 죽겠는데 세상 모르고 태연하게 하일즈를 언급해대는 기레스를 보면서 클로에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보나마나 집에서 티나와 즐길만큼 즐겼겠지.'

자신의 눈앞에서도 그 치태를 보였는데 안 보이는 곳에서는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방해꾼도 없겠다 아주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었을거라 생각한 클로에는 지그시 기레스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기레스. 무슨 일로 불렀어?"

방금 전의 다소 냉랭한 어투가 따스했다고 느껴질 정도의 싸늘한 말투로 클로에가 물어오자 기레스는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클로에 너 화났냐?"

"전혀? 불렀으니까 무슨 일로 불렀냐고 물은 것 뿐인데?"

"흐음... 그 뭐냐.. 일단 다시 단련하는 일정도 잡아야 되고.. 또 한가지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 불렀지."

"이야기?"

"거.. 엊그제까지 같이 동거 했었잖아."

기레스는 약간 멋쩍은 듯이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기레스가 동거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클로에도 단번에 누그러진 어투가 되어 버렸다.

"으.. 으응.. 그랬지."

"단련 일과도 없겠다 집에서 혼자 있어 보니까 그게 엄청 생각나더라고."

'으...'

주책없이 능청스럽게 말해오는 기레스의 말 하나하나는 클로에의 마음을 콕콕 쑤셔댄다.

"그래서?"

"원래는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꺼낼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안달이 나서 못 참겠어서 말이지. 클로에 너도 저번에 집에서 즐기지 못하게 되서 아쉽다고 하기도 했겠다. 우리 집에 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나 좀 해볼까 싶어서 불렀지."

"응? 하지만 기레스 집에는 티나가 있잖아? 안달이 나고 말고 할 게 있어? 걍 못참겠으면 티나랑 즐기면 되는 거 아냐?"

아까보다는 누그러졌지만 아직 퉁명스러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클로에가 물어오자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단순하게 성욕처리적인 측면으로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성욕처리가 다는 아니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긴 한데 너도 욕구불만이라고 하일즈한테 안기고 싶은 건 아닌 거 아냐?"

클로에가 하일즈와 궁합이 맞지 않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기레스와 클로에에겐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읏... 뭐.. 그렇긴 하지만.. 나랑 다르게 기레스 넌 티나가 꼴린다며?"

자연스럽게 자신은 하일즈는 꼴리지 않는다고 인정하면서 클로에는 입을 삐죽거리며 티나처럼 툴툴거렸다.

"꼴리긴 한데.. 날 대하는 취급이라는 게 있잖냐. 티나 녀석 애무에 미쳐서 예전만큼 사납지는 않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쾌락을 위한 도구로 날 사용하는 점도 있고.. 거기에.."

기레스는 잠시 머뭇 거리자 클로에는 기레스를 부추기듯 되물었다.

"거기에..?"

마치 치부를 고백하는 것마냥 머뭇거리던 기레스는 적당히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거기에.. 으음.. 저번에도 말하긴 했지만 클로에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하일즈 몰래 한다는 게 상황적으로 특별하게 꼴리더라고.."

'아흣♥'

"티, 티나랑도 하일즈 몰래 할 수는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단순하게 몰래 하는 거랑 '약혼녀인 너랑' 몰래 하는 거랑은 아무래도 느낌이 달라서 말이지."

기레스의 그 말에 클로에는 살짝 숨이 멎을 것이 마음이 벅차올라 버렸다. 이미 자신은 기레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고, 알음알음 서로간에 하일즈를 의식하며 즐기긴 했지만 이렇게 기레스쪽에서 대놓고 고백을 한 것은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단순하게 꼴리고 말고가 아니라 '하일즈를 의식하기에 티나보다 자신이 더 꼴린다'는 기레스의 말에 클로에는 마치 기레스에게 인정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질투로 흉흉히 싸늘했던 마음 따위는 옛적에 날아가 버린 클로에는 음탕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그윽한 시선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러니까.."

다음 날, 클로에는 하일즈를 따로 불러냈다. 약속한 장소에 하일즈가 나타나자 클로에는 활짝 웃으며 하일즈를 맞이했다.

어딘지 동거 이후로 클로에의 화사한 표정을 보는 일이 늘었다고 생각한 하일즈는 흐뭇한 미소를 띄었다.

"아 클로에 여기야. 여기."

기레스와 밀회를 거듭하고 있을 때도, 간간히 데이트나 만나는 일을 하곤 있었지만, 성격이나 상황상 당연히 대부분은 하일즈가 클로에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이렇게 클로에가 하일즈를 부르는 경우는 흔치는 않는 일이었다.

'역시 같이 지내다 보니까 클로에도 좀 더 마음을 열게 된 걸까?'

티나의 경고도 있었겠다. 김칫국을 마시고 싶진 않지만, 저 클로에 답지 않은 밝은 표정에 굳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먼저 불렀다는 현실은 하일즈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저.. 하일즈."

한동안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 클로에는 적당히 운을 띄웠다.

"응?"

"사실, 어제 기레스한테 부탁을 받았는데.."

"기레스 형? 부탁이라니 무슨 부탁?"

"아.. 다른 건 아니고, 얼마 전에 같이 지낼 때 있잖아. 그 때 기레스가 모르는 게 있다고 나한테 물어 본 적이 있어서 답을 해준 적이 있었거든.."

"그랬어? 그래서?"

동거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레스와 달리 하일즈는 매사 클로에와 달라붙을 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하일즈는 모르는 비는 시간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대놓고 혐오하는 티나와, 몇번이고 기레스에게 구박을 주며 협박까지 일삼은 자신에게 물어올리는 없기에 집에 유일한 아군인 소피아가 없는 이상, 기레스가 클로에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 자체는 크게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상대가 그토록이나 혐오하는 기레스다보니 잘도 주제도 모르고 설쳐댔다는 생각에 하일즈의 목소리에는 절로 짜증이 묻어 나왔다.

'참자.. 참아.. 티나가 그랬잖아 클로에는 이런 거 싫어한다고..'

"어제, 혹시 괜찮으면 리움사관학교의 시험을 치르지 전에, 자기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냐고 물어왔거든."

"뭐..?"

* * *

0